태어나 줄곧 강남에 살았지만, 소위 강남의 버블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강남 아파트를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의 경제의 흥과 계층 이동의 마지막 광란의 파티를 옆에서 지켜보는 초라한 강남구민 중 하나였다. 나는 어린 시절 내내, 늘 궁금했다. 왜 사람들은 내가 사는, 그리고 내 눈에는 별것 아닌 ‘강남’을 외치는지, 그런데 나는 왜 ‘강남’ 뒷골목에서 월세와 전세를 전전하며 살아야 하는지, 어째서 내 친구들은 늘 개포동이나 대치동으로 이사를 가거나, 강북에서 이사를 왔거나, 나보다 다들 잘 살았거나, 왜 그들의 부모는 양옥주택을 허물고 다세대 가구를 짓는지. 나는 내가 왜 강남에서 태어나 이렇게 살고 있는지를 설명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사람들의 말대로라면 당연히 한 번쯤은 우리 부모님에게 기회가 있었어야 했다. 그리고 그 시대의 버블을 잘 탔다면, 이런 지면이 허락되지 않을 - 실제로 강남 거주인들 중 미디어스 구독자들의 비율이 어떨지 궁금하다- 삶을 살고 있어야 한다. 강남에서 변두리란 - 그러니까 구룡마을이라거나 - 그런 삶을 의미한다.

강북에 있는 대학에 입학한 뒤, 나는 늘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다 그런 강남만 있던 것은 아니라’고. 강남 애라는 편견을 듣기 싫었으리라. 심지어 나는 전형적인 강남 애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정말 쓸데없는 말이었다. 입학과 동시에 알게 된 건 그 대학에서 출발해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를 잇는 노선인 버스가 그 동네에서 ‘꽃마차’로 불린다는 것이었다. 유명한 여대를 지나, 요즘 떠오르는 한남동을 지나, 한동안 유행을 선도했던 신사동을 지나, 그보다 먼저 흥했던 압구정 로데오를 지나, 강남의 백화점 3개는 지나 신흥 강남 주택가를 이어주는 노선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더는 나의 강남 생활을 해명하려 들지 않았다. 다만 발에 채이는 지방 유지 출신의 자녀들과 강북 출신 중산층 자녀들에 비해 내가 무엇이 없는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강남이란 동네에 살며 남들과 비교했던 문화자본이 계층 문제로 연결되는 시점이었고, 학문적으로 ‘내 열폭’을 힐링시켜준다는 기분에 사로잡혀 사회과학 특히, 사회학을 특히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살던 강남을 기묘한 방식으로 긍정하게 된 건, 소위 트위터 계에서 ‘콘유’라 불리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아파트 게임>의 저자인 박해천의 글을 읽고 나서다. 그는 ‘비평적 픽션‘이라는 방법을 사용한다. 전작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먼저 시도된 이 방법은 ‘아파트’가 화자가 되어 자신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서술하는 식이다. 독자는 문체가 던져주는 친밀감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생명체가 아닌 사물이라는 사실을 끝없이 자각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독특한 독서 경험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기묘한 흥분을 불러 일으킨다. 저 서사를 이해하는데 멈추지 않고, 그것을 이해하는 자신에 대해 어떤 지적 우월감을 주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던져준 사회과학 글쓰기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실제로 그는 단 3권의 도서로 출판계와 언론의 러브콜을 받으며 ‘뉴파워라이터’로 선정되게 된다.
또 하나의 특징은 저자가 트위터를 통해 원고를 집필하는 중간중간 문장들을 흘린다는 것이다. 실제로 집필을 트위터에서 하는지, 아니면 어떤 표현을 쓰고 만족스러워, 또는 테스트를 위해 트위터에 흘리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여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면, 트위터에서 사유를 정리하거나 쓰는 이들에 관해서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근 2년 동안 저자의 문장을 보며, 나는 꽤 위로를 얻었다. 그것은 ‘나를 괴롭히던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는 이유로 사회학을 좋아하게 된 것이나, 여전한 문화자본에 대한 결핍을 채워주는 우월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글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그것은 나에게 힐링이고 인증이며, 묵시록적인 디스토피아에 대한 소심한 북극성이기도 하다. 그의 말대로라면 우리 세대는 다른 의미로 모두 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적 박탈감의 범위가 완전 달라진다.
