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휘날리며>에서 가장 의아스런 장면은 이 영화의 결말이다. 노인이 된 오늘의 진석이 형의 유골 앞에서 오열하는 장면으로 끝날 듯하다가, 곧이어 한국전쟁 직후에 집으로 돌아온 청년 진석이 그의 가족들과 만나는 장면이 등장한다. 카메라는 공중으로 솟아오르며 황량한 폐허 한가운데 홀로 남겨진 진석의 모습을 비춘다. … 동기야 무엇이건 이 인상적인 결말은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 전체를 하나의 이미지로 수렴한다. 그것은 홀로 남겨진 소년이라는 이미지다.”
 
-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 (허문영 지음) 중, ‘한국영화의 소년성’ - 씨네21 2004년 446호 발표 - (이하 본문, 모든 인용의 출처)
허문영 영화 평론가는 일찍이 <태극기 휘날리며>의 마지막 장면을 거론한 적이 있다. 그는 이 장면을 “홀로 남겨진 소년의 이미지”라 묘사했었다. 한때 한국영화의 자의식이 ‘홀로 남은 소년의 이미지’를 맴돌았다고 지적했다. 허문영 평론가는 이를 ‘소년성’이란 개념으로 압축했었다. <친구>, <공동경비구역 JSA>,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2000년대 초반 천만 영화 시대를 열었던 흥행작 네 편에도 이 함의가 면면히 배어있다 설명했다.
 
이 영화들의 주인공은 “위대한 영웅이 아니라, 가련한 소년”이었다. 소년들은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거나 고뇌하지 않았다. 공동체가 발출하는 기압에 휘청 대면서도 공동체 바깥에 자의식의 뿌리를 내렸다. “성공한 한국 대중영화들에는 영웅성의 자리를 소년성이 차지하고 있다”. 여기서 소년성은 “주인공들의 신체 연령이 아니라 영화의 이야기 속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욕망과 그들이 맺는 관계의 성격을 지칭”한다. 허문영 평론가는 몇 가지 정황을 들어 “홀로 남겨진 소년들이 서서히 떠나”가고 있다 결어를 맺었다.
 
작년 개봉한 <건축학개론>은 이 소년성으로 진단할 때 흥미로운 영화다. <건축학개론>은 소년의 첫사랑을 복원한 에필로그다. 2000년대 소년성의 서사와 차이가 있다면, <건축학개론>의 승민은 소년으로 남지 않고, 성장을 완수한다는 점이다. 10년 전 ‘홀로 남겨진 소년’이 10년 후 돌아왔다고 대구를 지으면 재미있는 그림이 그려진다. 이것이 일종의 인과관계일 순 없겠지만, 모종의 징후적 독해는 가능하다. 현재 한국영화 산업과 관객 수요란 더 큰 그림의 획과 선으로서 말이다. 물론 <건축학개론>이란 영화 한 편이, 대단한 함량이나 전적인 설명력을 지니고 있진 않다. 나는 이 영화를 프리즘이나 필터로 사용하려 한다. 이렇게 말해보자. <건축학개론>은 한국영화 연대기를 종단한, ‘소년’ 영화와 ‘소년’ 관객의 동반자적 회고담이다.
 
허문영 평론가는 소년성의 증상으로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 “아버지의 부재” 둘째, “사라지는 여인들” 셋째, 유사 가족적 형제애. 예컨대, 그는 이렇게 분석하였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두 형제에겐 아버지가 없고, <실미도>와 <친구>에선 짧게 언급되는 '기능'이며, <공동경비 구역 JSA>의 서사 설정에서 삭제돼 있다. <친구>와 <실미도>가 그러하듯, 한국 영화의 소년들에게 여성은 “성욕의 대상인 동시에 미지의 이름”이다. 여성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거나 성기만” 쳐다본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어머니는 말을 잃은 인물이며, 진태의 약혼녀 영신은 오직 희생자로 그려진다. '오래두고 가까이 사귄 벗' <친구>, <태극기 휘날리며>의 거의 동성애를 방불케 하는 형제애, <공동경비 구역 JSA> 네 병사의 우정과 <실미도> 북파요원들의 목숨을 건 동지애는 소년성의 마지막 표찰이다. <건축학개론>엔 이 세 가지 증상 모두가 열꽃을 피우고 있다. 2004년에 개진한 견해를 허문영 평론가가 아직까지 견지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이 개념이 최소한 어떤 지표는 될 수 있다 여긴다. 그가 설정한 개념을 이어받아, 소년의 성장을 추적할 것이다.
 
