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어디를 가느냐"보다 "누구와 가느냐"가 더욱 중요한 관건인 것 같다. 마음에 맞는 도반과 함께라면 어디를 가든 중요치 않기 때문이다. 반면 아무리 좋은 곳에 가더라도 일행과 마음이 맞지 않으면 그 기간 내내 불편한 행보를 하게 될 것이다. 다행히 내 주변엔 훌륭한 품성을 지닌 멤버들이 있어 목적지에 관계없이 편안한 여행을 계획할 수 있다.

방송 일을 하면서 몇 명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모임을 갖기 시작한 것이 만날 때 마다 일정액 적립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종잣돈이 되어 일정상 다소 무리한 여행을 실행에 옮기게 하였다. 올해는 멤버들의 일정이 각각 달라 날짜를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선택하여 동유럽으로 결정되었다.

잠시 일상을 떠나 동유럽으로

각기 일터에서 중책을 맡은 사람들이라 열흘이 넘는 기간을 비울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용케 몸은 빠져 나온듯 싶다. 출발하는 날 새벽까지 꼬박 날을 새운 터라 편두통이 무섭게 공격해온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뒷통수 쪽에 무서운 짐승 하나가 숨어 있다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공격해오는 듯 공포스럽다. 이 상태로 여행을 마칠 수 있을까 걱정이 태산인데, 나 말고 선배들도 회사 걱정, 집 걱정, 남편 걱정, 자녀들 걱정에 복잡한 심사인듯 하다.

그것도 잠시, 가족들에겐 미안하지만 "비행기 탑승"을 보고하고 휴대전화 전원을 끄는 순간부터 현실과는 잠시 동떨어져 나만의 세상으로 진입하는 순간이다. 이륙하는 그 시점부터 한국의 모든 것은 잠시 잊는 것이 좋겠다. 게다가 지금은 출장이 아닌, 휴가이지 않은가.

혹자는 해외로 출장간다고 하면 "그래도 여행가는거 아니냐"며 부러워하지만 출장과 휴가는 엄연히 다르다. 출장도 일의 연장인데다 자칫 실수하면 만회할 수 있는 기회조차 없기 때문에 더욱 긴장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휴가를 떠날 때는 사실 목적지나 일정도 모르고 가는 경우도 많다. 좀더 젊고 의욕이 앞섰을 때는 행선지마다 자료 조사하고 가이드 옆에 찰싹 붙어서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기록하느라 에너지를 쏟았지만 어느 때 부터인가 마음을 턱 내려놓고 창밖을 보다가 전라도 말로 '자울 자울' 졸다가 살풋 실눈 뜨고 나와 다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사는 모양새를 무심히 바라보는 것으로 일정을 소일하고 있다.

가슴을 적시는 음악으로 남은 동유럽 여행길

대부분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현지 가이드는 동포들이 반가워서 자기가 아는 것을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고 무지하게 애를 쓰지만 한두번 가서는 특성을 구분할 수 없는 듯 하다. 중국은 그 절이 그 절 같고, 일본은 그 성이 그 성 같고, 유럽은 이 성당이나 저 성당이 비슷하고, 이 광장이나 저 광장이 헷갈려서 사진으로 기록해둬도 여기가 어느 나라의 무슨 성당인지 유감스럽게도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여 내 경우 인상적인 곳 몇 곳을 기억하였다가 되짚어 상기하는 식으로 여행 후기를 정리하고 있다.

그래도 이번 여행은 다행히 나의 얕은 음악 상식으로도 충분히 이해되는 노선으로 형성되어 방문했던 나라와 도시들이 음악으로 기억된다. 체코 프라하에서는 <블타바>로 불리는 몰다우를 카를교에서 내려다보며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 가운데 <몰다우>의 도도한 선율이 떠올랐고 폴란드의 소금광산에서는 쇼팽의 녹턴 제1번 <이별의 노래>가 촉촉이 가슴을 적셨다.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배경으로 한 영화 <글루미 선데이>에 중독된 사람들에게 유난히 인상적이었을 부다페스트에서는 당연하게도 글루미 선데이 선율이 도시를 덮었다. 거리에서 글루미 선데이가 연주되고 있을 때 다뉴브강에서는 요한 스트라우스 2세의 <Blue Danube Waltz>가 화려한 밤을 수놓았다.

