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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이유[세상의 모든 책들] 바우만, '현대성과 홀로코스트' 리뷰
고덕영 / 인문 딜레당트 | 승인 2013.12.27 22:50
   
 
그야말로 ‘잉여’의 시대다. 서점에는 <잉여사회>와 <속물과 잉여>가 꽂혀있고, 극장에는 <잉투기>와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이 상영 중이다. 블로그의 포스트에는 ‘잉여’라는 단어가 양념처럼 흩뿌려져 있고, 소셜 네트워크에서 ‘잉여’는 표준어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그러나 잉여는 단순한 유희도, 유행도 아니다. 그것은 밀려나는 사람들을 자조적으로 지시하는 단어이며, 그들은 늘 우리 곁에 있었다.
 
제시된 통계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수치를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다. 하우스 푸어로 분류되는 사람이 300만 명이다. 빚을 갚지 못해 개인회생을 신청하는 파산자는 10만이며 신청자는 계속 늘고 있다. 가계 대출은 천조에 이른다. 40세 중반에 회사에서 내팽겨져 자영업을 선택한 사람 중 70%가 폐업신고를 한다. 75세 이상 노인의 49.3%가 빈곤층으로 분류된다. 불안한 현실을 지탱해 줄 사회적 유대감은 OECD 최하위에 속하고, 음주자 비율은 73.3%에서 77.5%로 증가했다. 그리고 매일 42명의 사람들이 고달픔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선택한다. 어디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매년 15,330명씩 인위적으로 죽고 있다. 우리시대는 밀려나는 자들이 추락하는 암울한 풍경화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이한 사실 중 하나는, 이렇게 ‘정상적인 삶에서 밀려나는 이들’의 모습과 목소리를 찾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거리에는 긍정의 미소를 머금고 활기찬 발걸음으로 도로를 활보하고 있는 자기계발의 주체들만 가득하지 밀려난 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건물 뒤에서 폐지를 끌어 모으고 있는 노인들의 뒷모습에서 그들의 존재를 막연히 감지할 뿐이다. 밀려난 이들은 모두 집에서, 컴컴한 PC방에서, 전철역의 벤치 한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는 모양이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곳을 유형지로 선택한 것 같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지그문트 바우만의 <현대성과 홀로코스트>(지그문트 바우만, 정일준 역, <현대성과 홀로코스트>, 새물결, 2013)를 꺼내어 읽어 본 까닭은 밀려나는 사람들의 비가시성이 어떻게 구축되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홀로코스트를 근대성의 본질로 파악하고 그것의 통제 불가능성을 집요하게 확인하는 이 저작에는 홀로코스트를 성립시킨 피해자들의 ‘배제’의 원리, 그리고 배제의 원리에 적응하여 절멸의 길을 걸어갔던 유대인의 ‘자발적 협력’에 대한 고찰이 담겨있다.
 
배제와 분리의 메커니즘
 
홀로코스트의 최초 단계는 유대인과 독일인의 분리였다. 그것은 두 가지 형태로 이루어졌다. 우선 명시적이고 차별적인 규정들과 표적이 된 범주의 독특성의 강조를 통한 심적인 분리가 있었다. 다음으로 공통의 생활 및 관심의 장에서 강제적으로 떼어놓는 물리적 분리가 있었다. 이 중 바우만이 주목하는 것은 심적인 분리의 메커니즘이다. 심적 분리의 첫 양상은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하여 유대인과 독일인의 본질적 차이를 표상,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는 유대인을 재규정하되 현대인의 민감한 위생의식을 자극해 혐오감을 촉발시키는데 목적이 있었다. 반유대주의 선전은 “유대인들에게 증오스런 범죄, 유해한 의도, 그리고 혐오스러운 유전적 결함의 혐의가 씌워졌다. 무엇보다도 위생에 대한 현대 문명의 감수성에 부응에 보통 해충이나 세균에 의해 야기되는 공포와 두려움을 선동했고, 보건과 위생에 대한 현대인의 강박관념에 호소했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가까이 해서는 안 되고, 경계 너머로 추방되어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박멸’되어야 할 세균이었다. 
 
물론 어제까지 함께 농담을 나누었던 옆집 유대인이 해로운 병원체에 불과했다는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구호가 효과적인 각인을 만들지는 못했다. 나치의 예상과는 달리 선전은 그리 효과적이지 못했고, 유대인의 물리적 파괴에 반대하거나 분노하지 못하게 하기에는 불충분했다. 그러나 최소한, “유대인들은 격리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나름의 논거를 가질 수 있었으며, 압력이 행사될 때는 논거를 받아들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제스처를 취할 수 있었다. 이러한 동의는 유대인과 독일인의 간극을 인정하는 것이었으며, 간극이 본성의 차이인 한, 결코 극복될 수 없었다.
 
