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길바닥에 주저앉은 250여 언론 노동자들의 등은 굽어 보였다. 허리를 곧추 세워 맞기에 여의도의 바람이 너무 찼기 때문일까. 12월을 이틀 남긴 여의도의 거리는 매년 그러하듯 다른 거리보다 더 추웠다. 하지만 아직 추위가 다 여문 것이 아니라는 걸, 겨울의 초입에서 추위를 말하기엔 아직 겨울이 너무 많이 남아있단 걸, 거긴 모인 사람 모두가 알고 있는 듯 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위원장 강성남)이 29일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총파업·총력투쟁 결의대회’를 열었다. 국회 정문에서 100m 떨어진 그 길바닥은 매년 겨울, 절박함을 가진 이들의 마지노선이다. 벌써 화물 노동자들이 농성을 시작했고, 곧 다른 노동자들도 최후의 순간을 위해 그 거리에 자리를 잡을 것이다. 그렇게 다가 올, 진짜 추울 날을 기다리며 누군가는 “정기 국회를 6월로 옮겨야 한다”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던졌고, 또 다른 어떤 이는 “올 해는 안 오는가 했다”고 화답했다. 12월, 겨울, 여의도는 다시 ‘투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 전국언론노동조합(위원장 강성남)은 29일 국회 앞에서‘총파업·총력투쟁 결의대회’를 열었다. (사진=언론노조)

이명박 정부 이후 어떤 언론인들에게 ‘투쟁’은 일상이었다. 벌써 6년여 전, 종이비행기를 날리던 YTN의 조합원들로부터 시작된 ‘공정언론 사수 투쟁’은 MBC 조합원들의 사상 최장 기간 파업을 거치며 KBS에 새로운 노조를 만들어냈고, 지역 방송에서 또 국민일보, 한국일보, 부산일보에서 계속 그렇게 꺼질듯 꺼지지 않고 이어져왔다.

그 투쟁의 굽이마다 그나마 조금씩 상황이 나아졌다면, 그래서 역사의 수레바퀴가 그래도 미세하게나마 구르고 있다는 것이 확인이라도 됐다면, 그랬다면 좋았겠지만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6년 전 그 날처럼, 여전히 언론 노동자들은 ‘언론장악 저지’, ‘공정방송 사수 투쟁’을 외치고 있지만 이제 형편은 “사수할 공정방송이 남아 있긴 하느냐”는 냉소가 더 와 닿을 정도로 나빠졌다. 그 굽이마다 해고당한 노동자들은 아직도 적을 찾지 못한 채 잊히는 존재가 되고 있다.

지난 세월의 까마득함은 불법과 위법의 경계에서 탄생한, 그래서 언론 노동자들에게 가장 뜨거운 겨울을 선사했던 종합편성채널 가운데 벌써 시민들의 환호를 획득한 곳이 생겼다는데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삼성 방송’의 굴레를 영원히 벗지 못할 것 같던 JTBC는 이제 사뭇 진지한 얼굴로 지상파의 불공정을 걱정할 정도로 자랐다.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은 조중동은 이제 자사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언론의 기본적 윤리와 체면 따위는 완전히 져버릴 수 있을 정도로 그 패악이 늘었지만, 희한하게도 그게 곧 공론의 대세가 되는 상황은 더욱 강렬해지고 있다. 장악은 언론 지형의 구조로 굳어졌고, 이에 대한 문제의식은 투쟁의 피로감과 희미해지는 진짜 언론의 존재감 속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있다. ‘권언유착’의 상황은 그렇게 ‘권언동일’로 번져가고 있다.

▲ 전국언론노동조합(위원장 강성남)이 ‘총파업·총력투쟁 결의대회’를 열고, 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언론노조)

‘공정’과 ‘정의’같은 언론의 가치가 철저히 조롱당하던 동안 함께 여의도의 길바닥을 지켜 줄 언론 노동자들의 수는 그만큼 줄어든 것처럼도 보였다. 한 집회 참가자는 “그래도 많이 모였다”고 말했지만, 아직 오지 않은 진짜 겨울 ‘총파업’과 ‘총력투쟁’을 결의하며 어깨를 걸기에 그 굽은 등들은 너무 위태롭고 성겨 보였다.

언론노조의 ‘총파업·총력투쟁 결의대회’가 있기 하루 전, 국회는 ‘방송공정성 특별위원회’의 활동을 마감했다. 한 차례 연장되는 소동 끝에, 그 특별위원회는 아무 것도 결정하지 않았고 그 어떤 특별한 합의도 이루지 못했다. 일각에선 새누리당의 극악무도함을 탓하고, 또 어떤 이는 민주당의 무능을 나무랐다. 하지만 글쎄. 처음부터 그건 성립되지 않던 승부였다. 어차피 간판을 내리면 그 뿐인 그 시한부 위원회에서 공영방송의 지배구조 개선이 여야 합의로 이뤄지고, 해직 언론인의 복직이 민주당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일 순 없었다. 물론, 그때 그 약속을 하며 자신들을 믿어달라고 했던 어떤 정치인들은 마땅히 그 자리에 와서 ‘참회’를 해야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제도 새누리당에 완벽하게 뒷통수를 맞은 민주당은 이 작은 집회까지 챙길 여력이 없었던지 그 흔한 정치인이라곤 교문위 소속 배재정 의원이 유일했다.

1시간 여의 집회를 끝낸 언론노조 조합원들은 민주당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민주당을 거쳐 새누리당으로 갈 거라고 했다. 이들의 대오가 무사히 12월을 건널 수 있을까, 무사히 건넌다는 건 또 어떤 의미일까. 언론노조 조합원들이 대오를 정리하는 동안 길 건너편의 전경들이 부산히 움직였다. 그들은 이미 완벽하게 겨울을 준비한 모습이었다. 그것도 민주화의 진전이라도 해야 할까, 그 전경들의 과잉된 무장과 움직임에 시민들은 그저 무심했다.

“언론노조를 탈퇴하지 않으면 단체협약을 하지 않겠다”는 탈법적인 겁박이 공영방송 내부에서 횡행하는 세상에서 부디 이 총력투쟁이 무사하길, 그렇게 살아 겨울을 넘겨내길 기원한다. '종속'이 언론의 오늘을 장악하고 '불의'를 뭉개고 앉아 그저 편히 하루를 살아가는 언론인이 늘어가고, 그래서 언론이 기록하는 ‘오늘’이 언젠가 반드시 다시 쓰여야 할 부조리가 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나마 12월, 겨울, 여의도에서 ‘투쟁’을 외쳤던 이들이 살아남아야 지금 우리의 일을 다시 말할 것이 아닌가.

▲ 전국언론노동조합(위원장 강성남)이 ‘총파업·총력투쟁 결의대회’이후 행진을 했다. 행진이 멈춘 자리는 민주당 당사 앞이다. (사진=언론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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