소년성의 증상들
 
<건축학개론>의 승민에겐 아버지가 없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없다’. 단 한 번도 아버지가 보이지도 언급되지도 않는 부성의 진공세계. 관객은 그저 요절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가족을 부양할 가장의 부재는 경제적 궁핍을 의미한다. 90년대 시퀀스의 승민은 자존감을 헐벗은 채 자격지심에 시달린다. 강북의 국밥집과 강남의 오피스텔. 세련된 바람둥이 선배와 ‘짝퉁’ 티셔츠를 걸쳐 입은 승민. 승민의 미성숙은 남근의 부재, 아버지와 돈의 부재다. 영화는 승민을 계급적 곤경에 밀어 넣는다. (이는 승민의 옹졸함에 감독이 쥐어준 면죄부다.) 아버지는 부재하지만, “공동체의 흔적” (사회적 가난의 내리물림)으로 존재한다. 관객과의 사회적 공감대를 틔우는 설정이다. <건축학개론>은 '소년'이 남근을 장착하고 '내 여자'에 대한 지배력을 확인하는 가부장적인 성장담이다. (서연에게도 승민은 첫사랑이었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승민은 번듯한 직업과 젊고 부유한 약혼녀를 얻은 상태이다.)
 
근대적 가부장제의 여성혐오는 ‘성녀’와 ‘창녀’의 이분법으로 구획된다. 여성은 성기, 아니면 순결이다. 또는 더럽혀진 성기이거나, 더럽혀지지 않은 성기다. 승민은 서연을 올곧게 바라보지 못한다. 서연이 ‘성녀’인지 ‘창녀’인지 끝없이 의심하고 불안해한다. (이 점에서 <말죽거리 잔혹사>와 닮았다.) 서연이 아직 ‘썅년’(돈 많은 선배와 간음하는 ‘창녀’)이 아닌 ‘성녀’일 때, 나머지 환멸스런 감정을 무작정 어머니에게 투사한다. 결국엔 첫사랑이 좌초하자, 분노하며 ‘썅년’의 낙인을 서연에게 찍는다. 서연과 해후한 자리에선 여전히 그녀가 ‘썅년’인지 음험하게 찔러본다. (“남편이 돈 많이 벌었나봐, 제주도에 집도 짓고”)
 
승민의 어머니는 승민의 소년성에 어스름한 자장을 덮고 있다. 오이디푸스 삼각형의 한쪽 모서리가 붕괴돼 있을 때, “근친상간을 금한 아버지의 법이 미약”하므로 “소년의 욕망은 충분히 억압되지” 못한다. 승민의 어머니는 억척스러운데다, 우악스럽고, 교양이라곤 찾아 볼 길 없는 시장바닥 여편네다. 세상의 모든 아들이 어머니에게 품는 근원적인 수치심과 혐오감을 건드리는 구석이 있다. 근친상간적 죄의식의 궤에 올라탄 설정이다. 승민의 어머니는 과거와 현재 모두에서, 문득 출현하고 언급되며 그림자를 드리운다. 서연에게 숨기고 싶은 허물이며, 그리하여 승민의 남근을 시들게 하거나, 나이를 먹은 후에도 성장 없음을 반증하는 ‘구멍’이다. 첫사랑의 외상이 귀환하고 승화될 때 까지, 승민을 ‘소년’으로 묶어 두는 올가미다.
 
