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경기도 하고도 꽤 변두리에 있다. 우리집 가까이에 있는 멀티플렉스에는 언제나 흥행성 있는 몇몇 영화만이 영화관을 점거하고 있다. 다운받아서 볼 양이 아니라 극장에서 보고 싶은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산 넘고 물 건너 한양 나들이를 해야만 한다.

산 넘고 물 건너는 수고를 아끼지 않게 만드는 몇몇 감독들이 있다. 그 중 제일은 홍상수 감독이요, 그 다음에 드는 분이 우디 알렌이시다. 물론 기라성 같은 감독들도 많지만, 거의 일 년에 한두 편을 꼬박꼬박 출근부에 도장 찍듯 만들어 내는 이분들에게 어느덧 길이 들었달까? 이젠 안 보고 지나가면 땡땡이치는 기분이 들 지경에 이르렀다.

사설을 이리 장황하게 늘어놓는 이유는 이글이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꼬박꼬박 본 경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우리 선희>를 처음으로,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조우한 사람들과는 입장이 다르다는 걸 해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구구절절한 해명을 앞에 늘어놓을 만큼 여전히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지만 그래도 이번엔 좀 그랬다.

더구나 이번에 우디 알렌 감독이 내놓은 <블루 재스민>이 지금까지 우디 알렌이라는 이름이 각인되었던 여타의 영화와 너무도 다른 명징한 궤적을 보였기에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더더욱 진부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 평론가 이동진은 우디 알렌 감독의 세계관을 인생에 대한 회의주의라고 평가한다. 지금까지 우디 알렌의 영화는 <블루 재스민>의 징거의 선택을 다루는 경우가 많았다. 약혼한 남자 친구가 있지만 어느 날 우연히 파티에서 정말 마음에 맞는(혹은 몸이 맞는) 남자를 만나고 그에게 빠져들지만 알고 보니 유부남이었다는. 그래서 결국은 시치미 뚝 떼고 아니 개과천선하고, 원래의 약혼자에게 돌아간다는 삶의 부조리한 단면을 고스란히 영화 속에서 폭로한다. 하지만 마치 우리 조건의 풍자와 해학처럼, 일장춘몽처럼 껄껄껄 ‘사는 게 그런 거야’하며 웃고 지나가게 만들곤 했었다.

그에 반해, 굳이 비교하자면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불가지론'이랄까? <우리 선희>에서 선희는 만나는 남자들에게 자신이 누구냐고 묻는다. 그런 질문에 물론 남자들은 경우에 따라 자신의 편의에 따라 대답을 해준다.

이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서 더욱 두드러졌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해원에게 사람들은 지극히 자신이 보고 싶은 면에서 해원을 평가해 준다. 해원의 진짜 정체 따위는 필요 없다. 엄마는 엄마 편한 대로, 길 가던 아저씨는 아저씨대로, 사랑하던 남자는 남자대로, 그들의 말을 들을수록 해원은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켜야 풀릴 갈증만 가중될 뿐이다.

알 수 없는 건 일찍이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아니 이미 그 이전부터 알 수 없었던 오묘한 여성이란 존재뿐만 아니라, 여전히 그들이 대학교수이건 영화감독이건 그 어떤 사회적 정체성을 지녀도 '수컷'이란 용어로 지칭될 수 있는 '미친 놈'들과의 관계가 끊임없이 재생성되는 세상에 대한 '불가지론'이란 게 정확할 것이다.

마치 한평생 인물화에 몰두하는 화가처럼, 홍상수 감독은 비슷한 구도의 혹은 구도만 살짝 다르게 잡힌 인물들을 끊임없이 스케치하며 그 불가지론의 매력을 탐구하고 있는 중이 아닐까 싶다.

