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거탑’ ‘외과의사 봉달희’ ‘뉴하트’ ‘종합병원’ ‘산부인과’ ‘브레인’ ‘골든타임’… 지금까지 의학드라마는 셀 수 없이 많았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각각 개성이 있었고, 주제의식도 명확했으며, 그 주제의식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는 기치를 보여주었다. 웬만하면 기본 시청률은 나오는 편이었고, 그 중엔 꽤 인기가 높은 작품들도 있었다. 이는 의학드라마가 지닌 독특한 매력 때문일 테다.
최고의 인텔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동경 어린 세계, 생명을 다루는 이들에게 펼쳐지는 긴박한 상황, 목숨을 담보로 한 긴장감의 연속, 그 속에서 곱게 피어오르는 생명이라는 존귀한 가치. 의학드라마가 지닌 매력들은 아직까지는 건재하다. 그 속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여 재생산하게 된다면 시청자들의 사랑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런데 그것이 점점 힘들어진다는 것이 문제다. 이미 의학드라마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고, 종합병원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에피소드들을 탈탈 털어 더 이상은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이는 듯한 시점에서, 의학드라마가 지닌 가치를 조명한다는 것이 여간 쉬운 일은 아니란 말이다. ‘굿닥터’는 도저히 앞으로 더 나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길에서부터 출발하는 드라마였다고 볼 수 있다.
‘굿닥터’를 집필하는 작가는 ‘신의 퀴즈’를 쓴 박재범이다. 그는 케이블에서 방송된 드라마를 지상파 드라마 못지않은 화제 선상에 올려놓았다. 메디칼 범죄 수사 드라마라는 다소 생소한 장르, 미드 CSI의 아류작이라는 비아냥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마니아층을 확보하며 종영한 시즌 3은 시즌 1이나 2에 비해 완성도나 재미 면에서 훨씬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갈수록 허술해지는 시즌제의 딜레마를 박재범 작가는 가뿐히 내동댕이치고 만 것이다.
그런 그가 드디어 지상파에 첫 발을 들였다. 그것도 똑같은 의학드라마 장르를 들고 말이다. 그의 주특기를 이제 지상파에서 마음껏 펼쳐 보일 수 있겠다는 기대감은 ‘굿닥터’를 기다리는 마음을 한없이 설레게 했다. 하지만 편협한 장르에 국한된, 창조력이 부족한 작가의 불안한 모험일 수도 있다는, 이에 반대되는 의견도 제시됐다.
하긴, 케이블과 지상파의 드라마 환경은 엄연히 다르니까. 케이블에서 뜬 장르가 지상파에서도 파란을 일으키란 법은 없다.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를 보일 때가 사실은 더 많았다. 더군다나 의학드라마는 이제 웬만해서는 대박으로 이어지기가 힘들다. 의사 가운을 입은 배우들을 너무 많이 봤고, 안 들여다 본 병동이 거의 없으며, 생사를 오가는 극한의 상황을 한두 번 경험한 것이 아니다. ‘또 의학드라마야?’ ‘굿닥터’는 이 반응을 가장 먼저 접해야만 했다.
‘첫 회에 동시간대 시청률 1위’ ‘주원의 완벽한 서번트 증후군 연기’ ‘처음부터 대박조짐’… ‘굿닥터’는 ‘또야?’를 ‘와우!’로 바꿨다. 그것도 첫 회만에 말이다. 2회에서의 긴장감은 1회를 능가했으며, 이야기의 탄탄한 짜임새는 2회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주원과 주상욱, 문채원 등의 배우들과 박재범 작가, 연출 및 스텝진들이 이룬 의학드라마의 오랜만의 쾌거다.
‘굿닥터’는 기존 의학드라마와는 다른 세 가지가 있어서 그러하다. 먼저 ‘굿닥터’는 이야기의 커다란 축을 하나 더 세웠다. 보통 의학드라마는 질병을 이기려는 의사와 환자의 고군분투, 그리고 주연 배우들의 러브라인이라는 두 축을 기본으로 하여 살이 붙여진다. 그런데 ‘굿닥터’ 는 여기에 병원을 둘러싼 알력 다툼을 따로 추가했다.
감초 같은 에피소드가 아니라 이야기의 중심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대립이다. 강현태(곽도원 분)의 미소는 언제나 뿌옇다. 최우석(천호진 분)과 이여원(나영희 분) 사이는 아리송하기만 하다. ‘힘의 논리란 무엇인가’라는 명제를 달기에 충분할 만큼 병원 내의 기득권 싸움을 특유의 스릴 넘치는 필력으로 그려나간다. 의사들의 이야기에 ‘권력’의 의미를 새로이 부여한 것이다.
또한 ‘굿닥터’는 기존 의학드라마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소아과 병동을 배경으로 삼았다. 환자는 신음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의사는 어떻게든 살려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은 여느 의학드라마에서 보던 장면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위기의 순간을 극복하고 다시 회복되는 기적을 그려내는 장면에서도 그리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
그런데 아이들이라서 더 짠했다. 아이들이라서 더 애처로웠던 것은 분명했다. 물론 생명의 귀중함에 남녀노소가 어디 있겠냐마는, 인큐베이터에 들어가 있는 아기를,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아이가 온몸에 관을 꽂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더욱 안타깝게 여겨졌던 것만큼은 사실이다. 소아과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는 그것을 그려내는 배우를, 바라보는 시청자를 절절하게 만들었다. 시청자들로 하여금 극에 몰입되어 무사하기를 바라는 감정이입을 가장 완벽하게 일구어냈던 것이다.
또 하나의 묘수는 주인공에게 커다란 핸디캡을 장착시켰다는 점이다. 박시온(주원 분)은 ‘서번트 증후군’을 앓고 있는 레지던트다. 바꿔 말하면 의사가 환자이기도 한 셈이다. 물론 주인공에게 성장통을 안겨 그것을 극복해가는 과정을 통해 잔잔한 감동을 전달코자 하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박시온의 ‘서번트 중후군’은 그보다 더 진중한 의미를 품고 있다.
위암에 걸린 유방암 전문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장애인 의사가 재활병동에서 환자를 돌본다는 기사를 본 적도 있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게 아픔이 있기에 같은 아픔을 가진 이를 온전히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박시온의 자폐성향은 인간승리의 표본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같은 아픔을 겪는 자만이 그들의 아픔을 진심으로 이해하며 마음으로 보듬고 치료해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설정된 것일 게다.
더 이상은 새로울 것을 보여줄 수가 없는 장르라고 생각했던 선입견을 조각 내버린 ‘굿닥터’ 고, 이제 의학드라마는 뻔하다 치부한 통념의 벽을 와르르 무너뜨린 박재범 작가다. ‘신의 퀴즈’로 갈고 닦은 실력이 지상파에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것이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가 가니 ‘굿닥터’가 오는구나! 맞는 말인 듯싶다. 이보다 더 심장 두근거리는 바통터치가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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