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이 2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정원 국조특위에서 박영선 민주당 의원의 발언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왼쪽부터 권성동, 김진태, 조명철 의원이다. (뉴스1)
국정원 선거개입 문제를 둘러싼 새누리당과 조선일보의 적반하장식 공세가 점입가경이다. 새누리당 국정원 국정조사 특위위원인 김진태 의원은 29일 국회 정론관에서 브리핑을 열고 국정원 사건을 담당한 진재선 검사에 대해 "과거 학생운동 전력만을 가지고 이러는 것이 아니라 최근까지 좌파단체 활동을 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공소장을 쓴 주임 검사는 운동권 출신"이라며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근본을 위협하는 사태"라고 말했다.
이는 반박할 가치도 없는 엽기적인 주장이다. 소위 진보진영의 인식이 아니라 가장 보수적인 가치를 통해 판단해 보아도 그렇다. 검찰은 헌법상 독립된 국가기관이고, 검사 동일체의 원칙에 따라 개인의 권한행사를 제약하고 있다. 검사 개인의 정치성향을 문제삼는 김진태 의원이야말로 검사 개인에 대한 인권침해를 행하고 있는 것은 물론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으로서 갖춰야 할 헌법과 체제와 절차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감도 없는 셈이다. 우리의 체제가 민주주의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지금 그 체제의 근본을 흔들어 대는 건 누구란 말인가?
하지만 김진태 의원의 발언은 일개인의 돌출된 발언이 아니라 이 나라 보수세력의 일반적인 인식이란 것이 큰 문제다. 새누리당 의원이 이런 식으로 발언할 수 있는 건 이런 종류의 ‘색깔론’에 조중동 등 보수언론이 적극 동조해주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러는 것이 하루 이틀의 일도 아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이었던 지난 2009년 3월에 신형철 대법관이 2008년 촛불시위 참여자들 관련 재판에 개입했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당시 경찰이 촛불시위 참여자들을 무더기로 고발하자 사법부의 업무는 과중해졌고 그것을 견디지 못한 몇몇 판사들이 집시법 야간 옥외집회 금지 조항에 대한 위헌제청을 내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런 경우 관례적으로 해당 법률조항과 관련된 사건은 심판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게 되는데, 당시 신형철 대법관은 판사들에겐 이메일을 보내 ‘현행법에 의하여 통상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이는 재판에는 누구도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헌법에 규정된 법조인의 기본자세를 부인하는 처사였다.
▲ 지난 2009년 3월 6일자 조선일보 12면 기사
또한 신영철 대법관은 재판개입 논란에 대해 국회에서 전혀 그러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행동은 정권인사와 교감하지 않은 순수한 개인적인 행동으로 보더라도 사법부의 권위를 훼손하고 입법부의 권위를 스스로 능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2009년 9월 24일에 해당 조항이 결국 헌법불합치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법조인의 식견의 측면에서도 옹호하기 힘들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근본을 위협하는 사태"라는 말은 이럴 때 사용하는 것이 적합했다.
▲ 지난 2009년 3월 6일자 조선일보 12면 기사
하지만 당시 조중동은 어땠던가. 신형철 대법관을 비판하는 이들 중 상당수가 ‘우리법연구회’ 출신 판사들임을 증명하려고 애썼고, ‘우리법연구회’ 출신들의 성향이 운동권적이라고 묘사하는데 급급했다. 사법부 내 좌파들이 좌파 매체와 협력하여 사법부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현실인식이었다.
그들이 정말로 민주주의 체제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헌법적 가치에 동의하는 이들이었다면, 이렇게 행동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이 신주단지처럼 여기는 국가의 권력이 정당한 근원에서 나오는지 감시해야 했고, 통치자들의 자의성이 국가 권력을 침해하는 현상을 극렬 비판해야 했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를 관통하는 집권 여당과 보수세력의 체제에 대한 인식은 이처럼 거꾸로 뒤집혀 있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는 별다른 관련이 없고 기껏해야 ‘반공주의’를 가리킨다. 경제체제의 이름인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가 우리의 정치체제를 구성한다고 믿는 황당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반공주의도 시민들이 공산주의에 현혹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시장경제를 적절하게 규제하고 공정한 경쟁을 만들어내며 빈부격차를 줄인다는 식으로 추구된다면 나쁜 이념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내세우는 반공주의는 이 사회의 시민들이 전근대 왕조국가 수준으로 퇴행한 제 인민을 굶기는 수준의 체제에 투항할 거라는 강박관념 속에서 그런 이들을 ‘색출’ 및 ‘제거’해야 한다는 6.25 전쟁 당시 ‘학살자’들의 심리에 기반하고 있다.
