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순정만화의 교본, 이미라 작가의 '인어공주를 위하여'를 보면 잘 만든 순정만화가 모두 그러하듯 소녀를 설레게 하는 여러 가지 타입의 남자들이 등장합니다. 당연하게도 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보통의 여주인공 이슬비를 문득 부럽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녀가 안소니와 테리우스의 양면을 가진 남자 푸르매 혹은 서지원의 종착지였기 때문은 아닙니다. 이성으로 무장한 조종인이 사랑 때문에 우스워지는 꼴이 설레긴 했지만, 딱히 부러움을 느끼지는 않았지요. 여주인공이니까 이런 사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만화가 엔딩을 향해 달려갈 때 즈음 이란성 쌍둥이 조휘인의 회상은 저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처음부터 좋았던 소녀라고. "무르익다"도 아니고 순간의 자각도 아닌, 처음부터 그녀를 사랑했다니. 믿을 수 없었지요. 그는 형과 서지원이 그토록 뜨거운 호적수로 서로를 겨누고 있을 때조차 평온을 지켰던, 그저 여주인공의 친절한 선배님일 뿐이었으니까요. 그 자신은 물론 작가조차 설명해주지 않았던 그의 사랑이 천성이라 생각했던 무수한 친절 속에 묻어있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짠해지더군요. 바보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는 단 한번도 나를 사랑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을까.

최근 응답하라 1994의 쓰레기의 태도를 보면 같은 의문을 같게 됩니다. 특히 10회는 그야말로 욕구불만의 절정이었지요. "영화가 눈에 들어오냐고, 영화가. 쓰레기는 웃겨죽더라. 내는 오빠가 태어나서 그렇게 크게 웃는 거 처음 봤다." 팝콘을 삼킬 수조차 없을 만큼 긴장했던 나정은 한탄합니다. 그의 마음이 나와 같지 않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 사살당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나를 여자로 보지 않는 것일까. 동성 친구가 옆자리에 있어도 그보다 편할 순 없을 거라고.

근성녀 성나정은 툴툴 털고 일어나 영화를 같이 봤다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다 그 이상을 바라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시청자는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이미 나정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있었고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었으니까요. 차라리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작진은 잊을만하면 성나정의 마음이 일방통행만은 아니라는 희망을 남겨주고 사라집니다. 그것이 너무나도 어슴푸레해서 답답하고 갈증이 납니다. 이런 상태에서 오리무중한 쓰레기의 선택은 화를 부채질하는 짓이나 다름없었죠.

제작진은 종종 캠퍼스의 심리테스트처럼 같은 상황에서 A와 B가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보여주곤 합니다. 이날의 퀘스천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어디까지 가봤니?’를 질문하는 듯했죠. 초대를 받아 삼천포로 떠난 나정을 두고 칠봉과 쓰레기, 이 호적수는 비슷한 사유로 서울에 발이 묶여있었습니다. 그리고 계시처럼 스케줄이 비어버렸을 때 두 남자는 쾌재를 부르며 어딘가를 향하죠.

사랑하고 있다면 그녀에게 달려가고 있겠지라는 예상을 실망하게 하지 않은 것은 칠봉의 선택 하나뿐이었습니다. 미련 없이 삼천포행의 티켓을 끊은 칠봉과 가지 않은 쓰레기. 제작진은 이 장면을 가혹하다 싶게 극과 극으로 나누어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자, 지금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차라리 상념에 잠겨 의학 서적이라도 독파하는 모습을 보여줬더라면 좀 나았을까요. 그녀가 있는 곳을 버리고 선택한 곳이 고작 당구장이라니. 이쯤 되면 생각을 환기하는 것을 넘어 뒤집어버리게 됩니다. 쓰레기에게 성나정이란 그저 귀여운 여동생일 뿐인가.

하지만 저는 이미 나정과 봤던 마누라 죽이기를 재탕해야 하는 곤혹스러운 순간에 그가 취한 태도를 보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그가 삼천포 티켓을 끊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고. 그가 만약 나정에게 달려갔다면 나는 오히려 실망했을지도 모르겠다고-말이죠. 그건 둔하고 에둘러 표현할 수밖에 없어 비효율적인 쓰레기의 사랑이 아니니까요.

"아, 죽겠다." "뭔 일 있어?" "그러게. 와 이렇게 늦었노." 당구장에 도착해서 던진 첫마디의 대사들에 희망을 실어 그가 삼천포로 뛰어가다 발걸음을 돌렸을 가능성 또한 분명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다 돌아왔어도 바보고 안 갔어도 바보죠. 경상도 사투리로 반피나 다름없는 그는 무엇을 택했든 바보 같은 선택을 했을 겁니다. 분명 멋있진 않습니다. 하지만 어떡하겠습니까. 이게 바로 이 남자가 누군가를 소중히 여기는 방법인 것을요.

