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김남길 분)가 죽었다. 김준으로 돌아왔던 이수가 죽었다.
한 조각의 생존에 대한 미련을 남기지 않기 위해, 총알은 목을 관통했다. <상어>란 드라마를 따라왔던 사람이라면, 이승의 세계에 이수를 위한 자리가 별로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예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10년 만에 만난 해우(손예진 분)를 사랑하지만, 그녀의 곁에는 그녀를 여전히 지키고자 하는 준영이 남아있다. 그리고 이수는 복수를 하기 위해 살인조차 마다하지 않았다. 게다가 동생에게는 '간'이 필요하다. (물론 꼭 간은 죽어서 주는 건 아니다) 동생과 다시 행복하게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이수의 삶을 견인해온 복수도, 사랑도 이젠 이수의 몫은 끝났다. 그저 담담하게 죽을 사람이 죽었으니 하며 드라마를 바라보다, 이제야 이수가 친구라는 걸 안 오랜 친구 동수가 수술실로 들어가는 이수의 손을 잡고, 이수를 목 놓아 부르는데 울컥한다. 해우가 '이수야, 사랑해'라던 순간에도 올라오지 않던 감정이 솟아오른다. 비로소, 헤집어 보게 된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와 복수를 위해 살아갔던 한 남자의 삶을. 드라마 내내 김준이 되어, 온갖 감정을 드러내 보였던 이수였지만, 정작 드라마를 통해, 그의 삶이 안쓰러워진 건 동수의 통해 이수의 이름이 불린 때다.
해우도 마찬가지다.
마지막 회 해우는 엄청난 일을 저지른다. 자신의 가계, 할아버지가 저지른 엄청난 죄과를 대신 사죄하기 위해, 호텔과 자신의 직업이 날아갈 지도 모를 할아버지의 과거를 세상에 알린다. 무시무시한 영향력을 가진 할아버지가 공식적 채널을 덮자, 비공식적 채널을 통해 알리고, 증거가 부족하다 하자, 할머니의 유품 속 사진마저 세상에 던진다. 주저함도, 거칠 것도 없이, 자신의 가계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상어>가 20회를 통해 결국은 성취하고자 했던, 해우가 자신의 집안을 무너뜨리면서까지도 속죄해야만 했던 의미는 묵직하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청산되지 않은, 과거라는 어둠 속에 묻혀진, '역사'를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잡혀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당당한 할아버지의 외침처럼,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후손들의 더 나은 삶이란 미명 하에 포장된, 왜곡된 역사는 바로 잡아져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자 한다. 틈만 나면 사죄하지 않는 일본에 대해 감정적 분통을 터뜨리는 건 자연스럽지만, 숨겨진 '학살'과 약탈의 기록들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소리 없이 스러져 가는 것에는 무감한 현재의 우리에게, 잘 살게 해주었다는 이유만으로, 대통령이 '사실'인 과거조차 눈감고 외면하려고 하는 현재의 우리에게, 뒤틀린 역사의 왜곡이 어떻게 살아남는가를 '조명국'이란 상징적 근대인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 그리고 끝내 이수조차도 죽이고 미소를 짓는 그를 통해, 과거의 역사가 여전히 현재의 악이 되어 우리 곁에서 숨 쉬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런데, 마지막 회를 통해 완결된 <상어>의 주제 의식은 이해는 되지만, 감동이 부족하다는 데 이 드라마의 딜레마가 있다. 이수와 해우의 사랑이 그렇듯, 하지만 그 치명적인 운명에 공감하기 힘들 듯, 드라마 속 인물들은 묵직한 주제를 전달하기 위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치명적 스토리에 헌신적으로 복무하는 듯하지만, 그것이 가슴을 떨리게 하는 데는 어딘가 1% 부족한 듯한 느낌인 것이다.
이수와 해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복마전과도 같은 역사적 인물을 무너뜨리기 위해, 그의 손녀가 그가 없애고자 하는 인물과 사랑을 하게 되는 설정이 가장 극적이긴 하지만, 과연 두 사람이 살아있는 캐릭터로 펄떡거렸는지, 혹시나 가장 극의 중심에서 운명을 고뇌하며 고난에 빠져들었던 주인공들조차, 그저 묵직한 주제를 전달하기 위한 효율적 수단으로만 이용된 건 아닌지, 이수의 죽음을 당연시하며 받아들이고 있는 이 지점에서 다시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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