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랑 형아 때문입니다. 나무에서 아이스크림 냄새가 나던 날, 토끼가 제 옆에서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갱도에서 녹슨 쇠 냄새가 나던 날, 형아가 제 옆에서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둘 다 어른이 되지 못 하구요. 어른이 되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사랑하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꼭 그렇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어제 첫 방송된 KBS 드라마 ‘굿닥터’에서 박시온(주원 분)은 왜 소아외과 의사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어렸을 적 사랑하던 이들을 지켜주지 못하고,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던 기억이 떠올려졌다. 5살 꼬마 아이는 그 기억이 그렇게 사무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아이는 의사가 되어 하늘나라 문턱에 선 아이들의 생명을 연장시켜 세상의 어른으로 자라게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자폐아라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경멸과 폭력을 당해야 했던 박시온. 그가 지닌 또 다른 암울한 기억은 아이가 어른이 되어 그 어른이 자신의 아이를 낳게 되었을 때, 온전한 사랑으로 키웠으면 하는 마음을 갖게 만들었다. 자신이 받지 못했던 사랑에 대한 대리만족. 어쩌면 박시온은 다른 부모들이 자식을 사랑하는 것을 봄으로써 자신도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레지던트 면접에서 ‘왜 의사가 되려는가?’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근사한 말로 대답한 박시온은 ‘서번트 신드롬 (발달장애나 자폐증 등 뇌기능 장애를 가진 이들이 그 장애와 대조되는 천재성이나 뛰어난 재능을 나타내는 현상)’을 앓고 있는 장애인이었다. 그래서 그를 바라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감동적인 대답을 왜곡했다. 정신이 모자란 장애인이 지껄이는 한낮 유치하고 감상적인 헛소리쯤으로 말이다.
그럼에도 박시온은 레지던트 자격을 부여받아 병원에서 일할 수 있게 된다. 그를 키우다시피 했던 병원장 최우석(천호진 분)이 자신의 자리를 걸고 딜을 한데다가, 박시온이 면접을 보러 오기 전 청량리역에서 사고를 당한 어린 아이를 그 자리에서 완벽한 응급처치로 목숨을 구한 동영상이 일파만파 퍼져 여론이 그를 선행의 아이콘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박시온의 채용에 손을 든 것일 뿐, 전반적으로는 그를 진정한 레지던트로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다. 최우석을 병원장 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세력은 박시온을 빌미로 그의 옷을 완전히 벗기려는 계획을 세우고, 박시온을 담당하는 김도한 교수(주상욱 분) 또한 박시온이 영 탐탁지 않다. ‘서번트 신드롬’은 의사들에게도 그저 불치병이었고, 조롱의 이유일 뿐이었던 거다.
극은 두 세력의 갈등과 대립으로 그려질 전망이다. 주인공 박시온과 김도한, 그리고 박시온을 지지하는 자들과 김도한의 편에 서는 자들은 양편으로 나뉘어 서로 찢고 가르고, 그러다가 어느새 봉합하는 과정을 겪게 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게 형성될 갈등의 구조는 박시온과 김도한이다. 첫 회부터 그들의 만남은 첨예한 대립 가운데 이루어졌으며, 보이지 않은 긴장감 속에서 펼쳐졌다. 이는 천재와 노력파, 장애인과 비장애인, 감성과 이성, 열성과 우성의 대립이라 할 수 있다.
이 부분에서 생각해볼 문제는 박시온을 연기하는 주원과 김도한을 연기하는 주상욱의 연기 행보일 것이다. 이 드라마가 끝난 후, 배우로서 이 둘이 자리하는 위치는 사뭇 달라질 전망이다. 한마디로 ‘굿닥터’는 주원에게는 약이 되고, 주상욱에게는 독이 될 확률이 크다는 얘기다. 이렇게 단정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맡은 캐릭터의 차이에 있다.
주원은 자폐증을 앓는 장애인 연기를 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천재적인 능력을 지닌 모습도 보여야 했다. ‘서번트 신드롬’을 지닌 자에 대한 그의 철저한 연구는 완벽한 연기로 빛을 발했다. 시청자들은 첫 회에서 보여준 주원의 연기에 완전히 매료되었고, 연이은 호평을 보내고 있다.
과한 칭찬이 아니었다. 언제나 불안한 그의 동공,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떨리는 손가락, 지나치게 빠른 말투와 기복이 심한 톤의 높낮이. 박시온은 누가 봐도 ‘서번트 신드롬’에 걸린 장애인이었다. 참으로 변화에 능숙한 배우 주원이다. ‘각시탈’에서의 카리스마, ‘7급 공무원’에서의 코믹 캐릭터를 넘어 전혀 새로운 역할에 또 다시 몸을 던진 그다. 선택을 잘했고, 또 그에 준하는 연기도 일품이다. ‘굿닥터’가 끝날 무렵, 주원은 또 하나의 멋진 수식어를 달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그에 비해 주상욱은 밋밋하기만 하다. 김도한이라는 캐릭터 역시 냉철하고 이성적이며 남자다운 매력이 있지만, 주상욱의 필르모그래피를 놓고 보면 그렇게 도움이 되는 캐릭터가 아니다. 실장님, 본부장님에서 벗어나긴 했어도, 배우 주상욱이 지닌 고정된 이미지를 깨부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다. 연기를 아무리 잘해도 묻힐 수밖에 없는 캐릭터다. 더군다나 상대가 ‘서번트 신드롬’이다. 이미 출발선이 다른 상황을 주상욱은 넘어설 수 있을까?
물론 주상욱이 어떻게 이를 극복하느냐에 따라 얘기는 달라질 수 있다. 카리스마가 서서히 드러나는 캐릭터라 지금은 기다려야 하는 타이밍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주원이 연기하는 박시온만 보인다. 거기에 그의 파트너는 차윤서(문채원 분)다. 진서연보다, 최강희보다 훨씬 어울리는 여배우라고 지금부터 난리법석이다. 이들의 케미가 엄청난 화학작용을 발휘하게 되면 전세는 지금보다 더욱 기울어질 수밖에 없을 테다.
주원과 주상욱의 차이는 연기력이라기보다는 그들이 맡은 캐릭터 자체의 차이다. 누군가는 늘 변화를 꿈꾸고 다소 버거운 역할을 자처한다. 또 누군가는 꽤 안정된 행보로 기반을 다져 나간다. 누가 옳다, 그르다 할 수 없다. 다만 주상욱에게 이제는 새로운 연기를 시도할 만도 하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다음 작품에서의 캐릭터 선정에 고심이 필요한 때다.

대중문화에 대한 통쾌한 쓴소리, 상쾌한 단소리 http://topicasia.tistory.com/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