물론 처음부터 홍상수 감독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예전의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똑같이 불가지론의 남녀관계를 그려냈어도 거기서 보다 초점이 맞춰진 것은 지식인의 허위의식이라는 사회적 터치가 강조되었다면, 이즈음에는 보다 오묘한 사회 생물학적 남녀관계가 부각되는 듯하다. 여전히 사회적 인간의 부조리함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이전의 구체적인 지식인들은 이젠 피상적인 성인 남녀로서 색깔을 더 드러낸다.

아마도 세월이 변해도 여전히 홍상수 감독 영화의 주인공들이, 대학을 중심으로 맺어지는 인간관계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파격적이라면, <다른 나라에서>의 안전요원(유준상 분)이나 <하하하>의 왕성옥(문소리 분)을 떠올리게 되지만, 그들도 크게 보면 홍상수 감독의 불가지론의 세계 속 인물일 뿐이다.

그런데 유쾌한 음악이 깔리며 소동극을 마무리하는 우디 알렌의 영화는 떠들썩한 마무리와 달리 보고 나면 가슴이 스산해지는 경우가 많다. 저러고 또 사는구나 싶은 게 말이다. 반면, 홍상수 영화는 ‘에그 미친 놈’ 하게 되는데, 언제부터인가 그 미친 놈 소리의 뒤끝이 자꾸 힘이 빠지게 된다. 이젠 마치 집에서 기르는 애완동물의 애교를 보는 듯해진다. 불가지론이라지만, 그 서로에게 닿을 길 없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의 관계가 답답하지만, 자꾸 그러려니 하게 된다. 아이러니하다.

게다가 두 감독 모두 일관되게 자신의 세계를 올곧게 표현하며, 그 변주를 위해 우디 알렌은 파리, 바르셀로나 등 외국을 떠돌았고, 홍상수 감독은 통영, 모항 등 우리나라의 바닷가를 다녔다. 변주해 가는 방식도 비슷하다.

그러던 우디 알렌 감독이 그의 영화에 대해 그러려니 했던 사람들을 향해 <블루 재스민>을 통해 칼을 빼어들었다. ‘삶이 이런 거야, 느네도 다 이렇게 기만적으로 살잖아. 뭐가 달라!’라면서. 그가 일관되게 주장했던 주제 의식과 다르지는 않지만, 그 표현 방식은 직설적으로 바뀌었고 해학과 풍자는 뒤로 숨었다. 금융위기를 맞이한 세계 그 중에서도 뉴욕의 현실태를, 그 속의 인물 군상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각박해진 세상에서 퍼뜩 정신이 들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런 거야, 정신 차려!’ 하듯이 말이다

반면 <우리 선희>란 영화는 홍상수 감독의 새 영화라기보다는 속편 혹은 스핀오프 같은 느낌이 든다. 찾아보니 정유미와 이선균이 연인으로 나왔던 <옥희의 영화>는 2010년도 작품인데다가 작품의 방식도 4부작 옴니버스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희>란 작품이 익숙하다 못해 지겹다 느껴지는 것은, 바로 전 작품인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의 해원과 감독으로 나온 이선균의 관계, 직업이 이번 작품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요, <북촌 방향>에서 등장한 술자리가 다시 <우리 선희>에서 오버랩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 선희>는 그간 홍상수 감독 영화에서 우리에게 익숙해졌던 설정 모두를 모아 놓은 듯한 <옥희의 영화>의 후속편이요, <북촌 방향>의 스핀오프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당신도 알고 우리도 아는, 분명히 다른 붓터치에도 불구하고 뻔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면벽수행 중에 그 화두가 이젠 다른 단계로 넘어갈 때도 되었는데도 여전히 머릿속을 맴맴 돌고 있는 답답함이랄까.

이젠 홍상수 감독도 동화 속 공간 같아진 그의 영화를 넘어선, 술 한 잔에 풀어지고 마는 어설프고도 뻔한 불가지론을 넘어선, <블루 재스민>처럼 2013년의 대한민국에 발 딛고 그 옛날의 촌철살인을 한마디쯤 해주셨으면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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