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부 제2차관 신재민의 ‘KBS사장에 대한 해임권을 대통령이 갖고 있다’는 잦은 조잘거림이 ‘음모’의 출발점이었음을 익히 알고 있었으나, 실상 감사원의 어제 발표, 즉 ‘KBS사장 해임요구’에 직면하니 소름이 돋는다.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권력의 시녀’ 검찰이나 국세청이야 원래 권력말기에는 감시견인 체 하다가 권력교체기에는 집권세력의 정적들을 물어뜯는 아주 충성스러운 ‘사냥개’였음을 모르는 바 아니었는데…. 하지만 감사원마저….

무엇이 '비위'고 어떻게 '현저'한가?

▲ 정연주 KBS 사장 ⓒ여의도 통신
감사원은 뉴라이트전국연합 등 특정 정치단체가 국민감사를 청구한 지 불과 1주일 만에 전격적으로 KBS감사를 결정한 과정에서부터 KBS 사장 정연주를 물어뜯을 사냥개로 자처하더니, ‘현저한 비위’ 운운하면서도 정연주 개인비리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못함으로써 ‘비위’라는 법률용어에 대한 최소한의 상식마저 전복시켰다. ‘현저한’이라는 내용도 ‘부실한 감사’의 또 하나 ‘상징’이 될 전망이다. 감사원이 밝힌 ‘현저한 비위’의 내용을 보면, 그동안 한나라당과 수구단체들이 수년간 앵무새처럼 되뇌었던 주장을 ‘녹취’한 듯, 감사결과라고 내놨다.

곳곳에서 법률전문가가 아닌 사람들마저도 의구심을 증폭시킬 수 있는 내용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는 점에서 감사원이 얼마나 일정에 쫓겼는지를 읽을 수 있다.

8월8일. 국민들의 눈과 귀가 북경올림픽 개막식에 집중되어 있는 날, KBS이사회가 해임제청 결의를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줘야 하고, 그래야 ‘신재민이 말마따나’ 대통령이 해임권한을 행사할 수 있을 터.

그럴 수 있다. KBS 정연주를 쫒아내기 위한 ‘비리’를 찾으라는 정권의 압력이 얼마나 집요했으면 ‘비리’도 ‘비위’도 아닌 ‘수구세력의 선전선동’을 감사결과라고 발표했을까. 그것도 올림픽 개막일과 금메달이 쏟아지는 개막 직후에 KBS이사회와 대통령의 무법적 해임시나리오 일정까지 맞춰내려했으니….

감사원법 32조9항, 무법천지 정치보복 조항 전락

그런데 하지 말아야 할 법 적용을 함으로써 이제부터 감사원의 모든 감사는 정치적 보복을 위한 감사로 전락하고, 감사할 때마다 비난의 대상이 되기를 자초한 꼴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감사원법 32조9항 적용이다. 즉, ‘법령 또는 소속단체 등이 정한 문책에 관한 규정의 적용을 받지 않는 단체 등의 임원이나 직원의 비위가 현저하다고 인정한 때에는 그 임용권자 또는 임용제청권자에게 해임요구를 할 수 있다'는 것.

최소한의 법률적 상식이 있으면 KBS 사장에 한해서 32조9항 적용은 ‘택도 없는 법 적용’이 아니라 ‘무법천지에서 적용한 가능한 정치보복적 법 적용’으로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면….

1963년 12월16일,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방송법’이 제정된 이후 지금까지 수 십 년의 세월 동안 방송관련법은 분화와 통합을 거듭해 왔다. 이 과정에서 방송법과 한국방송공사법이 따로 존재한 기간이 1973년 12월31일부터 2000년 1월11일까지다. 그리고 2000년 1월12일 다시 한국방송공사법은 폐지됨과 동시에 소위 ‘통합방송법’ 내 ‘제4장 한국방송공사’로 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KBS의 이사와 사장에 대한 구성절차와 내용도 시대적 흐름에 따라 변화하고, 법률용어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뀌는데, 특히 이사와 사장에 대해 ‘임명→임면→임명’이라는 법률 용어의 변천 과정을 눈여겨봐야 한다.

‘임명→임면→임명’의 변천사가 뜻하는 것, 바로 '방송 독립성' 보장

그 내용을 찬찬히 들여다 보자.

1972년 12월31일 제정된 한국방송공사법에서 ‘임원’ 관련 조항이 최초로 등장하는데, 이때는 사장을 대통령이 ‘임명’하고 이사는 문화부장관이 ‘임명’한다.

제9조 (임원) ①공사에는 사장 1인, 부사장 1인, 이사 3인, 감사 1인을 둔다.
②사장은 문화공보부장관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③부사장 및 이사는 사장의 추천으로 문화공보부장관이 임명한다.
④감사는 문화공보부장관이 재무부장관과 협의하여 임명한다.

사장과 이사에 대한 대통령과 장관의 ‘임명’이 십 여 년 계속되다가 1985년 12월31일에 ‘전부개정’된 한국방송공사법은 ‘임원’에 대한 임명절차와 방식이 삭제된다. 그 후 2년만인 1987년 11월28일에 다시 ‘전부개정’되는 법에서는 ‘이사회 구성’과 ‘사장의 임면’에 대한 규정이 되살아나는데, 기존의 ‘임명(任命)’에서 ‘임면(任免)’으로 법률용어가 바뀐다.

제8조(구성)③이사는 방송법 제11조의 규정에 의한 방송위원회의 추천으로 대통령이 임면한다.
제15조(임면)①사장은 이사회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면한다.

그리고 10여 년 동안 방송법 개정을 위한 지난한 논의를 거쳐, 2000년 1월12일 제정된 소위 ‘통합방송법’에서는 다시 이사와 사장에 대해서 대통령의 ‘임면권’이 ‘임명권’으로 변경된다.

제46조(이사회의 설치 및 운영)③이사는 각 분야의 대표성을 고려하여 방송위원회에서 추천하고 대통령이 임명한다.
제50조(집행기관)②사장은 이사회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 감사원
사실상 대통령의 임명권은 절차적 상징적 차원의 권한을 부여한 것이며, 내용적 실질적 차원의 권한을 갖는 것은 이사회의 제청권임을 분명히 하는 법 제정 정신이 돋보인다. 대통령이 KBS 사장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과 더불어 면직할 수 있는 권한을 쥐게 되면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방송독립’이 사장 인사를 통해서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면직권’을 박탈한 것이다. 이는 ‘방송의 정치적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한 것으로, ‘민주주의 발전에 따른 사회적 합의’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누가 감사원을 감사할꼬

감사원은 이런 방송법과 한국방송공사관련법의 변천사마저 검토하지 않았거나 이해를 못했거나, 검토하고 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부 2차관 신재민이 시키는대로 했거나… 이런 이유 말고 다른 이유를 찾기는 힘들어 보인다.

하기야 ‘사냥개’가 법률용어의 변천사를 공부할 이유도, 알아도 아는 체할 이유도 없다. 그냥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게 ‘사냥개’니까. 어쩌다가 감사원 너마저… 쯧쯧쯧… 이제 누가 있어 이런 감사원을 감사할꼬… 세금 내는 국민들을 감사원이 참으로 비참하게 만든 어제, 그 길고 고통스런 하루는 감사원의 건강한 직원들뿐만 아니라 국민들도 마찬가지였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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