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블로그에 남겨진 방문객의 한마디에 무릎을 탁하고 쳤다. 이미라 작가의 순정만화 '늘 푸른 이야기' 닮지 않은 이란성 쌍둥이 이슬비와 푸르매. 여느 평범한 남매들처럼 머리를 쥐어뜯고 싸우는 것이 일상인 그들에게 로맨스라는 것을 기대할 리는 만무했다. 이런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든 것이 슈퍼스타 서지원. 이슬비와 푸르매의 남매 관계라 성립될 수 없는 로맨스와 달리 서지원이 이슬비에게 감정을 느낀 계기는 그녀가 죽은 여동생을 닮아서였다.
하지만 이슬비가 사랑을 느낀 상대는 제3의 남자였다. 폭풍 같은 고교 시절의 서막, 사건과 사고의 소용돌이 위에서 잦은 위험에 휘말리는 그녀를 수호기사처럼 나타나 구해주던 가린 얼굴 속 의문의 남자. 그를 흑나비라 부르며 동경하던 소녀는 때마침 나타난 슈퍼스타 서지원의 존재를 흑나비라 믿으며 그의 구애를 받아들인다.
무수한 사건의 나날들 속에서 풀려나온 진실은 친남매라고 믿고 있었던 푸르매와의 관계가 실은 타인이었으며, 오히려 목하 열애 중의 서지원이 그녀의 친오빠였던 것. 그리고 지친 이슬비를 치유하는 또 하나의 숨겨진 이야기. 그녀를 지켜왔던 수호기사 흑나비의 정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남동생, 푸르매였다. "나도 참 바보였지. 너 말고 달리 누가 있겠어."라고 웃으면서 울먹이던 이슬비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부잣집 외동딸이라는 호사스러운 수식어와 다른 그녀의 깊은 결핍에 연민을 느낀 백재희(이정재 분)는 한 패거리를 배신한 죗값으로 목숨을 걸면서까지 그녀를 구출해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의 생이 다할 때까지 재희는 혜린의 말 없는 기사였다. 그야말로 그래, 인형의 기사처럼. 질풍노도 같은 태수와 우석의 사이에서 방황하던 혜린을 보며 어린 나는 생각했다. 이 드라마에서 정말 가여운 인물은 선택받고도 그녀를 가질 수 없었던 태수나 선택을 받을 수조차 없었던 우석이 아니라 선택지에 자신을 넣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백재희라고. 그는 감히 자신이 혜린을 사랑하거나 갈구하거나 가질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내가 나정이를 좋아하면 안 되는 줄 알았다.“
그것은 결국 쓰레기의 첫 내레이션으로 드러났던, 이 드라마가 지향하는 사랑의 철학이다. "그 어떤 말주변보다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눈빛. 그것 하나면 충분하다." 하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이라니. 그것은 결국 타인의 눈엔 인정받지 못하는 사랑이라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백재희의 말 없는 사랑을 동경하는 나정이를 보며 빙그레는 눈살을 찌푸렸고 그녀의 아빠는 코웃음을 쳤다. "그래 봤자 짝사랑이잖어." "긍께로. 천하에 젤로 불쌍한 놈이 이정재여." 울분을 터뜨리는 성동일에게 이정재가 좋다던 엄마마저 동의했다. 그의 사랑은 부정하다고.
백재희가 불쌍한 것은 혜린을 가질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런 상상조차 거부되는 인물이라서였다. 나정의 부모에게 쓰레기는 그런 사람이다. 딸의 선택지에 넣는다는 것조차 금기시되는 사람. 단순히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옳은가 틀린가의 문제다. 해태의 입방정으로 드러난 딸의 러브스토리에 나정의 부모는 신촌 하숙집 안의 모든 남자들을 엮어본다. 오로지 단 한 사람, 쓰레기만 빼고선. 그는 자리에서 물러나 부러움이 담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귀염받는 칠봉과 빙그레, 연인이 되어있는 삼천포와 정대만. 너무나 쉽게 선택지가 될 수 있는 그들을.
이날 칠봉은 쓰레기를 다그치며 아주 이색적인 표현을 했다. 비슷한 상황에서 분노한 남자가 연적을 불러다 놓고 묻는 질문은 기껏해야 그 아이를 사랑하고 있으니 건드리지 말 것을 엄포 놓는 일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날 칠봉이 쓰레기에게 물은 것은 달랐다. "근데 솔직히 선배 맘이 젤 궁금해요. 정말 나정이 혼자 좋아하는 건지. 선밴 아무 감정 없는 건지. 그게 제일 궁금해요. 제가 보기엔 아닌 거 같아서요."
나정이 지금 짝사랑하고 있는 거 아니죠? 이 질문은 두 가지 의미로 읽히는데 하나는 나정의 마음이 일방통행은 아니라는 것과 또 하나는 짝사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칠봉과 나정 하나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짝사랑을 하고 있는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짝사랑을 끝내는 단 한 가지 방법은 사랑을 고백하는 것뿐이다. "맞다. 나정이 혼자 짝사랑하는 거 아이다. 나도 나정이 좋아한다."
긴장감 넘치던 두 남자의 선전포고 가운데서 느닷없이 끼어든 성동일의 등장은 그래서 의미가 컸다. 그답지 않게 시원시원하게 쏟아대던 고백이 순간 성동일의 시선과 마주하자 허물어졌으니까. "나정이 가슴 아픈 게 나한테도 가슴 아픈 일이면은 그게 좋아하는 거 맞지." 그 말을 하며 공으로 가슴을 두드리던 쓰레기에게 손에 쥐어진 볼은 나정을 향한 자신의 마음과도 같았을 것이다.
가끔 오로지 눈빛에만 의존해야 했던 쓰레기의 마음을 제작진의 해설집으로 풀어내 주길 바랐다. 그의 지난 일들에 개연성을 심어주는 파노라마 같은 것들이 쏟아져 나오기를. 하지만 내가 지금 바라는 것은 지난 시간의 확인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확신이다. 집 잘 지키는 충견에 불과했던 그가 제 것을 빼앗긴 순간 드러낼 맹수의 공격성을.
미도리에게 다가갈수록 죄책감을 느끼는 와타나베의 사랑 이야기. 상실의 시대를 되새겨보는 여자. 집밥의 온기처럼 묵직한 책임감을 무겁게 되새기곤 떠난 남자. 집념과 끈기의 다슬이를 염원하는 쓰레기. 백재희의 눈빛으로 지켜주는 사랑을 갈구하는 성나정. 서로가 서로의 이상형이자 염원임을 그들은 아직도 모르고 있다. 이 드라마의 최종 결론은 김재준 찾기가 아니라 쓰레기가 과연 김재준이 되고 싶은가 아닌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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