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감이 짙다. 언론계 전반의 무력함이 그대로 노출됐을 뿐, 자조할 것도 없다는 냉소도 파다하다. 박근혜 대통령 기자회견에 대한 ‘기자’들의 반응이다. 미리 세워둔 각본에서 한 치의 이탈도 없던 연기, 성의 없는 질문과 영혼 없는 대답의 엉성한 호흡.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지고 있는 예정된 찬사까지. 320여일 만에 열린 대통령의 첫 언론 나들이는 지금 한국 사회가 처해 있는 곤란과 그 곤란에 기생하고 있는 언론의 무능을 여실히 보여주는 자리가 되고 말았다.

이번 기자회견에 앞서 청와대는 언론을 신문, 방송, 인터넷, 경제지, 지방지, 외신 등으로 구분해 각 영역별로 2개의 질문만을 받기로 했다. 자유질문은 주어지지 않았고, 사전에 교환된 질문에 한해서만 답변할 것임을 기자단에 통보했다. 청와대에 출입하고 있는 언론사 가운데 이 결정에 저항한 언론은 없다. 기자단은 고분고분하게 청와대의 결정을 수용하고, ‘사다리’를 통해 질문자를 뽑았다.

기자회견을 지켜본 많은 이들은 왜 ‘한겨레, 경향, 오마이뉴스, 프레시안’과 같은 진보적 매체, 그나마 대통령에게 예리한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 같은 매체들이 질문에서 배제되었는지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한겨레, 경향은 사다리에서 떨어졌고, 인터넷 매체의 경우 간사를 맡고 있는 ‘뉴데일리’가 질문을 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렇게 12명의 질문자가 선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웃기 힘든 해프닝도 있었다. 애초, 신문에서는 ‘국민일보’와 ‘세계일보’가 사다리를 통해 당첨됐다. 하지만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조중동 가운데 한 곳이 질문을 하면 좋겠다”는 뜻을 피력했고, 사다리에 당첨된 매체 한 곳이 양보해 결국 동아일보 기자가 질문을 하게 됐다. 조중동 가운데 누가 질문을 할 것이냐 역시 사다리를 타서 결정됐다.

정권의 필요에 따라 대리해 들어갔다는 부담감 때문이었을까, 그나마 이 기자는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에 대한 대통령의 입장을 물었다. 하지만 대통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였다. 면전에서 적절하지 않은 질문을 한 사람이 된 이 기자는 그러나 항의하거나 추가로 질문을 던지진 못했다. 아니 던질 수 없었다.

▲ 청와대 출입기자단은 기자회견 직후 취임 이후 처음으로 기자실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과 '화이팅'을 외치며 기념촬영을 했다. ⓒ연합뉴스

청와대는 기자들 사이에서 ‘출입처의 꽃’이라고 불린다. 기자 바깥의 사람들이 보기에도 청와대 출입기자라고 하면 왠지 언론사의 ‘에이스’처럼 보인다. 국가 행정의 모든 정보가 집약되는 곳, 청와대는 이하 모든 출입처를 관장하는 결정이 이뤄지는 곳이다. 두루 경험이 있어야 하고, 이슈와 사안을 횡단해 바라볼 수 있는 경험과 판단력이 필요하다고 얘기된다. 하지만 어제 청와대가 짠 각본에 ‘배우’로 활동한 기자들의 어색한 연기에선 전혀 그런 완숙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참여정부 때는 어땠고, 이명박 정부 때는 또 어땠다는 얘기는 하지 않겠다. 서로 구차할 뿐이다. 참여정부에서 언론이 누린 자율성은 지금의 그것과 비견할 것이 아니고, 이명박 정부도 일방적이어서 그렇지 소통 자체를 지금처럼 불경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어쩌면 또 1년을 기다려야 찾아올지 모를 귀한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현장에서 기자들은 청와대가 캐스팅한 ‘배우’ 이상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다.

비극이고 재앙이다. 대통령이 아젠다를 제시하는 것을 나무랄 순 없지만, “통일은 대박이다”는 희극적 발언을 하는데 현장의 기자 누구도 웃지 않았다. 웃기지 않아서였을까, 아니다. 복수의 매체에 확인한 결과, 그 장면을 TV로 지켜본 편집국마다 일순간에 ‘빵 터졌다’고 했다. 그 보편적 감수성을 청와대에 출입하는 그 기자들만 갖지 못했던 셈이다.

어제, 기자회견에서 새롭게 알게된 사실은 대통령이 퇴근 후 관저에서 개를 키운다는 것 밖엔 없다. 청와대 기자들은 그게 가장 궁금했던 모양이다. 대통령은 밝게 웃으며 힘주어 그 개 이름이 ‘희망이’와 ‘새롬이’라고 했다. 그 개들은 대통령이 오면 꼬리를 치며 반긴다고 한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 그대들이 그 개만큼의 대접도 받지 못하고 있는 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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