쓰레기는 그런 사람, 그리고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입니다. 칠봉이였더라면 두 말하지 않고 뛰어 나가 그녀의 손에 과자를 쥐여줬겠죠. 하지만 쓰레기는 "니 과자 좀 그만 무라. 가시나야. 그러니깐 허리가 아프지."라고 휙 가버리곤 봉지 가득 과자를 담아와 바닥에 흐트러뜨려 놓는 멋없는 사람입니다. 선택의 순간에 칠봉은 두 말할 나위 없이 나정을 향하는 용기가 있지만 쓰레기는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가 억누르고 억누른 마음을 터뜨리는 유일한 순간은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울먹이는 나정의 얼굴 때문이었죠.

저는 캐릭터를 죽이지 않는 방법은 멋을 내는 것이 아니라 일관성을 유지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이 드라마의 제작진은 캐릭터의 일관성을 지키는 데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더군요. 특히 쓰레기의 캐릭터에 관해서는 강박적이다 싶을 만큼 이변을 추구하지 않았죠. 흰 우유를 마시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사소한 디테일까지 공을 들이며 캐릭터의 일관성을 지켜주고 있지요. 그리고 쓰레기는 그 일관성만큼 감정의 진화를 거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정이 오빠의 기일에 유년 시절의 인형을 선물했던 그는 일종의 암묵적인 서약을 했던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늘 그랬던 것처럼 인형의 기사 이상을 바라보지 않겠다는. 나정은 인형을 받아들었지만, 그의 금기를 깨뜨리고 자신을 여자로 인식하게 합니다. 선택의 권한을 부여해준 것이죠. 그 순수한 열정이 조금씩 조금씩 그가 쌓아놓은 굳건한 벽을 마모시키는 중이고 그래서 그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더 이상 여자로 다가서는 나정을 외면하거나 농담으로 만들어버리지 않습니다. 볼일을 보는 오빠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의 바지를 벗겨대던 아이가 이제는 작은 손길에도 예민해져 토라집니다. 결코 둘 사이에 사과가 필요하지 않은 일들이 사과가 필요한 일이 되어버렸고 그는 사과하고 받아들이며 여자가 된 이 아이를 존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빠가 씻겨줄까?" 마치 테스트하듯 한쪽 볼을 부풀려 웃으며 농담을 던져봤다가 곧 허무해져 수습해버립니다. "농담이다. 이 가시나야." "안 본다. 이 가시나야. 그만 가리라. 옷 다 늘어난다."

나정의 고백을 이제서야 정식으로 받아들인 쓰레기입니다. 진심이 드러날 때마다 버릇처럼 그녀의 볼을 꼬집으며 진화하던 그만의 의식을 이번의 고백에선 하지 않았었죠. "정아..." 나지막하게 불렀다가 순간 자신에게 얼굴을 파묻은 나정에게 허리를 감긴 채로 그는, 얼어붙고 맙니다. 이전의 무수한 스킨십들과는 다른 그 기묘한 감정에 잠시 취해 있다가 웃음기 머금은 얼굴로 나정을 안아줍니다. 그리고 곧 슬퍼지죠.

"아이, 어제 나정이랑 마누라 죽이기 보지 않으셨어요?" 빙그레의 질문에 그는 얼어붙습니다. 이 영화의 제목이 바로 이전에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봤던 '마누라 죽이기'라는 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할 만큼 이상 상태인 자신을 자책하며. 마치 스스로에게 해답을 찾듯 상념에 잠겨있던 그는 말합니다. "아니, 개얀타. 내 내용 한 개도 기억 안 난다. 어제 보긴 봤는데…. 내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다.“

삼천포행 대신 선택한 당구장이건만 빙그레의 전화를 받고 한달음에 달려 나가는 쓰레기를 보면 빙그레보다 소중하지 않은 나정이인가 라는 생각이 들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선택을 받은 빙그레보다 외면을 당한 나정이 더 부러운 것은 왜일까요. 겨우 세 시간이라도 나정일 보기 위해 삼천포로 달려 나온 칠봉의 선택은 정말이지 멋있기 그지없습니다. 그게 바로 칠봉의 사랑이니까요.

칠봉과 나정은 비슷한 결핍과 같은 방향의 애정을 갈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을 표현하는 데 거침이 없는 둘은 스무 살이고. 같은 애정을 갈구하기에 망설임이 없습니다. 사랑 같은 가족애와 가족애 같은 사랑이죠. 결핍을 채워주는 일에만 급급했던 쓰레기는 그녀를 갈구하고 욕심을 내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인식하는 것조차 죄라고 생각하겠죠. 그래서 그의 반피처럼 멋없는 사랑을 응원할 수밖에 없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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