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바웃 타임>을 아들과 함께 봤다. 달달한 로맨스를 기대했던 아들에게,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인생의 의미를 되묻는 영화가 어떻게 다가갔는지 궁금했다. 예상 외로 아들은 참 좋았단다. 그리고 덧붙인다. 영화 속 아버지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고. 우리 사회의 어른들 모습과 너무 달랐다고.

영화 속 아버지는 자신의 암에 대해 담담하게 맞이한다. 암에 걸리지 않은 시절로 돌아가라는 아들의 권유에, 내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멋있어서 니 엄마가 나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만약 지금의 암을 없애려면 수십 년을 함께해온 아내와 사랑하는 자식들이 없어져야 한다고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우리가 늘 갈구하는 진정 '쿨한' 태도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대한 애정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다. 아들과 탁구를 치면서 오만 입방정을 다떨 정도로 친근하지만, 정작 인생의 고비에서 아버지는 의연하고 담대하다. 아들의 삶에 조언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어른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모습과는 무척이나 달랐던 것이 인상적이다.

<따뜻한 말 한 마디> 6회의 엔딩은 유재학의 어머니인 추여사(박정수 분)의 한바탕 굿판이었다. 송미경의 의붓동생 송민수의 울분에 찬 말처럼 새벽같이 일어나 밤늦게까지 하루 24시간을 48시간으로 살아온 며느리가, 자신에게 입 속의 혀처럼 뭐가 먹고 싶다 말하기도 전에 알아서 대령하는 며느리가 바람난 아들에게 술 한 잔하고 분노를 내뱉는 그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호령한다. 본데없는 며느리의 집안을 들먹이는 데서 시작해 그간 이룬 것이 뭐있냐는 식의 시어머니들의 전통적 레파토리이다.

이 장면을 드라마의 엔딩으로 설정한 것은 시어머니의 그 폭언이 진부한 클리셰임에도, 고부 관계가 설정되어 있는 드라마에서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덕분이었는지 <총리와 나>에 밀려 3위로 떨어졌던 <따뜻한 말 한 마디>의 시청률은 다시 2위 자리를 회복했다.

<따뜻한 말 한 마디>의 시어머니 추여사는 돌출적인 캐릭터이다. 그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심리에 근거한 행동을 하는 예측가능한 즉 이해가능한 인물들이라면, 그녀만이 잘난 자기 아들과 그보다 더 잘난 자기 집안에 대한 자부심으로 일관되게 며느리를 '학대'하는 비이성적이고 탈논리적인 막가파이다. 바람피운 남자와 여자도 그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도록 그려지고, 바람난 남편 때문에 흥신소를 부르고 상대방의 여자를 스토킹하는 아내의 모습이 절절하게 공감되게 그려내는 <따뜻한 말 한 마디>에서 아들의 잘못을 포악으로 해결하려는 유일하게 막돼먹은 사람이다.

추여사와 비슷한 사람이 또 있다. <세 번 결혼한 여자>의 정태원의 엄마 최여사(김용림 분)이다. 재혼을 미루는 아들의 결혼을 밀어붙이기 위해 이미 재가한 전 며느리의 시댁에 전화를 걸어 당신의 며느리가 우리 아들을 만나고 다닌다며 무고를 하는 식이다. 그녀의 친정에 쳐들어가 한바탕 하는 건 예사다. 새초롬한 시누이조차 자신의 어머니에게는 두 손 두 발 다 들 정도로, 자신의 아들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에는 상식도 예의도 밥 말아 먹는다.

재밌다. 이름도 추여사, 최여사다. 그들의 이름은 없다. 그들 또한 한때는 누군가의 아내이자 며느리였을 터이지만, 이제 그런 흔적은 지워버리고 한 집안의 상징적 어른이자 아들의 어머니로서만 자리매김한다. 그들은 이를 수호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맹목적인 모습을 보인다. 어머니란 이름의 그녀 앞에 아들은 십중팔구 무기력하고, 며느리는 고양이 앞에 쥐 신세다.

더 재미있는 건 이름도 없이 어머니란 존재만으로 굳어진 이들 캐릭터가, 드라마에서는 결정적 용병처럼 작용한다는 것이다. <따뜻한 말 한 마디>는 부부의 불륜을 다루되 그것을 <사랑과 전쟁> 수준으로 풀어내는 대신, 그들의 사연과 심리에 천착하여 시청자들이 함께 고민해 볼 여지를 주는 드라마이다. <세 번 결혼한 여자> 역시 마찬가지다. 김수현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은 시청률을 보이고 있다는 평가를 받지만, 요즘 드라마에 보기 드물게 여자의 이혼과 재혼에 대해 진지한 자세를 가지고 있는 드라마이다.

그러기에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 공감하고 풀어가는 방식에 동조하는 시청자라면 깊이 빠져들며 함께 고민을 나누어 가지만, 그 코드에 맞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냥 나쁜 년하면 그 뿐이다. 그런데 이런 시청자들의 관심이 나른해질 때 이 여사님들이 등장한다. 등장과 함께 짜~하게 말도 되지 않는 행동을 보이며 시청자들의 욕을 들어주신다. 하지만 그러면서 드라마에는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필요악이 되어 버린 것이다.

두 드라마뿐이 아니다. 인기를 끈다 싶은 드라마에는 이들 여사님 같은 캐릭터가 꼭 있다. 인기리에 종영된 <황금 무지개>에서 며느리를 쫓아다니며 포악을 떨던 강정심 여사(박원숙 분)가 그분이며, 요즘 가장 인기가 좋다는 <왕가네 식구들>의 박살라 여사(이보희 분) 또한 만만치 않다. 어디 그뿐인가. <오로라 공주>에서는 시어머니는 아니지만 시누이 삼종세트가 시어머니 캐릭터를 톡톡히 해냈다.

용병 역할이자 필요악으로 자리매김하는 어머니들의 모습은 분명 현실의 어머니들과는 차이가 분명한, 이기심이 극대화된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이들 어머니들의 모습은, 그저 작가의 편의주의라기엔 존경할 어른이 없는 우리 사회의 '어른'을 상징화시켰다는 생각이 든다.

12월 14일자 [한겨레신문]에서 오길영 교수는 '지금 한국 정치는 청년 세대는 과소 대표된다. 반면 기성세대는 과잉 대표된다. 그들 마음대로 정치, 경제, 정책을 좌지우지한다. 젊은이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기성세대의 시각에 따라 자의적으로 해석된다'고 안타까워한다. 바로 그 과잉되고 자의적인 기성세대의 반영이, 드라마 속 시어머니들의 캐릭터가 아닌가 싶다. 소통할 수 없는 논리로 오로지 자신의 것만을 지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기성세대. 그것이 바로 드라마 속 우리 사회 어른들의 모습이다. 그래서 더 그 시어머니들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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