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동안 두 개의 진보정당의 당명에서 ‘진보’란 글자가 사라졌다. 21일 진보정의당은 당명을 정의당으로 바꾸고 단독 입후보한 천호선 최고위원을 당 대표로 선출했다. 같은 날 진보신당은 노동당을 새 당명으로 결정했다. 정의당은 사회민주당과 경합한 끝에, 노동당은 무지개사회당과 경합한 끝에 어렵게 결정되었다.

▲ 정의당 천호선 신임 대표가 21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진보정의당 2013 혁신전당대회에서 신임 당 대표로 선출된 뒤 주먹을 불끈 쥐어보이고 있다. 진보정의당은 지난해 10월부터 진행한 제2창당 작업을 마무리하는 이자리에서 당명을 '정의당'으로 변경하고 새 출발에 나섰다. (뉴스1)

진보정당, ‘탈(脫) 진보’에 이르기까지

이제 한국 사회의 정당들 중 당명에 ‘진보’란 글자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통합진보당 뿐이다. 통합진보당은 2012년 총선을 앞둔 2011년 12월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 그리고 진보신당에서 이탈한 통합연대 세 정파가 연합하여 출범했다. 총선 이후 이 정당은 비례대표 선거부정 논쟁과 이를 둘러싼 당권파와 비당권파의 대립 및 폭력사태 등으로 파행으로 치달았다. 결국 비당권파가 이탈하여 2012년 10월 진보정의당이 결성되었다. 이번에 진보정의당이 정의당으로 변함은 창당 당시 약속되었던 제2창당이 마무리 되는 수순으로 풀이될 수 있다.

한편 2008년 3월 민주노동당으로부터 이탈하면서 출발해, 2011년 9월 통합진보당에 합류하기 위해 통합연대가 이탈한 후 남은 진보신당은 2012년 총선을 앞둔 2012년 3월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던 진보정당인 사회당과의 합당을 이루었으나 총선에서 등록 취소되는 아픔을 겪었다. 진보정의당이 결성된 2012년 10월 재창당을 이루어낸 진보신당은 역시 비슷한 시기에 노동당으로 당명을 교체하며 새로운 역사로 접어들게 되었다.

‘진보’라는 단어가 참신함의 이미지를 상실하고 부정과 종북의 멍에를 쓰게 된 때에, 이 지리멸렬에 자신들의 책임이 없다고 믿는 통합진보당 외 두 개의 정당이 ‘진보’를 탈피하려 했음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당명의 유사함으로 인해 유권자는 물론 지지자나 일부 당원들마저 혼선을 빚을 정도였고 지난 대선 이정희 후보의 발언에 분노한 유권자들이 진보정의당이나 진보신당으로 항의전화하는 촌극을 빚기도 했기 때문이다.

▲ 22일자 한겨레 4면 기사

‘진보’란 말을 대체하기가 어려운 이유

하지만 ‘진보’라는 단어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소위 ‘진보진영’이나 ‘진보담론’이 이 대표적인 단어를 대체할 만한 무언가를 만들어냈는지를 묻는다면 긍정적인 답변을 하기 힘들다.

사상과 이념을 뚜렷하게 내세우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이도 실정을 잘 아는 질문은 아니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사상과 이념을 뚜렷하게 내세운 당명은 대중성을 상실한다는 차원의 얘기가 아니다. 보수주의가 강고한 한국 사회에서, 진보정당 운동은 제법 넓은 사상적 조류를 포괄하고 있으며 이를 한 두 단어로 설명해 내기란 무척 어렵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정의당과 경합한 것이 사민당이었고, 노동당 이전 논의되었으나 통과되지 못했던 것들이 녹색사회노동당이나 좌파당 등이었던 이유도 추측해볼 수 있다.

사민당의 경우 사회민주주의라는 이념을 내세워야 대중적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판단이 전제가 된 당명이었을 것이며, 다른 정치지향을 가진 이들에게도 한국 사회에서 진보정당이 유의미한 결과를 낼 수 있는 방향은 사민주의적 정책지향이라는 설득을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진 당명이었을 것이다. 정의당이란 당명은 이러한 판단이 공유되지 않았고, 그러한 설득이 실패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정치지향은 다르지만 진보신당이 노동당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제출되었던 좌파당이란 당명 역시 이와 비슷한 논리흐름에서 나왔고 비슷한 이유로 실패했다고 여겨진다. 한편 녹색사회노동당의 경우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서로가 선호하는 가치를 병렬적으로 나열하려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 당명은 약칭으로는 ‘노동당’을 제시하면서 다른 가치보다는 노동의 가치를 앞세웠음을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보신당 지도부의 정치력의 부족으로 당명으로 채택되는데 실패했다.

정의당의 문제 : 지향이 없는 당명?

위에 지적한 바와 같은 제반사항의 어려움이 있고 우여곡절 끝에 새롭게 등장한 당명이지만 ‘진보’를 제대로 대체할 수 있는 당명인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있다. 특히 ‘정의당’이란 당명은 비판받을 소지가 많다.