클래식에 푹 빠진 오스트리아 비엔나 시민들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도시인 오스트리아 짤츠부르크와 짤츠캄머굿에서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주옥같은 노래들이 수시로 산과 들, 도심 골목 사이를 오가며 메아리쳤다. 음악의 도시 비엔나에서는 모차르트와 요한 스트라우스의 왈츠가 단연 대세였다. 비엔나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는 현지 가이드의 재미있는 스토리텔링도 오스트리아의 이미지 제고에 도움이 되었다. 이 아가씨가 전하기를 비엔나 사람들은 클래식을 무지 좋아해서 어느 택시를 타든 라디오가 클래식 채널에 고정이 되어 있단다.

잘 알려진 것 처럼 비엔나에서는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도심으로 모여드는데 뜨겁게 덥힌 와인을 마시고 밤새 클래식을 들으며 춤을 추다 자정을 기해 와인 잔을 깨뜨린 후 옆 사람과 포옹을 하거나 입을 맞추면서 새해를 맞이한다는 것이다. "옆에 멋진 남자가 있으면 그해는 대박나겠죠"라는 농담에 웃음을 터뜨렸는데 이어지는 설명이 더욱 흥미로웠다.

클래식 'Blue Danube Waltz'로 새해를 시작하다

12월31일 각 라디오 방송사에서는 사람들이 모이는 시청 광장에 부스를 설치하고 하루 종일 클래식을 틀어주는데 자정을 기해 일제히 요한 스트라우스 2세의 <Blue Danube Waltz>를 송출한다는 것이다. <Blue Danube Waltz>가 흘러나올 때 시민들이 왈츠를 추며 새해를 맞이하는 기분, 참 특별할 것 같다. 게다가 이 방송 저 방송 할 것 없이 0시를 기해 라디오에서 일제히 <Blue Danube Waltz>가 흘러나온다니 너무 멋지지 않은가?

경제학자를 꿈꾸는 가이드의 말을 들으며 나는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외국인 관광객이 한국에 와서 택시를 탔을 때 제일 먼저 듣는 노래는 무엇일까? 외국인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을 기억하는 노래나 소리는 무엇이 있을까? 그들은 어떤 음악으로 한국을 기억할까? 신년 0시에 모든 라디오 방송이 약속을 한 듯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노래를 들려준다면 무슨 노래가 좋을까?

한국의 노래와 소리는 무엇이 있을까

한국을 떠나올 때 괴롭히던 편두통은 사라졌지만 비엔나에서 이런 화두를 접한 순간 두통과는 살짝 질이 다른 묘한 흥분이 몰려왔다. 언젠가 타 방송사의 라디오 피디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전북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을 공동 제작해서 같은 날 방송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다가 실현 가능할지 여부를 몰라서 농담처럼 흘려보냈는데 사실 불가능한 일도 아닌 것 같다.

지난해 말, 국내 9개 방송사가 연합한 대한민국 라디오 공동프로젝트팀이 '대한민국 라디오 공동프로젝트 라디오는 나눔입니다'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해서 호평을 받은데 이어 제20회 한국 PD 대상 시상식에서 라디오부문 실험정신상을 받기도 했다. 물론 전국적으로 시행된 것은 아니지만 지역마다 공통의 현안 문제나 공감대를 이끌어 낼 수 있는 프로그램을 한목소리로 제작한다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라디오를 통해 지역 이슈 공감 형성되면 좋을 듯

휴가 때 찍은 사진은 아직 인화조차 못했지만 이번 휴가를 정리하면서 마음에 두가지 성과가 있었던 듯 싶다. 여전히 장엄하고도 감미로운 음악들이 가슴속에 메아리치고 있고,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신년 0시를 기해 울려 퍼지는 <Blue Danube Waltz>처럼 우리도 라디오를 통해 무언가 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그것이다. 이것이 여행에서 얻어진 에너지일까?

1965년 볕 좋은 봄, 지리산 정기가 서린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원광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행정대학원에서 언론홍보를 공부했다. 전공을 살려 지방일간지 기자와 방송작가 등을 거쳤고 2000년 원음방송에 PD로 입사, 현재 편성제작팀장으로 일하며 “어떻게 하면 더 맑고 밝고 훈훈한 방송을 만들 수 있을까?” 화두삼아 라디오 방송을 만들고 있다.

지역 사회와 지역 문화에 관심과 애정이 많아 지역 갈등 해소, 지역 문화 발전에 관련된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획, 제작해왔다. 수필가로 등단, 간간히 ‘뽕짝에서 삶을 성찰하는’ 글을 써왔고 대학에서 방송관련 강의를 시작한지 10여년이 넘어 드디어 지식이 바닥을 보이자 전북대학교 대학원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며 용량을 넓히려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최근 전북여류문학회장을 맡았다. 방송에서나 인간적인 면에서나 ‘촌스러움’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다. http://blog.daum.net/kse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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