승민에겐 형제가 없다. 대신 납득이가 있다. 최신 패션 아이템 무스의 사용법과 여자에 대한 지식을 전수하며, 납득이는 승민에게 세상을 알려준다. 첫사랑에 설레고 방황하다 주저앉은 모든 소년들에게, 납득이는 최고의 친구이자 최고의 '형제'다. 승민이 서연과 거리를 좁히는 매 걸음 후에, 납득이는 홀연히 출몰한다. 좁혔다 여기는 간격을 벌리면서, 자학적인 환상을 지탱해준다. (“그게 키스냐?”) 한편, 우스꽝스런 어드바이스를 퍼부으며 이성애적 욕망을 들쑤신다. (“키스는 이렇게 하는 거야. 혀를 섞어, 존나 섞어…”) 종국에는, 산산이 깨어진 환상에 절망하며, 실재의 혹독함에 울부짖는 소년을 어루만진다. ‘썅년’이란 딱지까지 대리 발행하며 승민의 죄책감을 덜어준다. 대체로 리얼리즘적인 드라마 내에서, 납득이는 유독 불거져 나온 캐리커처 같은 인물이다. 그 이질감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랑을 받은 데엔, 코믹한 캐릭터 외에도 분명한 내막이 있는 셈이다.
 
10년 전의 소년성과 <건축학개론>의 소년성이 다른 점은 형제애와 이성애의 자리 배치다. 과거 소년성의 중핵은 “형제애의 비극적 실패”였다. <건축학개론>의 정서적 동력은 형제애의 실패가 아닌, 첫사랑의 파국이다. 납득이는 유사-형제로서 승민을 떠받치는 축이지만, 어디까지나 철저한 주변인이다. 드라마는 승민과 서연을 두 개의 바늘구멍 삼아 짜여 있다. 이는 장르의 특성상 자연스런 귀결이지만, 회고담의 플롯과 첫사랑이 결합하며 이야기가 보편화된다. 소년성의 계보 안에서 파악할 때, 여자를 모르던 소년이 여자를 경험하는 '성장'의 표징이 뚜렷이 현현한다.
 
소년들은 어디로 갔을까
 
허문영 평론가는 “한국영화 르네상스가 시작된 1990년대 후반부터 소위 천만관객 시대가 개막된" 2004년 무렵까지를 “젊은 감독과 젊은 관객의 밀월기”라 정의한다. 이 밀월의 근간은 60년대 생 감독들과 7,80년대 생 관객이 공유한 ‘소년성’이라 분석했다. “가족 관객 시대가 끝나고 청년 관객의 비중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1960년대의 미국”과 마찬가지로 한국영화의 황금기는 젊은 관객과 “가장 넓은 의미의 성장영화”가 어깨를 걸고 개간한 대지였다. <친구>, <말죽거리 잔혹사>, <공동경비구역 JSA>,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허문영 평론가는 한국 영화가 '홀로 남겨진 소년'들을 서서히 떠나보내고 있다 말했다. 그는 <효자동 이발사>, <바람난 가족>을 거론하였으나,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거시적이고 시계열적인 조망이 필요하다. 소년들은 과연 어디로 갔었던 걸까.
 
2000년대의 ‘소년’들은 이제 '청년'이 되었고 장년이 되었다. 관객들은 나이를 먹으며 극장과 멀어진다. 이들을 꾀어내기 위해선 영화도 나이를 먹어야 한다. 여기엔 우선 관객이 동일시를 의탁할 재현 주체의 문제가 섞여 있다. 한국 영화배우군 안에선 세대교체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 90년대, 2000년대 초에 데뷔한 스타 배우들이 아직까지 티켓 파워를 휘두르고 있다. 어른이 된 '소년'들은 과거 중장년 관객에 비해 상업 영화와 내밀한 친연성을 지닌다. 현재 주연 급 남자 배우들은 대부분 30대에서 50대이다. 그들의 육체를 캐릭터화 시키는 영상 서사 역시 나이 들 수밖에 없다. 또한 영화 산업이 고도화되는 국면에선, 충분한 수익을 거두기 위해 반드시 세대와 성별을 아울러야 한다.
 
2006년 이후 충무로엔 어둑시근한 불황의 바람이 몰아닥쳤다. 그를 전후하여, 한국 사회 세대구성엔 중대한 변곡점이 발발한다.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 2000년도의 연령별 인구는 대략, 20대 820만, 30대 850만, 40대 690만, 50대 435만이었다. (통계청 www.kostat.go.kr) 영화는 ‘소년’들과 동행하는 것으로 얼마든지 고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러나 허문영 평론가가 소년들이 떠나고 있다고 관측한 2004년, 20대 인구는 775만여 명으로 줄었다. 40대 인구는 810만여 명으로 증가하며 저울추가 반대로 기울었다.
 
