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청의 지난 2월 자료에 따르면, 2007년 가구당 월평균 통신비 지출은 13만3500원으로 월평균 소비지출의 6.0%를 차지하고 있다. 이에 따라 통신비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통화료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인터넷전화(VoIP)를 사용하는 가구도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인터넷전화는 대부분의 가정에서 이미 보유하고 있는 유선전화번호 외에 070으로 시작하는 별도의 번호를 부여받아야 한다는 불편함이 있어 저렴한 통화료에도 불구하고 가입자가 현재 120만명에 머물러 있다.

이같은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유선전화와 인터넷전화 간의 번호이동제 도입이 추진돼 왔다. 그러나 당초 지난 6월 도입 예정이었던 인터넷전화 번호이동제가 표류하면서 사업자와 소비자들이 고스란히 피해를 보고 있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지난달 3일 전체회의를 열고 119 등 긴급통화 때 위치추적이 어렵다는 점과 보안에 취약하다는 문제 등을 들어 시행을 또 다시 연기했다. 방통위가 인터넷전화 번호이동을 미룬 것은 이번이 네 번째다.

방통위가 문제로 지적한 긴급통화 등의 문제는 관련업계의 기술적 보완에 의해 머지않아 해결될 전망이다. 그렇다면 번호이동을 위한 남은 과제는 보안 문제다. 그러나 보안에 대한 방통위의 지적에 대해 업계의 관계자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인터넷전화의 경우 디지털로 변조된 암호를 이용해 통화 할 경우 도청 등에 무방비인 유선전화 방식(PSTN)에 비해 훨씬 안전하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방통위가 지적하는 보안 문제의 속내용은 오히려 인터넷전화의 보안 안전성 때문에 국정원 등 권력기관에서 그동안 이런 저런 이유로 해오던 합법적 감청이 불가능해질 것을 우려해서가 아니냐는 분석을 하고 있다.

최근 이런 분석에 힘을 실어주는 한 기사가 보도됐다. <파이낸셜뉴스>는 “최근 국가정보원은 방송통신위원회에 ‘번호이동을 개시하기 전에 인터넷전화 감청이 가능하도록 기술적인 문제를 보완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며 “감청이 기술적으로 어려워 번호이동으로 인터넷전화 이용자가 확산될 경우 유사시 수사에 애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전했다. 신문은 또 “인터넷전화는 통신비밀보호법에 감청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다는 점도 문제”라며 “PSTN방식의 유선전화와 달리 인터넷전화는 인터넷망을 사용하기 때문에 통신비밀보호법이 개정돼야 감청이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결국 현재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는 인터넷전화 감청을 위해 국정원이 기술적 보완을 방통위에 요구한 셈이어서 파장이 예상되고 있다. 이같은 보도에 대해 방통위는 “국정원으로부터 그러한 요청을 받은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하지만 방통위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감청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은 인터넷전화 번호이동제 도입 보류에 대한 방통위의 설명에 설득력이 없는 데다 국정원의 지난 행보에서 찾을 수 있다. 국정원은 참여정부 시절인 지난해 5월 ‘와이브로’ 기술유출 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기술 유출 범죄에 대한 감청 허용 등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며 “(당시)국회에 계류 중인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을 빨리 처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국정원은 ‘합법적 감청’을 위해 국민 사생활 침해 가능성이 높은 통신비밀보호법의 개정을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개정안 가운데 통신사업자에게 통신자료를 일정기간 의무적으로 보관하게 하는 것은 개인정보 보호에 역행한다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로 인해 폐기됐다.

이 개정안의 폐기로 국정원이 인터넷전화의 감청을 요구할 법적 근거는 없어지게 된 셈이다. 그런데도 국정원이 감청할 수 있도록 기술적 보완을 요구하고 방통위가 이를 받아들인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법적 근거도 없이 수사 편의상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어 불법으로 감청하겠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밝히고, 이를 묵인한 꼴이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로 인해 서비스 확장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면 이 또한 국민을 기만하는 행위일 것이다. 따라서 국정원과 방통위는 이에 대한 명확한 해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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