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려야죠 이제는”

이천수 폭행시비와 거짓해명 논란이 빚어지자 한 방송기자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안타까움을 나타낸 코멘트에 다른 저명 축구기자가 남긴 댓글이다. 이천수의 선수생명을 날려야 한다는 취지의 내용으로 해석되는 댓글이다.

이 댓글의 주인공은 지난 십수년간 축구를 취재해왔고, 현재는 스포츠전문 매체에 기자로 재직하면서 국내 한 유명 포털에 고정 칼럼을 기고하는 저명 축구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기자는 이 댓글을 눈으로 목격하고 스스로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으로 놀랍고 한편으로는 섬뜩하기까지 했다.

이천수가 지은 죄의 가볍고 무거움을 떠나 축구라는 스포츠와 축구선수에 대해 기본적으로는 애정 어린 시선을 지니고 있어야 할 축구기자라는 사람에게서 한 축구선수의 선수로서의 생명을 날려야 한다는 말이 저리 거침없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천수의 이번 사안을 판단하는 대다수 국내 기자들의 기억엔 이천수가 그동안 축구선수로서 한국 축구에 어떤 기여를 해왔었는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말썽으로 비쳐졌던 사안들만 존재할 뿐이다.

그저 제목에 ‘영구제명’, ‘선수생명 위기’ 등 자극적인 제목을 박아내기 바빴고, 그걸로 누리꾼들의 클릭을 낚시질 하는 데 바빴다.

▲ 술집에서 옆자리 손님과 폭행 시비에 휘말린 인천유나이티드 소속 선수 이천수(31)가 16일 인천시 남동구 남동경찰서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DB>>
그렇다면 대다수 언론들이 ‘영구제명’ 또는 ‘선수생명 위기’를 운운한 것은 과연 사안의 실질적 내용을 볼 때 적절한 수위일까?

사실 이번 이천수의 폭행시비와 거짓말 논란은 아주 간단한 사안이다. 이천수가 쉬는 날 한 술집에서 지인들과 술을 마시다 우연히 조우한 일반인과 시비가 붙어 현장의 기물을 파손하고 피해자의 뺨을 2대 정도 때린 일이다. 다만 이후 언론에 사건에 대해 설명하는 와중에 여론의 비난이 두려워 거짓말을 하면서 논란이 커진 것일 뿐이다.

이천수가 과거 이런저런 구설수에 휘말렸고, 최근까지 전남 드래곤즈에서의 항명 파동과 오랜 방황으로 얻어진 ‘악동’의 이미지가 여전한 것이 이번 사건과 맞물려 ‘이천수는 구제불능’이라는 생각이 굳어지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상황 판단은 인터넷 공간에서 악플을 일삼는 ‘키보드 워리어’ 정도면 할 수 있는 단편적인 생각이지 기자의 생각 내지 언론의 판단은 아니다.

기자와 페이스북 공간에서 ‘친구’의 관계를 맺고 있는 한 명의 기자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런 말을 남겼다.

“긱스가 처제와 불륜이 났을 때, 누구도 죄값으로 그의 축구인생을 요구하지 않았다. 존 테리가 팀동료 와이프를 후렸을 때도, 죄값으로 그의 축구인생을 요구한 사람은 없다. 제라드가 나이트에서 DJ를 구타해 병원에 입원시켰을 때 또한, 누구도 죄값으로 그의 축구인생을 요구한 적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 이천수의 죄값으로 그의 축구인생을 요구한다. 이천수가 잘못이 없다는 게 아니다. 솔직히 난 이천수를 옹호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근데 이천수가 저지른 잘못이, 한평생 축구만 해온 한 축구선수의 '축구인생 끝'을 논해야 할 정도로 큰 죄값이 붙어야 할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천수를 싫어해도 좋고, 욕해도 좋다.

누군가를 싫어하는 건, 개인이 가진 최소한의 권리다. 다만 누군가를 싫어하고 욕할 수 있는 권리에, 축구선수로부터 축구를 빼앗을 권리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난 '인간 이천수'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난 태극마크를 달았을 때는 누구보다 심장이 터질듯 뛰고, 경기에 졌을 때 분해서 땅을 치며 눈물 흘리는 '축구선수 이천수'를 안다.

이천수는 죽을죄를 짓지 않았다. 축구선수한테서 축구를 빼앗는 건,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이천수가 죽을죄를 짓지 않는 한, 축구선수인 그에게 축구를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는 주어져야 한다.”

최소한 기자라면, 그리고 자신의 칼럼을 수만 명이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소위 ‘저명 칼럼니스트’라면 한 명의 스포츠 선수를 판단할 때, 그리고 그 선수를 둘러싼 어떤 사안에 대해 판단할 때 이런 정도의 통찰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천수가 이번 사건과 관련, 언론과 팬들을 향해 거짓말을 한 것은 분명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행동이지만 사건 자체는 그야말로 일회성 해프닝에 다름 아니다.

이번 일로 이천수는 구단의 명예를 실추시킨 책임을 물어 인천구단으로부터 일정 수 경기에 출전 정지 등과 같은 자체징계를 받고, 프로축구선수로서 품위를 지키지 못하고 K리그의 명예를 실추시킨 책임을 물어 한국 프로축구연맹으로부터 벌금 등의 징계를 받는 정도면 끝날 수 있는 사안이다.

이런 정도의 사안으로 언론이 퇴출을 운운하고 여론몰이에 나선다면 대한민국에 목숨을 부지할 스포츠 선수가 얼마나 될까.

▲ 인천 유나이티드 이천수 Ⓒ연합뉴스
조동암 인천사장은 19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천수가 피해자와 합의를 한 것으로 안다. 원만한 사태 수습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조 사장은 "김씨도 이천수의 팬이라고 하더라. 처음에 합의가 될 수 있었는데 여러 가지 일로 미뤄졌다. 그래도 김씨가 이천수를 도와주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합의가 이뤄진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이어 조 사장은 "구단의 선수가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면서 "일단 경찰의 조사 결과를 더 지켜본 뒤 추후 논의를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구단 자체 징계 여부에 대해서는 "조사 결과 발표 뒤 징계를 검토하겠다"고 덧붙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구단 사장은 제 정신을 차리고 있는 듯하다.

사형제도가 전 세계적에서 폐지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이유는 아무리 중한 범죄를 지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사람의 손에 의해 사람의 목숨을 거두는 형벌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어떤 신앙적 철학이 기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스포츠선수에게 영구퇴출이나 선수생명 중단을 운운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 사형을 운운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는 중요하다. 헌법에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권으로 명시되어 있는 이유다. 하지만 언론의 표현은 신중해야 한다. 언론이 보도에서 사용하는 용어와 표현이 다른 누군가의 인권을 짓밟는 결과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권리의 오용이자 남용이다.

한국의 언론들이여 이성을 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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