2003년과 2004년 박스 오피스 탑 텐은 어리고 젊은 영화들이 득세를 이뤘다. 소년성의 영화,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말죽거리 잔혹사>. 그 외 <동갑내기 과외하기> <올드 보이> <오! 브라더스> <어린 신부>, <내 여자 친구를 소개합니다>, 귀여니 원작의 <늑대의 유혹>까지. 2005년과 2006년에는 비교적 세대 교차적인 포섭력을 지닌 영화들이 가세해 호황의 마지막 불꽃을 수놓았다. <괴물>, <웰컴 투 동막골> <가문의 위기 - 가문의 영광 2>, <가문의 부활 - 가문의 영광 3>, <미녀는 괴로워>, <투사부 일체>등. 그리고 2007년이 찾아왔다. 20대 인구는 2004년의 775만여 명에서 다시 40만여 명이 줄었고, 40대 인구는 35만여 명이 늘었다. 한국 영화는 해마다 터트린 축포에 들 떠올라, 우회상장을 일삼았다. 방만한 운영으로 대가를 치렀다. 이렇다 할 기획을 내놓지 못한 채, 불황의 미끄럼틀 위에서 속절없이 추락했다. 2008년 사상 최악의 수익률 -43.5%의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관객들은 떠나갔다.
 
이후 박스오피스 상단에선 본격적인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한다. 2008년 12월 개봉해 800만 관객을 동원한 <과속 스캔들>, 2009년 1000만 관객을 불러 모은 <해운대>와 800만 관객의 <국가대표>, 2010년의 550만 관객 <의형제>, 289만 관객의 <헬로 고스트>. 소년과 형제가 아닌, (유사) 가족관계, 직계 간의 유대와 가장들의 신파로 서사를 풀칠한 가벼운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다. (이 기간 동안, 어둡고 작가적인 색채를 머금은 봉준호, 박찬욱, 김지운의 기대작 <마더>(300만)와 <박쥐>(220만), <악마를 보았다>(180만)는 기대만큼의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2011년엔 ‘중년’의 추억을 재연한 <써니>가 800만 관객으로 흥행 2위에 올랐다. 2010년의 최고 흥행작 <아저씨>에선 <태극기 휘날리며>의 '소년' 원빈이 '아저씨'를 연기한 미묘한 징후가 드러난다. 한국영화는 이렇듯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자라고 있었다.
 
소년에서 가장으로
 
2012년은 대대적인 귀환의 해였다. 수많은 흥행작들이 등장했고, 두 편의 천만 영화가 탄생했다. 한국영화는 1억 관객이란 초유의 금자탑을 쌓았다. <댄싱 퀸>, <광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늑대소년>, 2013년 초의 <박수건달>까지. 세대 없이 즐길 수 있는 신파성 오락 영화들이 흥행의 꼭대기에 섰다. 그 대 역사役事의 주춧돌이 바로 7,80년 대 생 3,40대 관객의 약진이었다. <건축학개론>, <내 아내의 모든 것>, <후궁 - 제왕의 첩>, <부러진 화살>등 성인 취향의 영화들이 개가를 올렸다. 가족 코미디 사상 최초로 천만 관객의 기염을 토한 <7번방의 선물>에선 완연한 성장의 함의가 풀풀 묻어난다. 집계에 따르면, 작년 한국 영화 최대의 구매자는 30대였으며 40대는 20대를 제치고 제 2인자로 등극했다. 장년의 약진에 더해 50대 관객 까지 극장을 찾으며 전체 파이가 큰 폭으로 몸집을 불렸다. 이 물결은 면면히 이어져, 2013년 상반기 한국영화 누적 관객 수는 5555만 명이다. 작년 상반기의 4446만 명보다 무려 1100만 명을 앞서는 수치다. 이 흐름은 끊이지 않고 두텁게 물살을 탈 것이다. 극장의 권력은 ‘어른’에게 넘어갔다. 2013년 현재, 세대별 인구는 20대 675만, 30대 790만, 40대 850만, 50대 770만이다. (2000년 20대 820만, 30대 850만, 40대 690만 50대 435만)
 