그 후, 모든 유대인에게 다비드의 별이 강제된다. 이를 통해 별을 단 유대인과 별을 달지 않은 비유대인의 경계가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이 표지는 누가 유대인이고 누가 유대인이 아닌지를 정확히 결정했으며, “궁극적으로는 절멸을 위한 표식을 한 사람들의 범주를 만들어 내”는 동시에, “단번에 훨씬 더 넓은 범주의 안전하고 깨끗한 제3제국의 시민, 순수한 피를 가진 독일인들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분리는 고통의 경험을 단절시켜 자발적으로 관계를 축소시키는 효과를 창출했다. 다비드의 별은 유대인들에 닥칠 재난의 표지였다. 그것은 그들에 받게 될 경멸적 시선, 불시의 검문, 이유 없는 폭력, 그리고 나치당원들의 무차별 테러에 노출되어 있다는 뜻이었으며, 별을 달지 못한 사람들로부터 어떤 도움도, 이해도 받지 못할 이질적 존재가 되리라는 확고한 징표였다. 
 
반면, 별을 달지 않은 이들은 유대인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불안전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자신의 이익은 전혀 위협받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확신시키는 것이었다. 즉 유대인에게는 폭력이 가해질 것이고, 독일인에게는 가해지지 않을 것이었다. 유대인들의 고통은 오직 그들만의 것이고, 유대인의 곤경은 주민 누구에게도 악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테러에 의해 가게가 부서지고 반유대주의 자에게 얻어맞는 동안 옆집의 이웃들은 편안하게 저녁을 먹고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의 경험은 이해될 수도 나눠질 수도 없는 것이었으며 독일인에게 유대인은 이질적이고 낯선 존재로 변해갈 뿐이었다. 결국 유대인의 처지는 누구의 관심사도 될 수 없었으며, 강제이주가 시행될 때쯤에는 모든 사람들의 시야와 마음에서 사라져 있었다. 이언 커쇼가 말한 대로, “아우슈비츠로 가는 길은 증오로 건설되었지만 무관심으로 포장되었다.”
 
다비드의 별을 다는 조치로 이러한 분리가 가능했다는 점이 이상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분리를 경계로 집행되는 폭력이 있었고,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이 공유될 수 없다는 좌절감 속에서, 반대로 폭력에서 안전하게 분리된 자들은 그것이 나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안도감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자발적으로 지워버렸다는 점이다.
 
피해자들은 어떻게 자발적인 협력자가 되었는가
 
분리가 시행된 후 유대인들은 독일인들과 공유하던 공간에서 추방되어 밀려난 자들의 집합소, 게토로 이동하게 된다. 게토에서 피해자들의 목표는 ‘살아남기’로 환원되었다. 이들에게 생존의 보장은 다른 유대인과 ‘차이점’을 만들어 내는 것에 달려있었다. 대부분의 평범한 유대인들은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할 운명이었다. 따라서 자신은 이곳에 모인 ‘평범한 유대인’들과 다르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으며, 구성원의 동질적인 노력은 “자신이 좀 더 나은 범주로 분류될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려는 광란의 노력을 촉진했다.” 그들은 집단 전체에 대한 처우가 일률적이지 않으며, 개개인의 운명은 달라질 수 있고, 각각의 경우 기회가 개개인의 장점에 달려있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철저히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다가올 위험을 회피할 합리적 행위 준칙을 설정할 수 없었다. 실제로 이런 믿음에 대한 응답도 있었다. 혼혈아인데다가 유대인 파괴에 앞장섰던 혼혈 유대인에게 ‘해방’ 증서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도착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예외일 뿐이었지만, 차이점을 증명하여 생존을 확보하려는 사람들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모든 유대인이 차이점을 증명하고 만들어내기 위한 광기에 휩싸이면서, 나치의 유대인 격리와 절멸은 설명될 필요가 없을 만큼 공고한 원리가 되어버렸다. 예컨대, 어떤 유대인이 자신은 독일인 공동체로 돌아가 직업을 얻을 ‘차이점과 자격’이 있다고 주장할 때, 그는 그런 차이점이 없으면 격리와 절멸의 조치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정당한 것이라고 인정하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개인의 생존으로 시야가 축소되면서,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던 사람들에게 행해지던 예외적인 억압과 폭력이 물리적인 현실과 장벽으로 격상되며 거부할 수 없는 원칙이 되어버렸다.
 
