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의 고질병 3대 요소로 불치병, 기억상실증, 그리고 출생의 비밀을 꼽을 수 있다. 최근 멜로드라마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SBS 수목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불치병을 제외, 기억 상실증, 출생의 비밀이라는 진부한 요소를 모두 안고 있다. 하지만 다른 드라마 같았으면 볼멘소리가 터져 나올 법한 이 진부한 요소들이, 이상하게도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는 색다르게 다가온다. 도대체 왜일까?

요즘 여성들의 로망 이종석이 맡고 있는 박수하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초능력을 가진 청년이다. 그런데 수하는 장혜성 변호사의 엄마(김해숙 분)을 처참하게 살해하고도 무죄 판결을 받은 민준국(정웅인 분)과 정면 대결 이후 잠시 기억과 초능력을 함께 잃게 된다.

수하의 기억과 초능력은 곧 다시 돌아왔지만, 혜성 곁에서 사라진 지난 1년간 수하의 기억을 지워버려야만 했던 제작진의 설정에 적지 않은 의문을 가질 법도 하다. 하지만 이 모든 의문에 대한 해답을 가진 민준국은 머지않아 다가올 대망의 클라이맥스를 오싹하게 장식하기 위해 꽁꽁 숨어있는 상태다.

그러나 수하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제작진은 '기억상실증'이라는 요소를 삽입한 데에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제시하였다. 때로는 보았던 것조차도 송두리째 잊고 싶은 과거. 언제라도 혜성과 수하 앞에 나타나 그들을 위협할 민준국의 존재와 그와 얽힌 악연이야말로 지워버릴 수 있다면, 완전히 날려 버리고 싶은 기억이었다.

때로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선의의 거짓말이 세상을 이롭게 한다고 믿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자기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세상에 태어난 이상, 불편하더라도 자신이 거부하고픈 진실과 맞닥뜨려야 하고 인정해야 한다. 지난주부터 주요 에피소드로 등장한 서도연(이다희 분)의 출생에 얽힌 비밀이 바로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었다.

그동안 대한민국 드라마에 끊임없이 등장하던 '출생의 비밀'은 대개 주인공의 신분 상승과 관련이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그 반대의 출생의 비밀을 보여준다.

서도연의 친부 황달중(김병옥 분)이 자신의 친딸을 찾겠노라고 전면에 등장하기 전까지, 서도연 검사는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까지는 아니지만 판사 아버지, 의사 어머니 사이에서 귀하게 자란 엄친딸이었다. 부장판사 출신 아버지 후광도 없지 않았겠지만 서울대 법대 수석 입학에서부터 사법 연수원 수석 졸업까지 엘리트 코스만 밟아온 서도연은 예쁘기까지 하다. 집안, 직업, 외모 어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엘리트 검사 서도연은 하나에서 열까지 악연으로 점철된 장혜성과 강력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한다.

개천에서 용난 서민의 희망 짱변과 달리, 법조인의 운명이 자연스레 결정되었던 서도연은 미모에서 풍기는 도도함과 더불어 과거 박수하 아버지 살인사건을 목격하고도 재판 직전 증언을 포기한 일, 억울하게 혜성에게 누명을 씌운 것을 시작해서 잘나가는 검사로서 국선 변호사 혜성을 약 올리다가 막판 화해하는, 평범한 악녀에 머무를 줄 알았다.

하지만 서도연에게는 드라마를 뒤흔들만한 반전 임무가 준비되어 있었다. 타고난 법조계 로열패밀리인 줄 알았던 서도연은 자신의 양아버지 서대석(정동환 분)의 무고한 판결 때문에 26년 동안 무고한 옥살이를 하였던 황달중의 딸, 황가연이었다.

법조계 로얄패밀리라는 자부감으로 똘똘 뭉친 서도연의 출생의 비밀에 고소함을 느낀 것도 잠시, 장혜성은 서도연에게 진실을 알리는 과정에서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26년 만에 검사와 피고인이라는 얄궂은 운명으로 친아버지와 재회한 서도연. 자존심 때문에 친부가 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녀는 결국 유전자 검사를 통해 황달중이 자신의 친아버지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눈물을 흘린다.

그럼에도 서도연은 검사로서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자신의 생부를 살인 미수죄로 기소한다. 재판에서는 애써 강한 척 했지만 도연 또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마음속에 밀려오는 죄의식과 죄책감을 참고 참다 결국 화장실에서 오열하기에 이른다.

출생의 비밀에 넘어, 자신의 친부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를 살인 미수죄로 기소해야 하는 도연의 운명은 쌍둥이 사건을 능가하는 심각한 딜레마를 보여준다. 양아버지 서대석의 잘못된 판결 때문에 26년 동안 감옥에 갇힌 생부, 하지만 자라면서 판사 양아버지 덕을 많이 받고 자란 도연은 서대석을 쉽게 원망할 수 없다. 게다가 도연은 검사로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자신의 친부를 기소한다.

분명 장혜성의 말대로 모든 진실을 알고 있음에도 양부의 실수에 침묵하고 검사로서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 기어이 친부를 기소하고자 하는 도연의 행위는 잘못되었다. 하지만 친부를 기소하고 자신의 양부의 잘못에 입을 다물고 있으면서도, 속으로는 흐느껴 울며 진심으로 혜성에게 자신의 친부를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도연을 두고, 이기적이고 비윤리적이라고 쉽게 비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도연의 출생의 비밀 선에서 자신에게 불편한 진실을 쉽게 인정하지 않고, 계속 남들에게 자신의 비밀을 숨기고자 하는 사람의 이야기로 끝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아버지 때문에 민준국의 아내가 죽었다는 걸 알지만 이를 차마 장혜성에게 알리지 못해, 서도연의 비밀과는 차원이 다른 후폭풍이 예상되는 박수하의 이야기로 확장시킨다. 이제 장혜성, 박수하, 그리고 민준국의 끝장 대결만 남은 <너의 목소리가 들려>. 아쉽게도 불과 3회 밖에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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