▲ 지난 2009년 3월 7일자 조선일보 8면 기사
결국 그들이 생각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체제의 재생산 구조를 통해 민주적인 권력을 산출하는 체계가 아니다. 그저 ‘좌파’라는 불순물들을 끊임없이 솎아내야 유지되는 일종의 정수처리장에 불과하다. 그들은 4대강 사업에서만 물길을 막아야 수질을 관리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진 것이 아니라, 사상의 시장에서도 그것을 통제하고 불순물을 걸러내야 사상이 건전하게 유지될 거라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이 나라의 보수주의자란 사람들은 한국 사회가 북한 김정은 체제가 결코 통치할 수 없는 수준으로 발전한 것은 그 경제발전 뿐만이 아니라 민주화의 덕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설령 남한 사회에 김정은 체제가 민족적으로 정통성있고 자주적이라고 믿는 이들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들조차 김정은 체제 안에서 만족하며 살 수 없고 그들이 북한에 가면 북한주민들이 그들이 당연시하는 자유의 향기를 느끼며 동요할 거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젊어서 사회주의자였던 조선일보의 극우논객 류근일은 지난 30일에 실린 칼럼에서 “한국 현대사는 아직도 80년대의 악몽에 가위눌려 있다”고 썼다. 1980년대 전두환과 386운동권 NL 세력이 적대적 공생관계에 있었다는 진단에는 동의할 수 있다. 조선일보조차 전두환 독재는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현상은 하나의 진전이라고 할만하다.
하지만 아직도 야권의 배후에 ‘386운동권 NL 정서’가 숨어 있고 노무현-김정일 ‘NLL 회의록’이 삭제된 것도 그 때문이라고 지적한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어긋난 현실인식이다. 물론 조선일보와 새누리당이 독재정권을 옹호하고 운영한 전력 때문에 아직도 민주주의를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야권의 많은 정치인들이 과거 운동권 정서의 잔영을 가지고 있고 다서 과도한 민족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거기엔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NLL 회의록’의 경우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후임 대통령의 열람을 위해 국정원에 보관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는데, 이런 증언은 쏙 빼고 마치 NL적 시각을 지우기 위해 삭제를 했다고 몰아간다면 언어도단이다.
▲ 지난 30일에 조선일보 30면에 실린 류근일 칼럼
조선일보가 박정희와 전두환을 찬양했던 과거를 지니고 있고 현재도 민주주의 원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거란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현재 조선일보가 군부쿠데타를 종용하고 있다거나 전재국을 황제로 추대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선동한다면 이는 증거없는 흑색선전이며, 뻔뻔스러운 거짓말에 가까울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박정희의 딸’이며 권위주의적 정치태도를 지니고 있지만 6공화국 헌법에 의해 통치할 수밖에 없는 그녀의 당선이 ‘유신시절의 부활’이라는 수사법 역시 무리하다.
보수진영은 이것들이 흑색선전이며, 무리한 수사법이라는 딱 그 판단기준을 그대로 자신들의 선동적 주장들을 점검해봐야 한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및 야권세력을 별다른 근거도 없이 종북으로 몰아붙인다거나, 그들이 NLL을 무력화하고 북한에 영토를 넘기려고 한다는 주장에 윗 문단에 나오는 흑색선전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그들은 야권에 대해 1980년대를 벗어나라고 주문하기에 앞서, 친북좌파를 색출해야 나라가 유지된다는 1950년대에 형성된 그들의 정신적 외상부터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다. 20세기를 거쳐 경제성장과 민주화에 모두 성공하고 복지국가를 향해 나아가는 한 나라의 보수세력의 기치가 ‘반운동권’에 불과하다면 얼마나 우습고 처연한 일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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