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국만이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운영하던 시절이 있었다. 가장 비참할 때를 꼽으라면? 구여친의 미니홈피를 들락거릴 때? 그보다 더 스스로가 찌질하다 못해 바닥이 보인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연락이 끊긴 동기와 친구들의 미니홈피를 타고 타고 넘어가 ‘뭐 하고’ 사는지를 구경할 때다. 기어이 어떤 회사에 다니는지, 결혼은 했는지, 얼굴은 고쳤는지, 남편은 수입이 좋은지, 어떤 고상하고 우아한 취미를 즐기는지 확인을 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파도를 타고 또 탄다. 그 안에는 내 저열한 욕망이 있다. 나보다 잘 사는지? 나보다 얼마나 행복하게 잘 사는지? 이런 걸 궁금해 하는 욕망 말이다.
설마 그럴 리 없다고?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트위터에서 남의 계정을 검색해보는 것. 대부분 팔로잉이 적지 않은 SNS 시대에는 누군가의 타임라인을 꼼꼼히 보는 것은 그 사람의 계정을 ‘찍어 볼 때’이다. 왜 그걸 보려고 할까? 무엇을 확인하고 싶어서?
오프라인 관계망의 영향을 비교적 덜 받는 트위터나 블로그에는 '과장된 개인'들이 넘쳐난다. 절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떤 것들이 보여질 수 있는 것'인지 취사 선택된다. 기준은 '보여주고 싶은가'에 달렸다.
SNS가 가져온 피상적 관계, 피로한 웹에서의 관계, 기술 회의주의 등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대책없이 ‘페이스북 같은 건 없던 옛날이 좋았지. 그땐 진심으로 사람을 만났어’와 같은 이야기를 정작 웹에 쓰고 있는 이들을 매우 좋아하지 않는다. 기술이 취사 선택 가능하다고 믿는가. 전 국민의 대부분이 몇 개의 드라마를 보고 있고, 비슷한 아이돌 가수를 좋아하는 나라에서 선택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그렇다면 문제가 하나 생긴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하는 것은 그 자체로 ‘힙’하지 않다. 단순히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만을 받기 위해 SNS를 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책에도 나오듯 “정말 중요한 것은 전화로”하면 된다. 우리가 원하는 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통해 나를 드러내는 행위다. 우리가 골몰하는 것은 어쩌면 ‘보여지고 전시되는 나’이다.
최연소(저자는 1989년생이다) 나오키상 수상 작가인 아사이 료의 소설 《누구》의 소재는 취업이다. 하지만 이 책은 취업에 관한 책이 아니다. 오늘날의 청춘 세대에게 가장 극적 변화의 시기라 할 수 있는 취업 준비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을 뿐이다. 책이 복선을 깔며 계속해서 보여주는 것은 SNS에서의 자의식이다. 저자의 질문은 간단하다. ‘우리는 남과 다른 나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네 명의 남녀가 모여 취업을 준비한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스펙을 가진 이들이다. 활발한 성격에 해외 연수 경험을 가진 리카, 언제나 상대를 경탄하는 마음으로 부러워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진 미즈키, 까불거리지만 타고난 배짱과 스킬로 멋지게 살 줄 아는 밴드 출신의 고타로. 이들 사이에 있는 주인공 다쿠토는 연극반 출신으로 무덤하고 다소 소심한 남자다. 그리고 이들 주변에서 ‘나는 달라’라는 자의식을 풍기면서 취업 따위는 준비하지 않겠다는 기세를 뿜어내는 다카요시, 긴지가 있다.
주인공 타쿠토는 이들이 너무 불편하다. '아무한테도 전하지 않아도 될 단계의 일을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말을 모아 온 세상에 전하려' 하기 때문이다. "자신밖에 할 수 없는 표현과 달콤한 꿀로 코팅한 듯한 말을 구사해 타인에게 이상적인 자신을 상상하게 하려고 한다"고 평가한다.
그 갈등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드러난다.
"취업 활동을 하는 애들은 뭐랄까, 상상력이 없는 게 아닌가 싶어. 그 이외에도 살아갈 길은 얼마든지 있는데 그것을 상상하는 걸 포기하는 건 아닌가, 하고"

"그것이 각자의 의지가 없는 큰 흐름으로 보일지 몰라도, '취업활동을 하겠다'는 결단을 내린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임이다. 나는 아티스트나 기업가는 분명 될 수 없다. 그러나 취업활동을 해서 기업에 들어가면 또 다른 형태의 '누군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작은 희망을 바탕으로 큰 결단을 내린 한 사람 한 사람이 같은 정장을 입고 같은 면접에 임하고있을 뿐이다. 결코 개인으로서 누군가가 되는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처음엔 모두 같은 출발에 서 있다. 그리 친하지도 사이가 나쁘지도 않았던 이들은 일종의 ‘취업 스터디’를 시작한다. 다소 허세가 있는 리카는 취업준비생 주제에 명함을 만들어 취업한 선배들을 무턱대고 방문한다. 당연히 열심히 한다고 되는 건 아니다. 눈치 없이 나대기만 하는 리카에 대한 멤버들의 시선은 '걱정을 가장한 경멸'이다. “난 절대로 싫어. 나중에 OB 방문 온 아이가 트위터로 말을 걸어오면 오싹할 것 같아.”
SNS에 존재하는 ‘나’란 나의 현실의 일부만을 담고 있다. 거기서는 “귀사에 면접을 갑니다”라는 낯선 후배가 내 정체를 밝혀서는 안 된다. 그것은 SNS의 룰을 어기는 것이다. 이걸 구분하지 못해, 우리의 현실 트위터에서도 종종 사건들이 벌어진다.
