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캐리비안의 해적이 뭍으로 올라왔다.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온 조니 뎁은 여전히 위험을 감수하는 ‘모험왕’이지만, 해적 선장이 아니라 인디언 톤토로 캐릭터가 바뀌어 어린 백인 아이에게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젊은 시절 자신이 론 레인저(아미 해머 분)와 겪은 모험담이 톤토 당대에만 머물지 않길 마음에서 백인 소년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론 레인저의 계보를 후대까지 이어가고픈 심정을 표현한다.

톤토 캐릭터는 <매트릭스>와 계보를 같이 한다. 어떤 차원인가 하면 모피어스(로렌스 피쉬번 분)가 네오(키아누 리브스 분)에게 네오가 살고 있는 세계가 진짜 세계가 아니라고 각성시켜주는 선각자적 계보 말이다. <론 레인저> 속 톤토 역시 모피어스와 마찬가지로 죽어가는 론 레인저의 목숨을 구해주고 그에게 영웅으로서의 정체성을 각성하도록 만들어주는 인물로 <매트릭스>의 선각자적 계보를 잇는다.

톤토에 비해 론 레인저는 일차원적인 캐릭터다. 사적 복수가 횡행하는 스크린에서 법의 심판대 앞에 범인을 세우기를 바라는 론 레인저는 어찌 보면 구시대적 영웅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형의 죽음을 갚을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법의 심판대 앞에 악당을 세우고자 하는 공정심 때문에 복수할 기회를 결정적으로 놓치고 마는 론 레인저를 볼 때면 사적 복수심에 이글거리는 톤토에게 차라리 감정이 이입될 정도다.

<캐리비안의 해적>은 해적 선장이라는 안티히어로의 영웅담만 담는 작품은 아니다. 초자연적 세계관을 다루고 있다. 망자의 상자 안에 담긴 심장 등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초자연적 세계관을 반영하지 않던가. 이러한 초자연적 세계관은 <론 레인저>라는 서부영화 에도 이식된다.

톤토와 론 레인저가 추격하는 부치(윌리엄 피츠너 분)는 론 레인저의 형의 목숨을 앗아간 사적 복수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자연계를 교란하는 생태계의 원흉이기도 하다. 론 레인저와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토끼를 굽는 톤토가 토끼 다리 한 쪽을 토끼 무리에게 던지자 토끼들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죽은 토끼의 다리를 우걱우걱 씹어댄다. 풀을 먹어야 마땅한 토끼가 육식하는 토끼로 변했기에 벌어지는 해프닝이다. 사람의 세계뿐만 아니라 생태계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부치에게 응징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성립한다.

톤토가 부치를 응징해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부족의 원수를 갚기 위함이라는 당위성 가운데에는 개발지상주의에 눈 먼 백인을 응징해야 한다는 당위성도 있다. 톤토의 부족이 몰살당한 까닭은 단지 그들이 유색인종이라는 인종차별적인 발상 때문만은 아니다. 탐욕에 눈이 먼 개발지상주의자들의 탐욕 앞에 인디언 부족 자체가 스러져 갔기에, 부치와 그의 일당들의 발걸음을 톤토와 론 레인저가 막아야만 하는 이유 가운데에는 형과 부족의 사적 복수뿐만 아니라 개발지상주의자들의 그릇된 가치관을 응징하는 차원도 포함한다.

활약상으로만 본다면 영화 제목은 톤토로 삼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주인공인 론 레인저는 정작 형의 아우라에 비해 싸움 실력이 떨어지는 수준이며,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톤토를 생명의 은인으로 고마워하기보다는 톤토의 사적 복수심에 론 레인저 자신을 끌어들인다는 오해만 하고 있으니, 육체적인 능력과 정신적인 성숙도 모두 톤토에 뒤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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