책에 따르면 사회 계층을 올리기 위해 어떤 이들은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내걸어야 했다. 월남전 참전이 그랬고, 중동 파병이 그랬다. 그리고 그 대가가 서울의 아파트였고, 그 시기 붐을 잘 타면, 아파트는 보상이 되어 돌아왔다. 그러나 우리 집에 한정하면, 월남전 참전을 했던 아버지와 중동 파병을 다녀온 외삼촌은 모두 중산층이 되지 못했다. 나는 이 책을 읽고서야 월남전 참전을 다녀온 우리 아버지가 1세대 부흥을 경험할 수 있었던, 그리고 했어야만 했던 사람이란 것을 알았다. 비로소 아버지가 가부장으로 무능력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었다. 엄마의 인생 한탄의 한 버전은 “나 어릴 때 월남전 다녀온 사람들은 어마어마하게 금의환향했어”였다. 두 번째 기회는 엄마에게 있었으나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미용실을 들락거리던 아줌마들이 빠르게 개포동 아파트로 이사를 가며 전세를 끼고 집 사기와 임시로 세를 살며 집을 넓혀가는 것을 반복하는 것을 보면서도 엄마는 선택하지 못했다. 가출해 가발공장 기숙사에 살며 대학까지 독학으로 공부한 엄마도 그건 넘어서지 못했다. 세 번째 기회는 강남이라는 장소가 주었다. 재건축 붐이 일었을 때 나는 매일 같이 뉴스 헤드라인에 나오는 아파트들 사이에서 통학을 하고, 학원을 다니고, 떡볶이를 먹으러 다녔다.
부동산을 알아보다가 4인 가족이 살만한 어엿한 방 3칸짜리 전셋집이 이제는 너무나 희귀한 물건이라는 걸 깨달은 날, 대형마트에 들려 장을 보다가, 바로 옆에 지어진 재건축 브랜드 아파트들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저런 곳에 영원히 살 수 없나 봐” 이건 내가 마치 백수 시절,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했던 생각과 똑같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는데, 나를 위한 일자리가 하나 없는 걸까?’ 누군가 계층 상승을 한다는 것, 누군가 무엇을 가진다는 것은 다른 이의 상대적 박탈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한국 사회에서 누군가가 중산층에 진입했다면 누군가는 박탈당하고 있고 소외당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20세기 디자인의 역사는 사실상 중산층의 역사이고, 한국 중산층의 역사는 실질적으로 아파트의 역사라고 말한다. 그래서 저자는 아파트를 연구했다. 날 것과 같은 아파트와 그 중산층의 고백을, 그 작동 원리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게 내게는 위로가 되었던 것이다. 엄마와 망연자실 아파트를 올려다보던 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염없이 올려다 볼 수밖에 없었다. 그 높은 콘크리트 직사각형에 푸른 잎사귀가 자아내는 풍경은 정말이지 너무 아름다웠다.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그 많은 것들을, 계속해서 꿈꾸고 싶었다. 그것은 우리 가족에게 살아야 하는 이유였고, 존재해야 하는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20년을 내리 강남에 살며, 우리 집이 얻은 것은 ‘가계 소득 하위 가구’ 즉, 하류 계급이라는 딱지였고, 덕분에 그 딱지를 이용해 지자체(서울시장은 언제나 중요했다!)가 실시하는 장기전세 시프트에 ‘도서 근로자 평균 소득 80% 이하 전형’으로 강남의 재건축 아파트에 당첨되어 살고 있다. 의도하지 않았겠으나 부모님의 무주택 전략은 훌륭했다. 애매하게 저축한 돈으로 자신들의 노후와 자식들의 등록금을 위해 자영업을 시작하거나, 뒤늦게 부동산 거품의 막차를 타지 않았다는 것에 나는 이제 주저 없이 부모를 존경한다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어쩌면 저자가 주장한 10년 주기로 이어진 버블을 곳곳에서 보면서도 ‘배운 것 없어도 시대의 파도에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를 지키고자 했던 소시민의 현명한 지혜 또는 필연적 전략’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저자는 이 10년 주기로 되풀이되는 개별 세대 구성원들의 ‘아파트를 통한 계층 상승’을 중산층들의 아파트 게임이라 명한 것이고 그게 바로 <아파트 게임>이 다루는 내용이다.