유대인들이 게토에서 열정적으로 행했던 것은 “좀 더 유리한 또는 특권을 지닌 역할이나 지위를 서로 다투어 빼앗으려는, 그리고 억압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노력”이었다. 또한 그 노력의 배후에는 “표적 범주의 모든 성원이 살아남을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그리고 ‘정당하게 평가된 객관적 자질’에 따른 차별적 처우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칙에 대한 찬성”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억압자들에게 쓸모 있는 존재라는 것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했다. 그 때문에 자신들의 죽음을 촉진할, 더불어 다른 유대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나치의 정복전쟁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체제의 가장 큰 피해자들이 최악의 대가를 받으면서도 그 누구보다 체제의 열성적인 기여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최종해결책은 가차 없이 작동했다. 소심하고 배짱이 없는 사람들은 굶어죽거나 가장 먼저 아우슈비츠로 가는 기차를 타야 했고, 이번 수송에서 제외된 자들은 환심을 사기 위해 억압자들을 위한 파티를 자비를 들여 열었다. 그러나 자기배반적인 노력과 생존투쟁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미래는 열리지 않았다. 바우만은 인용을 통해 그들의 마지막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전화통에 불이 난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게슈타포 고위관리들 동원하기. 철도역의 수용소에 전화하기. - ”열차가 도착했습니까? 스메를링 씨 계신가요? 저, 우리 ......가 끌려갔습니다. 스코소우스키씨! 도와주세요! 얼마든지! 10만! 얼마든지 원하시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12사람에 50만 드리겠습니다! 열 사람! 한 사람!
 유대인들은 돈을 갖고 있다! 유대인들은 연줄을 이용할 줄 안다! 유대인들은 힘이 없다! ......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그처럼 엄청난 재산을 모았는지 안다. 그리고 이제 어떻게 물을 찾아 여기저기 헤매는지, 그들이 어떻게 수백만 금화를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제공하는지, 역에 모인 수백명의 사람을 수개월 동안 살려둘 수 있는 액수의 돈을 갖고 출발하는지 안다. .....
  숫자판으로 장식한 소들이 우르르 떼지어 지나간다. 마법의 수를 받지 못한 몇몇은 폐허 사이에 속수무책으로 서 있다. .......
 제 3제국의 재산은 불어난다. 
 유대인들은 죽어가고 있다. “
                                -지그문트 바우만, <현대성과 홀로코스트> p248~249
 
우리가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이유
 
<현대성과 홀로코스트>에서 배제와 협력의 메커니즘을 다룬 이 장은 우리시대의 극단적 단면처럼 읽힌다. 나치의 반유대주의는 승자독식 이데올로기로, 분리된 유대인들은 정상적인 삶에 기입되지 못한 밀려나는 사람들로, 구조적 불의를 인정하고 자신의 차이점을 강조하는 유대인들은 무한 경쟁에 노출되어 있는 자기 계발하는 주체들로. 이것은 과도한 동일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며 나치시대에 사는 것도 아니니까. 
 
그러나 과도한 동일시를 걷어내도 이 슬픈 이야기는 우리에게 한 가지 교훈을 남겨준다. 그것은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외면하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합리적으로 조직된 근대사회는 자신의 폭력을 구조적이고 미시적인 형태로 집행하는 경향이 있으며 사회적 약자에게 가장 먼저 고통을 안겨준다. 그리고 고통이 일반화될수록 구성원들의 시야는 사적인 전망으로 축소되며, 폭력과 억압의 메커니즘이 상식과 원리가 되어버리는 역설적인 결과를 맞게 된다. 
 
게토에 집결된 유대인들은 자신이 ‘보통의 유대인’들과 다르다는 점을 필사적으로 증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억압을 인지하고, 거부하며, ‘보통의 유대인’과 연대하여 저항하는 것이었다. 우리시대에도 이런 것이 필요할까? 이 질문에 섣불리 답하지 말자. 우리시대의 믿음과는 다르게 우리의 삶은 영리하게 선택할 수도, 경쾌하게 탈주할 수도 없는 기계적인 조건과 제약에 의해 결정된다. 그것을 직시하는 것, 그리고 이제는 낯설게 되어버린 ‘약자의 고통’과 ‘연대’라는 단어를 되새겨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다가오는 2014년에는 ‘희망’을 이야기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올해의 마지막 책을 덮으며 덧붙이는 바람이다. 
 

고덕영

2006년에 결혼했다. 결혼 직후 용돈이 궁한 탓에 한 번 사면 오래 읽을 수 있는 난해하고 어려운 책을 뒤적거리기 시작한 게 화근이었다. 그런 책들을 오독하다 보니 '인문 딜레당트'로 '전락'하여 이런 저런 책을 뒤적뒤적하며 나락에 빠진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의구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주로 인문 쪽 책들을 건너다닌다. 한 아이의 아빠이자 철딱서니 없는 남편이다. 

 

고덕영 / 인문 딜레당트  mediaus@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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