<건축학개론>은 ‘첫사랑’이란 보편적 노스텔지어의 구름다리를 세우며 '소년'들을 극장으로 불러들였다. 젊은 영화와 젊은 관객이 가장 행복했던 영화산업의 중흥기. 불황의 전사, 호황의 마지막, 너와 나, 우리 모두의 ‘좋은 시절’ 90년대로 태엽을 되감았다. <건축학개론>이 내재한 소년성은 2000년대 영화의 소년성의 꼴과 닮았다. 장년 관객들이 ‘소년기’에 조우한 소년성의 서사를, 그로부터 10년 후 ‘어른’이 되어 맞이하고 반추한 것이다. <건축학개론>은 실패를 간직한 소년들의 회고담이요, 미망한 성장담의 에필로그다. (때문에, <건축학개론>은 서연에서 시작했다 서연으로 끝나지만, 사실은 승민이 주인공일 수밖에 없는 영화다.) <건축학개론>의 소년성이 물꼬를 튼 후, <7번방의 선물>, <남쪽으로 튀어>, <런닝맨>, <전설의 주먹> 등 - 더 멀리 포섭하면 <연가시>와 <베를린>까지 - ‘부성’의 서사가 뒤이어 쏟아져 나온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 영화들의 아버지들이 현실감각이 결여돼 있거나, 정신적 성장이 정체돼 있고, 소년기에 얽매여 있거나, 이른 나이에 가장으로 조로해 버려 소년성의 일말을 간직하고 있는 사실도 흥미롭다.
 
관객 수요는 세대별로 확장하는 동시에 성별을 따라 분화했다. 2013년 여성 관객의 예매율은 남성 관객을 앞선다. (52:48) 이에 따라 소년성의 서사가 변주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늑대소년>은 타자화된 소년을 소녀가 사육하는 ‘소녀성’의 영화다.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소년성을 대상화 하여 여성 관객들에게 흐뭇한 요깃거리로 바쳤다. <신세계> 역시 넓은 범주의 성장영화로 파악할 수 있는데, - 아버지(강과장)을 죽이고 권좌(조직의 보스)에 오르며, 여성은 그저 자궁일 따름이며(이자성의 아이를 배었다 유산하는 기능적 역할) 뜨거운 형제애(정청과 이자성)가 필름을 관통한다 - 일군의 여성관객들은 이 영화를 동성애적 테마로 비틀어 소비하였다. 90년대 시퀀스는 승민에게, 현재 시퀀스는 서연에게 시점을 할당하며, 형식적으로나마 성별을 배려하였단 점에서, <건축학개론> 역시 이런 흐름의 들머리 중 하나다.
 
<건축학개론>은 서연의 집을 쌓아올리며 과거를 재건한다. 기억을 호출하고, 사랑의 잔해를 인양한다. 너와 나, 우리는 서로에게 첫사랑이었다. 아니,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첫사랑은 영원한 실패의 낙인이다. 실패를 통해서만 사랑은 과거로 남는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일 때, 숭고한 영원성의 신기루를 휘감는다. 서연과 승민은 서로가 서로의 시작이요 사랑이었음을 확인하지만, 끝내 첫사랑은 실패해야만 한다. 두 사람은 맺어지지 않는다. 엇갈린 과거와 결별한 후 각자의 길 위에서 성장을 재개한다. ‘성녀’와 ‘썅년’ 사이에서 비틀거리며 오인받던 서연은, 결국 ‘성녀’로 승인받는다. 가부장제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배정받는다. (라스트 제주도 집 장면의 질펀한 가부장적 뉘앙스를 떠올려 보라) 승민은 드디어 어머니의 슬하를 떠나, 배우자와 미국으로 향한다. (성장을 지체시키던 오이디푸스적 애착관계에서 해방된다.) 새로운 가정을 꾸리며 가족을 편성해 ‘아버지’가 된다. 태극기 휘날리는 폐허에 남겨졌던 소년은 그렇게 어른이 되었고, 자신의 젊음에 송사를 바쳤다. 첫 번째 천만관객 시대를 견인했던 청년들은 가장이 되었다. 한국영화는 유례없는 대 흥행의 시대를 맞았다. 소년의 시대가 가고, 바야흐로 ‘가족관객’의 시대다.
 
필자> 일상과 세상의 경계를 모로 걸으며, 조심스레 두리번대고 글을 쓴다. 사회, 문화, 정치의 단층을 채집하여 살펴본 이면의 수런거림들을 블로그(blog.naver.com/yke0123)에 편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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