내가 ‘중산층의 맛’을 경험한 것은 대학 때였다. 경제 수준이 조금 높은 친구들이 조금 많았던 사립대였다. 집이 멀다며 등하교의 어려움을 하소연하던 학생회 국장 선배는 집에 가는 길엔 환승하기 좋은 신세계 강남점에 들려 푸드코트에서 먹을 걸 사서 경기도 위성도시로 가는 버스를 탄다고 말했다. 그게 내 동정이 필요한 지방 도시가 아니라, 용인, 평촌 등의 강남에서 부동산 자산을 축적한 이들이 내려가는 부촌이라는 것을 아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여성운동을 하던 후배는 상근 활동을 마치고 배낭여행과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요일별로 효율적인 동선을 짜며 아르바이트를 최소 2개씩 하던 나는 ‘언제 돈을 그리 모았느냐’라며 내심 부러움을 가장해 돈의 출처를 물었다. 그녀는 ‘펀드 수익이 조금 났다’고 말했다. 그때 알았다. 아, 이건 그러니까 토익점수 몇 점을 올린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구나.
백화점 버스를 타고 학원에 갈 수 있었던 학창시절. 유난히 분당에 사는 친구들이 많았던 이유, 과외를 구하는 일도 네트워크의 증명이라는 것을 아는데 걸린 시간 동안, 나는 빠르게 내 욕망을 정리해나갔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때 만든 부모에 대한 원망은 빠르게 연민으로 바뀌어 나갔다. 우리 부모는 늘 열심히 살았다. 다만 그 버블에 올라타려 하지 않았을 뿐이다. 두려웠거나, 원치 않았으므로. 저자에 따르면 ‘아파트가 준 불로소득은 고도성장을 통해 축적된 사회적 부를 시세차익이라는 형태로 그 소유자들에게 배분하는 사회 시스템’이었을 뿐이다. 즉 아파트는 복지제도를 대신했던 것이다. 그것을 ‘알고 경험할 수 있었던 사람‘에게만. 다시 한번 말한다. 누군가 가졌다면 누군가가 잃은 것이다. 게임은 그런 거다.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바이 코리아’부터 ‘카드 대란’을 거쳐 ‘부동산 폭등세’까지 폭주에 폭주를 거듭하며 계속된 이른바 ‘투기적 과열 상태’. 그 뜨거운 열기 속에서 어떤 사람은 즐겼고, 어떤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따라 하려고 발버둥 쳤고, 어떤 사람은 모른 척했고, 어떤 사람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견뎠고, 어떤 사람은 쫓겨났다.”(57쪽)
우리 부모는 강남이 개발되며 쫓겨났다가, 견뎠고, 모른 척했으며, 발버둥 쳐야할 때쯤 그냥 나이가 들어버렸다.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그것이 우리에게 왔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파국이 끝난 것은 아니다.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고, 전국의 모든 대학 정원이 빠르게 줄어드는 그 시대, 더 이상 아파트도, 고도 성장도, 사회도, 문화도, 정치도 사회의 완충지를 만들지 못하는 순간, 여전히 이 파국은 우리 앞에 예정되어 있다.
나는 박해천의 트윗을 보며, 그야말로 <88만원 세대>에 대한 가장 정확한 답을 내놓고 있다고 생각했다. 세대론이 소위 젊은 필자의 자기 서사, 잉여 담론, 세대 갈등 분석, 계층 고착화 관점, 그리고 잉여 담론이 발전한 ‘우경화되는 젊은이’들로 분화되어 발전하긴 했다. 그러나 이것들은 세대론의 층위에서 나타난 프레임들이지 <88만원 세대>의 문제제기를 정확히 발전시켜나갔다고 보기는 어렵다. 공통적으로 자기 고백의 서사를 넘어서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박해천은 세대론이라는 표현 대신 ‘큐브’를 제시한다.
