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리수 헤어의 여동생이 입원한 병원의 밤에 아픈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쓰레기' 오빠가 의사 가운을 벗어던지고 소녀를 안아주었을 때, 순간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둠이 거뭇하게 찾아온 계절의 밤 하얀 셔츠 위에 도드라지게 드러난 그의 어깨 근육과 구불구불한 머리의 말괄량이 소녀가 소란을 멈추었을 때, 지나간 회상이 선사한 이 드라마의 반전은 그가 바로 친오빠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터져 나온 한숨 같은 멜로디. "너의 말들을- 웃어넘기는..."

응답하라 1994의 전신인 1997은 지난 시대의 높은 복원력으로 호평 받은 작품이다. 하지만 이 시리즈의 타임워프가 복원한 것이 단순히 그 시대의 유행이나 스타일 같은 물질적인 고증만은 아니었다. 응답하라 시리즈가 진짜 시간을 돌려 찾아온 것은, 바로 1997의 감성이었다. 사라져가는 아날로그를 간신히 붙잡고 섰던 대한민국의 마지막 아날로그 시대에 바치는 경배.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을 단순한 멜로드라마가 아닌 시대극이라 표현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시리즈로 돌아와 3년을 거슬러갔다.

정말이지 이 시리즈가 선사하는 탱탱한 90년대 감수성의 재현은 그야말로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는데, 어쩜 이렇게 러브라인마저 90년대의 감성을 그대로 저격하고 있는지. 사랑도 아닌 그렇게 친구도 아닌~ 넌 언제나 나에게 우정 이상도 아닌 이하도 아닌~ 그즈음에 서 있던 그 시절의 필수 클리세. 우정 이상 사랑 이하의 미묘한 줄다리기를 하고 섰던 서인국과 정은지. 그리고 3년 전, 이번에 선택된 90년대의 러브라인이 그야말로 눈물겹게 그 시절의 향수를 자극한다. 오빠와 여동생의 사랑. 드라마 느낌이나 이은혜의 점프 트리 에이플러스를 보고 자란 우리들이니 어찌 아니 열광할 수 있으리오.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 '오빠'역의 캐스팅이다. 응답하라 1994의 최근 회차가 몇 번이나 반전, 반전하며 관객을 놀라게 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이 드라마의 진짜 반전은 배우 정우를 순정 만화의 남자 주인공으로 기용했다는 사실부터가 아니었을까. 1997년의 드라마, 별은 가슴에의 감독이 강민 역을 맡은 안재욱에게 '내가 너 명동 거리를 지날 수도 없게 만들어줄게.'라고 장담했다더니. 그야말로 이 드라마 마치 작정한 것처럼 정우의 매력을 끌어내고 있다.

이름부터가 냄새나는 쓰레기인 그에게서 무슨 순정만화풍 매력이라니 어처구니없는 소리다 하시겠지만, 그러니 더 놀라운 것 아닌가. 유통기한이 한참 넘은 우유를 마시고선 멍한 얼굴로 "괜찮은데." 중얼대던 것이 바로 그의 첫인상이었는데 이런 그가 멋있고 듬직하며 심지어 처연하고 섹시해 보이기까지 하니, 이거야말로 작가의 농간이다. 마치 추리닝 입은 폐기물처럼 뒹굴다 여동생에게 치이던 모지리 오빠를 백의의 천재 의대생으로 둔갑시키다니.

여느 드라마였더라면 추리닝 입은 차림의 건달 이미지까지가 배우 정우를 요리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과감하게 의사 가운을 입히고 멜로의 눈동자를 선사한다. 정말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이다. 양아치나 건달 이미지가 익숙했던 정우가 하얀 가운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남자였을 줄이야.

이토록 과감한 시도가 가능했던 것은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빼놓을 수 없는 팬심의 연정이다. 부산 양아치들의 생생한 일상을 그려놓은 영화 바람에서 주인공 정우의 팬이 되었다는 제작진은 오래전부터 그를 섭외하고 싶어 했으나 인연이 닿지 않았다. 그리고 시리즈로 재탄생된 응답하라 1997에서 이번에야말로 놓치지 않고 그를 끌어들인 응답하라 제작진. 이토록 짙은 애정과 관심이 있으니 예상하지 못한 부분의 매력마저도 세심하게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정우의 캐스팅은 그 자신에게만이 신의 한 수가 아니라 제작진에게도 신의 한 수가 되어버렸다. 안 그래도 멋진 남자의 멋진 로맨스는 그리 신선하지 않다. 예상할 수 있는 범위의 설렘일 테니까. 하지만 이 남자의 매력은 발굴하지도 못했기에 무한이다.

"마이 아프나... 잠은 잘 수 있겠나..." 누가 머리를 쓸어줘야 잠을 잘 수 있는 여동생. 울먹이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오빠. 서태지와 아이들의 너에게. 무엇보다 그 대상이 반올림의 고아라와 바람의 정우라는 사실이 1994년의 재림보다 나를 설레게 하는 추억의 재현이다.

2003년의 어느 겨울, 1993년 서태지의 앨범 너에게를 미래의 서태지 아내 이은성과 나누어 듣던 중학생의 고아라. 그때는 우정의 매개체였고 지금은 사랑의 시작이다. "내 머릴 쓰다듬던 오빠의 손. 오빠의 숨소리. 오빠의 냄새. 오빤 분명 그대로였는데. 그날 난 오빠가, 낯설어졌다." 소녀의 속삭임은 이 드라마의 정우를 바라보는 우리의 감상일지도 모른다. 정우에게 의사 가운을 입혀준 그들의 센스에 경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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