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컴퓨터 옆에 놓여 있는 책의 제목을 보고 남편이 물었다.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니 교사가 왜 두려워?”
“…교사가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어서.”
“그럼 교사는 학교에 가서 뭘 해?”
“주어진 시수의 수업을 하고, 시험문제를 내고, 성적을 매기고, 담임을 하고, 교육청에서 내려온 공문을 처리하고, 학교 행정을 보겠지.”
“정해진 일만 하는 건가?”
“저거 말고 하고 싶은 교육적 활동은 고민도 제대로 할 수가 없다고 하네.”
학생과 학부모가 단일한 형태가 아니듯 교사도 다양한 인간군상이 있다. 그 교사들이 모두 학교가 두려운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책에서 서술하는 절망적인 상황은 ‘교육적인 활동을 추구하는 교사’가 주체일 때 일어나는 일들이다. 그 교육적 활동이 아주 대단한 것이 아닐지라도, 교사가 그런 소망을 가지면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그리하여 어떻게 말을 점점 잃고 마침내 소통할 상대를 찾지 못해 침묵하는지를 보여준다. 주어진 시수의 수업을 하고, 시험문제를 내고, 성적을 매기고, 담임을 하고, 공문을 처리하고, 학교 행정을 보는 것으로 뿌듯하게 자신의 하루를 마감할 수 있다면 교사는 학교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로 학교가 두렵지 않은 교사도 분명 있을 것이다. 고민하지 않는데 무엇이 두렵겠는가. 늘 그렇듯 두려움은 조금이라도 고민을 시작한 사람이 감당하는 법이다. 교사는 ‘명문대에 진학하도록 지도하라’는, 다수를 상대로 실현 불가능한 미션을 강요받으면서, 그 미션에 의문을 가지는 즉시 ‘고민하는 사람’의 처지에 빠진다. 어차피 이룰 수 없는 그 미션 때문에, 교사답지 못한 역할에 내몰리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교사가 학교에서 말을 잃어가는 모습이 참으로 씁쓸하게 그려져 있다. 그들이 가장 많은 말을 건넬 대상은 학생들이다. 하지만 나름의 입시전략을 지닌 학생들은 불필요하다 여기는 학교 수업을 듣지 않는다. 입시와 동떨어진 교육적 시도는 이들에겐 입시공부를 방해하는 비효율적인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 공부에 뜻이 없는 학생들은 교사가 무얼 하든 무기력하고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회사가 ‘도산’ 했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고 ‘승려’니까 여자라고 생각할 정도로 어휘가 결핍돼, 수업을 들으려 해도 알아듣지 못한다. 수업을 못 따라오는 학생들에게 바로 ‘가르치는 이’가 필요하지만, 모범생이었던 교사는 이런 학생들에게 접근할 방법을 찾기 어려워한다.
학생들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가보려 해도, 긴 세월 교사들로부터 훈계와 질책을 당해온 학생들은 교사의 접근을 적대시하거나 피한다. ‘왜 저만 가지고 그러는데요’ 와 ‘제가 안 그랬는데요’ 라는 말은 읽기만 해도 속이 갑갑해져온다. 비난에 지치고 분노한 학생과 교육하고 싶은 교사는 그렇게 겉돈다.
학생이 마음을 열어도 해피엔딩이 아니다. 혹 내밀한 학생의 고민을 듣는다 하더라도, 딱히 지도를 할 수 없다. 상담 전문가가 아닌 교사로서 대처하기가 버거워 무력감을 느끼는 것이다. 이런 노력도 퇴근 후 개인시간을 희생해야 할 수 있는 일들이다. 결국 학생들과의 소통을 마음에 둔 교사라면 ‘수업하고 공문 처리하고 칼퇴’ 하는 삶에서 뿌듯함을 느끼기가 어렵다.
그러나 희생한다고 무엇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4년 뒤 발령받아 옮겨간 곳의 학생들이 전반적으로 사정이 괜찮다면, 이전 학교에서의 고뇌는 기억의 저편에서 잊힌다. 한 교사가 깊이 치렀던 고뇌의 경험은 그렇게 단절되고 사라진다.