중산층이 스스로를 유지시키기 위해 어떻게 현 20대를 착취하고 있는지가 ‘큐브론’의 핵심이다. 이런 식이다. 대학 재단 적립금을 쌓기 위해 등록금은 오르고 (그 혜택이 누구에게 가겠는가. 그 수혜 대상은 이 시대의 대학생들이 아니다. 다음 세대의 자녀들이거나, 지금의 대학 경영진들이다), 그 등록금을 부담하기 위해 부모 세대의 고용주들에게 저가로 노동력을 바치는 (심지어 1년 내내 일해도 등록금의 총액이 되지 않는 시급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 아르바이트를 해 번 돈으로 또다른 부모 세대 소유의 고시원 사장에게 돈을 내고 산다. 그 고시원은 또 다른 베이비부머 세대 건물주에게 월세를 내고 있고 이 큐브론은 결국 20대의 모든 일상과 잉여를 착취해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세대론은 20대의 빈곤을 말했지만 큐브론은 모두가 20대에게 빨대를 꼽아 ‘성장이 끝나버린 경제’를 유지하고 있음을 처절하게 증명한다.
영원히 고시원과 원룸을 벗어날 수 없는 세대, 바로 큐브의 세대다. 이들이 88만원 세대이며, 3포 세대다. ‘젊은 세대’의 미래를 볼모로 삼은, 거품 끝난 부동산 시대의 새로운 착취다. ‘창조경제’도 기실 젊은 세대를 더욱 소비자로 착취하겠다는 시장적 판단일 뿐이다. 자꾸 생겨나는 서비스들, 새로운 창조 산업, 콘텐츠 산업이라는 게 결국 ‘빈자의 시간’을 기업의 ‘돈’으로 바꿔내는 과정이 아닌가. 왜 이들이 노리는 타겟이 언제나 젊은 층이겠는가.
이제 이 긴 리뷰를 끝낼 때가 됐다. 책에 따르면, ‘강남 좌파’는 체제의 수혜자로 성장해 엘리트로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들을 일컫는 용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물질적 풍요를 누려본 적이 없음에도 ‘강남좌파’로 보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내 물적 기반이 아파트가 아닐지라도, 내가 가진 지리적 특성에서 내가 완전히 괴리되지는 못한다는 즉 일정 부분 체제의 수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을 인정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체제의 수혜자도, 엘리트도 될 수 없었기에, 정말이지 계층 상승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그들의 체제와 리그를 이해할 수 있는 강남좌파’라는 인상을 주고 싶다는 의미기도 하다. 나는 중산층들이 가지고 있는 다른 계급에 대한 애매한 스탠스와 시선을 안다.
“1947년생으로 미국의 베이비붐 세대 작가인 스티븐 킹은 어디선가 자신이 속한 세대를 비판하면서 “세상을 바꿔놓을 기회가 있었는데도” “고작 홈쇼핑 네트워크 따위로 만족해버렸”다고 말했다. 책에서 이 문장이 쓰이는 맥락은 당연하지만 386이 경험한 버블이다. 그리고 아마 이 말은 저자가 자신의 주변에 대해서도 던져본 질문이 아니었을까. 속한 세대가 세상을 바꿔 놓을 기회가 있었는데도 고작 아파트 따위로 표현되는 경제적 지표들에 만족해버린 것. 국가가 외면한 단물에 빠져 미래를 만들어내지 못한 것. 디스토피아는 이 사회의 구성원들이 만든 것이다.
“우리가 미안해”라고 자보를 쓰고, 젊은 세대에게 고백하지 않더라도 이 사회에서 게임의 룰에 들어갔거나 들어가고자 했던 사람들은 그것이 386들의 위선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우리 세대에게도 똑같이 직면될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세대에게 전가된 시대는 바꿔놓을 기회조차 없는 몰락한 사회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외친다. "내 살아서만은 그 파국을 보지 않기만 바랄 뿐!"
그러나 나는 될 수 있다면, 아파트 게임을 했던, 부동산이라는 자산을 성공적으로 쌓아올렸던 그들을 이해하고 싶다. 그것들을 가지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걸까. 아니! 왜 그들이 실패했는지 도대체 그 게임의 승자들이 얻은 것이 무엇인지, 왜 나는, 우리는 그토록 그것이 커보였는지 너무나도 궁금하기 때문이다.

미스김

블로그를 운영한 흑역사를 지닌 미혼의 직장인. 현재 글밥을 먹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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