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정수장학회 비밀회동'을 보도한 한겨레 최성진 기자에 대해 "청취는 '유죄'이나, '녹음'과 '보도'는 무죄"라며 선고유예 판결을 내린 것을 두고 논리가 궁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 20일 선고공판 직후, 최성진 기자가 기자들과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
최성진 기자는 최필립 당시 정수장학회 이사장과 이진숙 당시 MBC 기획홍보본부장 등이 비밀회동을 갖고 정수장학회의 언론사 지분을 팔아 부산, 경남지역 대학생들의 반값등록금 재운 등으로 활용하기로 결정했다고 지난해 10월 13일, 15일 두 차례에 걸쳐 단독 보도를 한 바 있다. 이 보도는 최성진 기자가 취재차 최필립 당시 이사장과 전화통화를 한 이후 최 이사장이 실수로 휴대전화 종료 버튼을 누르지 않아 우연히 비밀회동 대화를 듣게 됨으로써 이뤄진 것이었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형사2부(고흥 부장검사)는 1월 18일 "공개되지 않은 타인간의 대화를 직접 청취, 녹음 후 기사화한 것은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에 해당된다"며 최성진 기자를 불구속 기소했으며, 지난달 2일에는 징역 1년 및 자격정지 1년을 구형했다.

20일 서울중앙지법 형사5단독 이성용 판사는 최 기자의 행위를 '청취', '녹음', '보도' 등 3가지 부분으로 분리해 "청취는 '유죄'이나, '녹음'과 '보도'는 무죄"라며 징역 4월에 자격정지 1년의 선고를 유예했다.

이 판사는 '청취' 행위에 대해 "최필립과의 통화를 마친 직후 최필립과 MBC 간부들 사이의 대화가 시작돼 이를 계속 듣게 됐다는 당시의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청취의 동기, 방법, 대화가 이뤄진 장소, 환경, 공개되지 아니한 대화 당사자들이 일반적으로 가지는 프라이버시권에 대한 기대감 등 여러 사정에 비춰 피고인이 적법행위(대화를 듣지 않는 행위)로 나아가는 것이 실제로 전혀 불가능했다고 하기 어렵다"며 유죄로 판단했다.

이 판사는 "대화 청취를 시작할 당시 당사자들이 누구인지는 알았지만, 대화내용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단지 보도할 만한 자료가 있는지 탐색하는 차원에서 불법적으로 청취했다"며 "비록 청취 중간에 공익과 관련된 내용의 대화가 이뤄졌다 하더라도 청취 경위 및 동기 등 여러 사정에 비춰 보면 (청취) 행위의 동기나 목적의 정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녹음'에 대해서는 "세사람의 대화가 시작됐을 때는 이미 녹음 중이었고, 단지 소극적으로 (녹음을) 중단하지 않은 '부작위'행위인데, 이를 (통신비밀보호법이 금지하는) 녹음행위의 선행행위로 볼 수 없다. 녹음이 적법하므로 이를 보도한 것을 불법행위로 볼 수 없다"며 무죄 판단을 내렸다.

청취-녹음을 분리한 이유에 대해서는 "청취 행위는 녹음과 별도로 기소됐고, 서로 행위의 모습이 다르며, 녹음이 이뤄졌다고 해 청취가 녹음과 흡수되는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법원이 "경위에 정상을 참작할 만한 사유가 있으며 개인적 이익을 도모한 게 아닌 점, 전과가 없는 점 등을 미뤄 선고를 유예한다"고 판결했으나 논리가 궁색하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판결 직후, 전국언론노동조합은 성명을 내어 "대화내용을 녹음해 보도한 것은 무죄로 판단하면서, 대화 청취를 유죄로 본 것은 대체 어떤 근거와 잣대인가?"라고 물으며 "지극히 자의적인 해석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언론노조는 "청취와 녹음이 동시에 진행됐는데 이중 하나는 유죄, 다른 하나는 무죄로 판단한 것은 전형적인 '절충형 판결'이라는 분석에도 힘이 실린다"며 "법원의 엉뚱한 판결이 나올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물건은 훔쳤지만 절도죄는 아니다'식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최 기자에 대한 경찰의 압수수색과 검찰의 기소 등 일련의 무리한 '언론 재갈 물리기'를 이제는 그만둘 때도 됐다. 법원은 '기자의 양심'을 더 이상 멋대로 재단하지 말라"며 "무작위 청취 부분에 대한 법원의 무죄 판결이 항소심에서는 반드시 이뤄지길 기대한다"고 촉구했다.

경향신문 역시 21일자 사설 <아쉬움이 남는 '정수장학회 보도' 판결>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청취와 녹음이 동시에 이뤄졌는데 전자는 유죄, 후자는 무죄로 본 대목"이라며 "선고를 유예한 데서 재판부의 고민을 짐작할 만하나 아쉬움은 남는다"고 밝혔다.

경향신문은 "'정치검찰'의 행태는 법원이 공소사실 대부분을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사실상 심판을 받았다고 본다. 공소권을 남용한 검사들은 부끄러움을 느껴야 마땅하다"며 "언론의 자유를 제약하거나 위축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중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사자인 한겨레도 21일자 사설 <아쉬움 남긴 최성진 기자 선고유예 판결>에서 "동일한 일련의 행위를 대화 청취와 녹음으로 분리하는 것도 어색하거니와, 청취하지 않고 녹음만 했으면 무죄라는 뜻인지 법원의 논리가 궁색하다"며 "상급심에서는 법 제정 취지와 보도의 공익성ㆍ정당성을 두루 반영해 좀더 전향적인 판결이 나오길 기대한다"고 촉구했다. 한겨레는 "항소를 통해 취재ㆍ보도의 전 과정이 무죄임을 입증하도록 하겠다"는 입장이다.

최성진 기자 측 김형태 변호사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판결대로라면 대화 내용을 듣지 않고 녹음만 했다면 무죄가 나오게 된다"며 "녹음은 청취 내용을 전자신호로 바꾼 것일 뿐 녹음과 청취를 분리할 수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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