충격적인 것은 교사가 교무실에서 말을 잃어가는 모습이다. 전교조 결성 이후 교무실엔 잠시나마 ‘교무회의에서 문제제기를 하고 격렬하게 토론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한다. (165쪽) 지금은 문제제기를 하는 교사가 이질적이고 입장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다. 동료 교사들이 지지하지 않는 것이다. 관리자는 인간적으로 회유해 들어오고, 같이 생각해주길 바란 동료는 너무 쉽게 관리자의 정책을 따른다. 교사들은 메신저로 업무 관련사항을 전달받는데, 업무만으로도 힘이 드니 다른 의제들을 구태여 전달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아무도 공감해주지 않고 피곤하다 여길 뿐이라면, 혼자 일어서서 문제제기를 하기가 무겁다. 그렇게 교무실은 다시 토론을 잃었다.
교사는 가르치는 일에 보람을 느끼면 그것으로 심신이 회복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마저 교사는 제도와 동료에 의해 좌절당한다. 졸속 시행된 제도가 그것을 원래의 취지대로 구현하기 힘든 현실과 맞물리면서, 동료 교사들이 ‘대충’ 면피만 하려고 드는 것이다. 그 앞에서 홀로 ‘제대로’ ‘무리하게’ 진행해봐야 동의를 구하지 못한다. 하물며 각 교사가 교수법에 대해 연구할 때 생겨나는 ‘가르치는 방식의 개성’은 다른 교사와 시험문제를 합의할 때가 되면 귀찮은 변수 취급을 받는다. 시험에 실릴 수도 없고, 그렇기에 수업 중에서도 중요성이 줄어든다. 자신이 연구·개발한 교수법은 배제되고, 동료교사와 합의될 만한 방식으로 적당히 가르쳐 시험 치는 식으로는 보람을 느낄 리 없다.
여기에 더하여 신규 교사들은 모범생을 넘어선, 치열한 경쟁 세대의 승자들이다. 이들은 경쟁 논리를 수긍하고, 관리자의 지시에 따라 깔끔하게 일을 처리하며, 교실에서 고민 없이 우등생들에게 맞춰 수업할 수 있다. 선배 교사가 교육에 대한 의견을 나누자는 취지로 다가가 다른 의견을 내면, 후배 교사는 자기방어가 작동해 감정적으로 반발하며 자신의 선택이 옳다 변론한다. 지금 처한 제한된 교사의 역할에 대해 고민을 나누려 해도 신규 교사에겐 이것이 제한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공감대를 이루지 못한다. 교육에 대한 서로 다른 의견을 주고받는 것을 불편해하는 분위기 속에서, 토론을 하려는 공적 시도는 ‘각자의 방식을 존중하자’는 사적 취향으로 번역돼 차단된다. 고민하는 교사 개개인은 그 고민을 나눌 동료나 후배를 찾지 못하고, 급기야 ‘정말 내가 이러는 것이 옳은 것은 맞는지’ 흔들린다.
다 읽고 나도 더 절망적일 뿐 여기서 어떤 희망을 찾을 수는 없다. 다만 교사를 둘러싼 상황이 이렇다는 사실을 모른 채 내놓는 해결책은 의미가 없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어떤 제도를 시행하든 그것을 현장에서 수행할 실무자는 교사이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 덫에 갇혀 있는지 알지 못한다면 무슨 제도가 내려와도 ‘교사가 교육에 대해 고민할 여건’이 부재한다는 사실 앞에서 무력할 것이다.
교사 개개인이 털어놓는 힘든 경험담들은 여기저기서 접할 수 있다. 단순한 경험담의 집합은 하소연을 넘지 못한다. 그 경험이 어떻게 이 시대를 설명하고 있는지, 어떻게 서로 관계되는지, 이 시대의 학교 교사들이 얼마나 보편적으로 겪고 있는지를 분석하고 연구할 때, 이것은 일회적 경험을 넘어 사회적 증언이 된다. 비록 대단한 대안이나 변화를 당장 이끌어내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고립되어 흔들리는 교사 개개인이 자신과 같은 처지의 교사들을 확인하고 서로를 지탱할 힘을 모으기라도 할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바로 그 역할을 하고자 한다.
그리고 우리, 교사가 아닌 보통의 독자들은, 철밥통에 애들을 때리고 부조리한 교실 왕국을 만들던 십 수년 전 작은 독재자로서의 교사가 아닌, 조직에 치여 의미를 잃은 평범하고 무력한 한 직장인을 발견할 것이다. 실제 교사의 힘겨운 사연들을 적잖게 듣던 입장이었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교사들이 그렇게 안쓰러울 수가 없다. 악역인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사정이 있더라는, 입체적 인물의 뒷이야기를 본 듯하다. 무너진 교육을 두고 내 탓이니 네 탓이니 멱살잡이가 난무하는 와중에, 상대도 가해자가 아닌 것을 알게 된다면 동정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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