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의 모습 (뉴스1 자료사진)
어찌 보면 상식에 가깝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다. 서울지방고용노동청이 이마트노조 불법사찰 혐의 등으로 고발된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을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할 방침이라고 한다. 이 사건은 이마트가 지난 2010년부터 노조 설립 등과 관련해 직원 30여명을 사찰하고 직원들 성향을 분류해 감시했다는 이유로 민주노총과 이마트공동대책위원회 등이 지난 1월 정 부회장 등 신세계그룹 간부 3명과 이마트 전·현직 간부 및 직원 14명 등 17명을 고발한 사건이다.
20년만에 노동청에 소환된 재벌 총수
뉴스1 보도에 따르면, 서울지방고용노동청은 "정용진 부회장을 비롯해 고발된 17명 모두 노조법 81조 위반(부당노동행위)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불구속 기소 의견으로 송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서울고용청은 지난 1월 17일 이마트에 대해 특별근로감독을 시작한 이래 참고인 90여명을 소환 조사했고 지난 2월에는 서울 성수동 신세계 이마트 본사와 지점 6곳, 일부 이마트 직원 거주지 등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압수수색도 한 바 있다.
정 부회장 등의 이마트의 직원 사찰, 노조 결성 방해 등이 사실로 드러나면 부당노동행위로 2년 이하의 징역과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고 한다. 대기업 총수가 부당노동행위 혐의로 서울노동청에 소환된 것은 1993년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 이후 20년 만이며 처벌까지 받은 전례는 없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검찰 측의 기업수사의 강도가 높아진 상황에서 노동청까지 이례적으로 부당노동행위를 밝혀내기 위해 노력하는 상황은 재벌기업의 특권에 대한 행정부의 의지를 보여주는 데가 있다. 지난 6월 24일엔 고용노동부가 삼성전자서비스에 대한 협력업체 직원 불법 파견 논란과 관련해 수시 근로감독에 들어가기도 했다.
'국가의 왼손', 자본의 뺨을 때리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국가를 시장권력에 의해 포섭, 관리되는 국가의 오른손(경제 부처, 고위 관료)과 국민의 복지를 위해 지출하는 국가의 왼손(노동, 의료, 교육, 복지 등)으로 나누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선 고용노동부나 노동청과 같은 노동자를 편들어야 할 기관들도 흔히 기업들의 편을 들어왔다.
기륭전자 사태의 사례에서 고용노동부는 불법파견이 문제가 된 사측에게 ‘벌금 몇 백만원만 내면 그들을 해고해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친절(?)하게 확인시켜줬고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노동자의 가족들이 노동청에 산재인정을 문의하는 상황에서 어떤 공무원은 “삼성이 어떤 기업인데 그런 일을 합니까”, “삼성과 싸워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까”라고 말했다는 증언이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기업으로부터 훼손당한 자신의 권리는 찾으려는 노동자의 투쟁은 고립무원의 상황에 빠지기 십상이다.
결국 재벌개혁이든 경제민주화든 실행이 되려면 제도를 바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존의 제도들읕 의지를 가지고 실행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리고 당연히 그 실행의지는 행정부의 책임이 된다. 그러나 IMF 위기로 탄생한 ‘민주정부 10년’은 위기에 대응하면서 기업 위주의 질서를 때로는 받아들였고 때로는 자발적으로 선택했다. 그 결과 노동의제와 시민사회의제 사이에 균열이 발생했고 이는 노동운동과 민주정부 모두에게 부담이 되었다.
노동세력과 화해하지 못하는 재벌개혁의 한계
박근혜 정부의 경우 같은 보수정부지만 기업가 출신으로 대기업을 위하는 것이 경제를 위하는 것이라 여겼던 이명박 정부와는 다른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권위주의 독재 정권 시기에 청와대에 있었던 박 대통령의 감수성이 이명박 전 대통령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지적들도 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생각했고 이명박 전 대통령은 “대통령은 CEO와 같다”고 여겼다면 박 대통령은 정부가 재벌의 위에 있음을 당연시한다는 것이다. ‘하극상’이란 말을 자주 쓴다고 알려진 박 대통령의 국가주의적 감수성이 역설적으로 시장권력에 대한 제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국가의 왼손’이 약자를 적극적으로 돕지는 않지만, 강자에게 ‘철퇴’를 내리치는 일 정도는 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박 대통령식 재벌규제’가 가지는 파급력의 효과는 제한적일 거라는 관측도 나온다. 시장의 ‘슈퍼 갑’들의 일부 불공정을 시정하는 일은 허용하더라도 ‘을’들의 규합과 조직화를 반기지는 않을 거라는 게 주된 이유다. 한 진보정당 관계자는 “친자본 반노동 보수정부에서 비자본 반노동 보수정부로의 이동 정도라고 본다”고 잘라말했다. 그는 “가령 고용노동부가 조사를 시작한 삼성전자서비스 불법 파견에 관련해서 민주노총 금속노조가 1만여명의 해당 노동자에 대한 조직투쟁을 선언했는데 이런 일은 박근혜 정부에서도 반기지 않는다”라고 평했다.
정부 주도의 ‘위로부터의 개혁’이라 해도 그 결과를 통해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견인할 수 있는 주체를 만들어내는 일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러려면 미국 역사에서 가장 진보적인 정권이었던 루즈벨트 정부가 그러했던 것처럼 정부가 노동운동의 조직화를 장려하는 수준의 배려가 필요하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가지고 있다는 서열의식이 강한 국가주의적 성향의 특성은 그러한 배려는 발휘하지 못하게 할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진보세력에 필요한 대응
다만 그와 별개로 노동계와 진보진영의 대응은 섬세해야 한다는 지적이 가능하다. 서민들의 삶의 피로가 가중되는 글로벌 경제위기의 시대엔 한국 사회의 재생산을 고민하기 위해서라도 보수정권 역시 경제개혁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정권의 성격이 복합적일 때는 상대를 악마화하기만 하지만 말고 투쟁할 부분은 투쟁하되 어떤 부분에는 지지를 표하고 연대를 요구하는 자세가 필요할 수 있다. 비록 그 ‘복합성’이란 것이 매우 약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런 부분을 발굴하고 부각시키는 것은 높은 지지율을 통한 안정적인 통치를 원하는 보수정부에게 자신의 기조를 유지해야 할 유인을 제공하는 일일 수 있다. 어차피 5년의 세월을 살아내야만 한다면, 이와 같은 분리대응의 태도가 더욱 실질적인 진보에 기여하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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