기본적으로 스스로 불의하다고 말하는 정치세력은 없는 만큼, 이 당명은 그 정치세력의 지향이 무엇인지에 대해 드러내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당명이 비판받을 이유가 없다면 새누리당이나 열린우리당, 국민회의 등등 기존 진보정당 운동의 종사자들이 비판해 왔던 ‘지향이 드러나지 않고 맹목적인 사회통합만을 강조하는’ 당명들도 비판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정의당’이란 당명에 가장 흡사한 성격의 당명을 상상해 본다면 ‘행복당’ 정도가 가능할 것이다. 사람들이 보편적 과제로 인지하는 것을 내세우고 어떻게 실현할지에 대한 지향은 드러내지 않는 당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나마 ‘행복당’이 대중 눈높이에 맞춘다는 느낌이라면, ‘정의당’은 자신들의 길만 ‘정의’라고 여기는 편협한 세력이라는 오해를 살 우려마저 있다.

당초 이 당명은 사민당의 유력한 경쟁자로 거론되지 않았는데, 사민당에 대한 ‘비토’ 심리에서 결정 일이주일 전부터 급부상하였고 결국 승리자가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정의당 내의 유일한 NL정파인 인천연합이 사민당 노선에 대한 반감에서 정의당을 밀었고, 참여계의 경우 전두환의 ‘민주정의당’에 대한 반감에서 사민당을 고수한 이들과 유시민 전 대표가 선호했던 ‘정의’라는 단어에 호감을 가진 이들로 분화되었다는 시선이 높다.

단지 당명이 지향을 드러내지 못하고 세련되지 못했다는 지적을 넘어, 이러한 의사결정 과정에서 드러난 운동진영의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여전한 반감, NL정파의 2/3(경기동부연합과 울산연합)가 통합진보정당에 남았음에도 정의당에서도 여전히 NL정파의 영향력이 무시못할 상황이라는 사실 등이 정의당의 앞으로의 행보를 걱정스럽게 하는 부분이라 평가할 수 있다.

▲ 22일자 경향신문 2면 기사

노동당의 문제 : 도돌이표, 진전은 있는가

한편 노동당의 문제는 2008년 민주노동당에서의 분당 이후 5년의 시행착오를 지나 노동당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이 도돌이표의 여정에서 진전이 있었는지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제반여건을 살펴보았을 때 냉정하게 본다면 진전보다는 퇴보만이 있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물론 노동당의 구성원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그들이 만들었고 가꾸었던 노동당을 자주파(NL)에 의해 뺏겼던 것이 가장 큰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도로 노동당’이 처한 현실이 만만하지가 않다.

민주노동당의 경우 정규직 노동조합인 민주노총의 지원이 큰 힘이 되었던 반면 그 한계와 틀을 깨고 나가지 못했다. 현재의 노동당의 경우 민주노총의 지원을 기대할 수도 없는데 그렇다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지지를 얻고 있는 상황도 아니다. ‘갑을관계’란 말로 표면화된 영세자영업자의 문제 역시 노동으로 사유해야 하지만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많이 부족하다.

또한 ‘녹색사회노동당’이나 ‘무지개사회당’처럼 좌절되거나 경합했던 당명들이 가졌던 문제의식, 노동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생태·여성·성소수자 문제 등 다른 의제를 품어내는 모습을 활동을 통해 증명해야 하는데 이 역시 녹록한 일이 아니다. 여건은 더 나빠지고 역량도 더 약화되었는데 요구조건만은 더욱 늘어난 것이 현 주소라고 봐야 할 것이다.

▲ 지난 6월 23일 오후 경기 과천시 중앙동 과천시민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2013년 진보신당 재창당대회'에 참석한 각계 인사들이 연대사를 발표하고 있다. 이날 진보신당은 당명을 '녹색사회노동당(노동당)'으로 변경하는 주문사항을 재창당대회 주요안건으로 채택했으나 아쉽게도 부결되었다.

다시, 진보의 ‘탈 진보’에 부쳐

그러나 이와 같은 ‘진보의 위기’ 상황은 하루 이틀의 문제가 누적되어 발생한 일이 아니다. ‘진보의 혁신’, ‘진보의 재구성’이 운위된지도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방향조차 명확하지 않은 실정이다. 진보는 사회에 대해 진보를 요구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진보하지 않으면서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진보세력이 별로 진보적이지 않도록 보이는 상황을 초래했다.

그 결과 우리는 진보의 ‘탈 진보’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할는지에 대해서도 합의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정의당 원내대표 심상정 의원이 얼마 전 북한편향과 노조편향을 반성해야 한다는 큰 틀에서는 동의할 수 있는 얘기를 했지만 이 편향을 보수진영의 ‘종북비판’과 ‘노동귀족’ 비판과 어떻게 다르게 극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는 부족하다. 또한 노동당의 경우 그동안 진보정당 운동의 한계에 대한 논의는 비교적 활발하게 일어났으되 발전전략을 당내에서 일관되게 실천할 수 있는 리더십이 아직은 부족한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정의당과 노동당이란 당명 개정이 ‘진보의 혁신’을 원하는 이들에게 이정표가 될 만하지는 않지만, 새출발의 전기는 마련했다고 평해야 할 것이다. 아직은 정의당에서 전두환의 ‘민주정의당’을 떠올리는 이들이, 노동당에서 북한의 ‘조선노동당’을 떠올리는 이들이 더 많은 형편이지만, 구체적인 활동 속에서 이 이름들이 다른 의미값을 가지게 될 가능성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 지금까지 논의된 문제들을 양당 정치인아 당원들도 모르는 것이 아닌 만큼, 차제에 더욱 깊은 고민과 문제제기를 통해 내용을 채워나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