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과 새해가 꼭 같이 붙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처럼 묘한 조합도 없다 싶다. ‘연말’만 생각하면 아직 정리하지 못한 것이 산더미 같고, ‘새해’를 생각하면 이 모든 걸 아싸리 새 기분으로 돌아오는 해부터 시작하면 될 것 같다. 어떻게든 연말이 다 가기 전에 근접할 수 없을 것 같은 망연함이 더해질 때 이런 합리화는 바로 앞 발을 내민다.

연말이고 새해고 ‘일자만 바뀔 뿐 같은 날이다’ 하는 의연한 마음 한 편으로, 애당초 해가 바뀔 때에 이만큼 이뤄내겠다는 목표를 안 세웠다면 쫓길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트집도 생긴다. 요망한 마음으로 생트집을 잡으며 속을 부글부글 끓이는 사람에게도, 자랑스러운 한 해를 돌아보며 자신을 토닥이는 엄친아에게도 시간은 가고 해는 바뀐다. 금회에는 술렁술렁한 이 때에 보면 적합할 것 같은 영화 몇 편을 저자 마음대로 꼽아 소개해 보고자 한다.

첫 번째 추천작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기적]. 국내에 개봉 된 작품 명은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이다. 좋아 죽던 연애도 내 맘 같지 않고, 슈퍼 갑처럼 떨어지던 일들에 꼬박꼬박 납입금을 내듯이 해내며 착실히 지나온 것 같은데, 손에 쥔 게 아무것도 없던 것 같던 그 해 12월 31일에 이 영화를 보았다. 엄마 아부지에게도 못 해드린 온갖 재롱과 애교를 갖다 붙여도 안 되는 연애와 레전드 오브 을의 자세로 성실하게 해나가도 시원치 않은 나의 미래에 대한 회한이 쌓일 때에 외려 이 영화 속의 형제를 조속히 만나야 한다. 내가 미처 걱정하지 못 했던 세계를 만나게 해주는 따뜻한 성장이 이 영화에는 아주 작아서 더 없이 크게 담겨 있다. 내 삶이 내 맘 같지 않아서 세계 따위 보듬을 틈새 조차 없었다고 변명이라도 하고 싶은 연말이 된 당신. 인디음악을 하고 있는 아빠 역으로 분한 오다기리 죠의 툭 던지는 작은 말들이 마음에 눅눅히 다가올 것이다. 극 중 형제의 막내 류노스케가 아빠 오다기리 죠에게 아빠가 하고 있는 ‘인디음악’이란 대체 뭐냐고 묻는 장면이 있다. 자, 인디음악이란 뭘까. 우리가 올 한해 이루고자 했던, 이루고자 하는 것은 대체 어떤 의미 일까. 영화 [기적]은 헛헛한 이 내 마음에 어쩌면 일어날지도 모를 기적에 대해 지긋이 여운을 남겨 주리라.

다음으로 두 번째 추천작 [라이프 인 어 데이]. 다큐멘터리 라이프 인 어 데이는 유투브를 통해 전세계인의 어떤 하루를 모집하여 담겠다는 시도 부터 화제가 됐다. 사적 다큐를 담아온 특정 감독들이 동일한 시간대의 각자의 삶을 담는다거나, 특정 인물, 주목되는 사건을 기점으로 다룬 다큐들은 많이 보아왔지만, 보통 사람들의 아주 보통의 하루를 모아 이야기를 완성한다는 것은 서사구조를 만들어 내기엔 사실 어려움이 많다. 물론 영화 속에는 전 세계의 하루인 만큼 큰 사건도 작은 사건도 깨알 같이 담겨 있어서 기대만큼 아주 사소한 것들만 담겨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것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하루’라는 것에는 다름이 없음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어떤 청년에게는 오늘이 처음으로 자신 턱 밑을 치고 올라온 낯 선 털 들과의 첫 조우의 날이고, 또 다른 이에게는 오늘이 피켓을 들고 거리에 나서야만 하는 날이며, 어제에 이어 오늘도 야근해야 하는 날이고, 그 누구의 위로도 없지만 스스로 괜찮아지는 날이기도 하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큰 변화 없이 흘러 온 것 같고, 비슷하게 흘러 갈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하루는 매일이 꼭 같지 않다. 어제는 DEMOCRACY가 처음 보는 단어였지만, 오늘은 DEMOCRACY 두 번째 보는 낯 익은 단어가 된다. 보편의 삶이 그리 드라마틱 하지 않은 것 같아서 서운하다 생각이 들면 [라이프 인 어 데이]를 권하고 싶다. 원래 이 모든 걸 받아 들이는 방식도 각자의 몫이다.

세 번째 추천작은 [서칭 포 슈가맨]. 이 영화를 소개하려고 드니, 뭔가 너무 뻔한가 싶기도 하지만 역시 해피엔딩 같은 것을 말하기에 다큐멘터리에서 보여주는 해피엔딩으로 이 만한 선택이 없는 것 같다. 처음 영화는 몇몇에게 기억 되는 어떤 뮤지션을 찾아 그를 기억하는 인터뷰이들을 따라가는 평범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음악에 무지한 나로써는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것 같은 뮤지션을 찾아서 도대체 뭘 하자는 이야기 인가 싶었지만, 뚝심 대단한 감독의 행방 찾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거대한 현실을 마주할 수 있다.

이따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매우 하찮다고 여겨질 때가 있다. (실제로 정말 하찮을지도 모르겠다.) 그다지 남들에게도 도움이 될 법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거나, 만들고 있지 않은 것 같다. 해봐야 나랑 아주 꼭 같은 사람이 어딘가에 있다면 조금 들을 만은 하겠지 싶은 그런 이야기들을 쓰고 담는 것 같은데 그리 같은 사람이 어디 있나. 뭐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어떤 뮤지션이 작게 부르던 노래가 우연히 저 어딘가의 사람들에게 가져다 준 이 기적 같은 다큐멘터리를 보면, 우리가 하고 있는 작은 행위들의 의미가 조금은 달리 해석 될 지도 모른다. 당신이 하고 있는 오늘의 작은 시도가 어떤 이에게는 다른 이름으로 다가갈 수 있다. 원래 새해 인사 라는 게 ‘올 해는 좀 좋은 일도 있겠지’에 ‘그래 어쩌면’이 생략 된 이야기 아닌가.

어떤 일의 결과를 ‘해피엔딩’과 ‘새드엔딩’ 딱 이분법으로 이야기 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 단순한 판단이다. 당신의 어제의 결과가 ‘새드엔딩’이었더라도, 그 엔딩을 받아들이는 당신이 축적한 앞으로의 행보가 다시 다른 엔딩을 확 당겨 올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삶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배웠다.

어쨌든, 어쩌면, 새해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당신이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당신에게도 받아들이는 상대들에게도 하찮아 지지 않기를 바란다. 해피뉴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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