"취업활동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는 물론 시험에 계속 떨어지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거절당하는 체험을 몇 번이나 되풀이 한다는 것은 고통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별로 대단치 않은 자신을 대단한 것처럼 계속해서 포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시기에 성적을 받고 대학을 진학하는 ‘입시’가 끝나는 때와 달리, 취업활동은 매우 구체적으로 당사자의 ‘삶과 가치’를 드러낸다. 그래서 피를 말린다. 끔찍하게도 서로 계속해서 비교를 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누가 2차에 붙은 것, '그런 곳엔 지원서 안 쓴다'던 친구를 필기시험장에서 만나는 것에 서로의 감정은 교차한다. 다른 친구가 안 풀리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를 하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이들의 취업스터디는 유지가 된다.
이 책의 장르나 호러가 아니지만,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 속의 '바닥'을 수면 위로 꺼낸다. '우려'를 가장해 근황을 묻고, 안도하고, 연민의 말로 조롱을 한다. 서로를 비교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유일한 만족감은 '나는 다르다는 자의식' 뿐이다.
주인공은 '나는 내게 마약을 놓고 있다'는 표현을 쓴다. 그의 친구 긴지는 연극반 동료였지만, 본격적으로 연극을 하겠다며 학교를 관두고 극단을 만들었다. 주인공은 긴지가 만든 극단에 대한 '혹평'을 주기적으로 검색한다. 특별한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저장해둔 검색어로 '근황'을 궁금해할 뿐이다.
한 명씩 채용이 결정이 나면서 스토리는 끝으로 달려간다. 리카는 사실 훌륭한 스펙을 가진 듯 하지만 명함을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것처럼 자기 의견 따윈 아무것도 없다. 미즈키는 남을 응원할 줄은 알았지만, 자신의 인생은 응원하지 못한다. 가족을 이유로 '그럴듯한 회사'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고타로는 노력을 티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에겐 남들에게 유치하게 여겨지는 취업의 목표가 있다.
이야기가 종반부로 달려가면서 우리 안의 적의, 우리 안의 무관심이 튀어 나온다. 먼저 취업한 미즈키가 취업활동을 비웃으며 남다른 자의식을 추구하는 다카요시에게 일갈한다.
"인생이 선로 같은 것이라면 나와 똑같은 높이에서 똑같은 각도에서 그 선로를 봐 주는 사람은 이제 없어. 살아간다는 것은 아마도 자신의 선로를 함께 봐 주는 인원 수가 달라져 가는 거라고 생각해."

"해 본 적도 없으면서 나한테 회사 생활은 맞지 않다, 라니. 너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니? 회사 생활을 하는 세상의 많은 사람보다 네가 더 감각이 예민하고, 섬세하고, 감수성이 풍부해서 이런 현대에는 살아가기 괴롭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야. 그런 표현 하나로 자신을 지켜봐야 그런 너를 너와 똑같이 봐 주는 사람은 이제 없어. 네가 걸어가는 과정 따위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고, 아무도 존중하지 않아. 더는 아무도 쫓아가지 않는다고."
책의 마지막은 요시다 슈이치의 <퍼레이드>를 떠오르게 한다. 생활을 공유했던 네 명의 청춘남녀가 결국 소통하지 못하는, 스산한 관계의 본질을 그린 소설이다. 방향을 잃은 자존감의 마지막은 주인공에게 향한다. 2년 째 취업을 못한 주인공, 그는 특별하지 않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난 니가 왜 취업을 못하는 지 알아" 리카가 주인공 다쿠토에게 말한다. 리카와 다쿠토는 적나라한 장면을 서로에게 들키고 만다. 절대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인간의 바닥'이 드러나는.
"정말로 중요한 이야기는 트위터에도, 페이스북에도, 메일에도, 그 어디에도 쓰지 않는다. 정말로 호소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데에 쓰고 답장을 받는다고 만족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정말로 호소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데에 쓰고 답장을 받는다고 만족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런 곳에서 보여 주는 현실의 얼굴과 괴리가 생긴다. 트위터에서는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면서, 하고 멋대로 불평한다. 자신의 프로필 사진만이 건강한 모습으로 줄곧 그 곳에 있다."
남과 다른 나. 흔히 말하는 '중2병'은 중2 때 겪어서 생긴 말이 아니다. 중2 때나 할 법한 사고로 세상을 본다는 뜻이다. 나는 이 말을 블로그를 하며 배웠다. 거기에는 넘쳐나는 자의식들로 가득했다. 쿨한 척, 진보적인 척, 이성에게 어떤 타입의 사람인지, 어떤 취향을 지녔는지... 생활과 취향은 그 자신을 보여주기 위해 구성되었다. 관계가 틀어질 경우 감정의 공방전이 일어났다. 그 역시 ‘남과 다른 나를 인정해달라’라는 욕망이 넘쳐흘렀다. 오늘도 넘쳐 흐르는 자의식 사이에서 욕망과 의지로 SNS를 운영한다. 이 자의식들은 잉여력이 되어 무언가 쓸모를 찾을 수 있을까?
책의 카피처럼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서늘함'이 이 책에는 있다. 하지만 SNS를 하는 우리는 이미 그런 시대를 감내하기로 한 것이 아닐까. 넘쳐나는 콘텐츠가 있고, 사람이 죽어도 온라인에는 계정이 유령처럼 남아있는 시대다. 다름을 강요받는 것조차 정장을 입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이 무력한 존재들의 자의식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서로의 자의식이 하나의 인격체가 되어 SNS에서 관계를 맺는 방식은 가끔 무섭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SNS를 접지는 않을 것이다. 여전히 '어떤 나'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으므로. 책 제목의 '누구'와 같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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