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듬분석’이라! 들어보지 못했고 생소했다. ‘리듬’이란 원래 음악에서 많이 쓰는 말이 아니던가? 근데 르페브르는 또 어떻게 자신의 언어로 전용했을까? 다행히 책은 얇았다. ‘분석’이란 말에서 관념적, 추상적이기보다는 실용적, 현실적인 무엇이 있을 것이란 느낌을 받았다. 나름대로 나의 현장에서 전유할 만큼의 활용적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르페브르의 『리듬분석』은 먼저 시간성에 대한 고찰에서 시작한다. 전작 『공간의 생산』과 『현대세계의 일상성』 등에서 이미 공간과 그 속에서 엮어지는 일상을 논하였기에 자연스럽게 시간으로 이동했는지 모르겠다. 공간의 시간화 즉 장소와 공간의 물질성을 시간과 연계시켜 이해하는 것이 리듬분석의 핵심전제이다. 근대 이후 ‘시공간 압축’으로 표현되는 교통과 통신의 이동성은 인간의 표상체계, 문화형식, 철학적 감성을 비롯한 사회적 경험과 관계망을 크게 변화시키고 있다. 현대의 일상을 구성하는 핵심요소의 하나인 이동성(mobility)은 이동과 정지의 반복으로 구성되고, 그 과정에서 ‘리듬’을 생성한다는 것이다.

르페브르는 리듬을 ‘반복을 함축하며, 운동들과 반복 속의 차이’로 정의했다. 그 유형을 순환적 반복(cyclical repetition)과 선형적 반복(linear repetition)의 두 가지로 대별했다. 순환적 반복은 회전운동으로서 낮과 밤-시간과 달, 계절, 해-로 비유했다. 순환적인 것은 대개 우주적 기원에서 비롯되며, 선형적인 것과 같은 방식으로 측정할 수 없다고 보았다. 순환적인 것에 번호를 붙일 때 가장 적합한 것으로서 12진법을 들었다. 그 이유는. 1년 12개월, 시계 눈금 12개, 원주율 360도(12의 배수), 별자리 12자리, 12개 단위로 포장되는 계란이나 귤처럼 12라는 숫자는 자연에서 직접적으로 유래하여 생명체에까지 적용된다고 보았다. 동아시아에도 12간지가 있기에 일면 수긍이 가는 대목이었다.

반면, 선형적인 것은 비교적 짧은 주기로 동일한 혹은 거의 동일한 현상이 연속되고 재생산되는 것으로 정의했다. 망치질을 예로 들며 각각의 망치질은 상대적으로 강할 수도 있고 약할 수도 있는데, 그 사이에는 규칙적으로 침묵이 삽입되며, 또 메트로놈 역시 선형적 리듬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 리듬은 일반적으로 인간적, 사회적 활동, 특히 노동의 몸짓들에서 비롯되며, 모든 기계적인 것의 출발점이 된다고 보았다. 선, 궤적, 선형적 반복 등을 포함하는 선형적인 것은 10진법(미터법)을 기준으로 측정된다고 함으로써 12진법으로 비유한 순환적 반복과의 차이를 제시했다.

이 두 종류의 반복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분석과정에서 구별되고 분리되지만 사실상 분리불가능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르페브르의 리듬 개념 핵심은 리듬이 다중성(plurality)을 가지며 이런 다중적인 리듬들이 하나의 앙상블을 구성한다는 데 있었다. 그리고 다양한 리듬들로 구성되는 다리듬성을 계속 강조했다. 다리듬성은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지휘봉 움직임에 따라 하나의 리듬이 질서를 잡고 다수의 연주자들에게로 확장되는 단일리듬성과는 달리 조화리듬성을 가진다는 데 의미를 두었다. 이 조화리듬성은 유기체, 조직, 생명(체)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쉽게 찾을 수 있고, 서로 다른 리듬들의 결합을 전제하며, 건강한 상태라면 조화리듬성을 보여준다고 했다.

반면, 그렇지 못한 상태로 제시한 부정리듬성에서는 리듬들이 서로 분리되고, 변형되고, 탈 동기화한다고 보았다. 병적인 상태가 발생하여 급기야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미 『공간의 생산』에서 보여준 것처럼 비슷한 단어에 각기 다른 의미를 부여하며 이리저리 가져다 쓰는 그의 언어적 특성이 단일리듬성, 다리듬성, 조화리듬성, 부정리듬성 등의 비슷비슷한 용어들로 나타나고 있어 쉽지 않은 부분이었다. 다행히 르페브르는 리듬에 대한 모든 연구는 필연적으로 비교연구가 된다고 한 후, 지중해 도시들과 대서양 도시들을 대조하며 설명함으로써 이해를 도왔다.

르페브르가 본 대서양 도시들은 좀 더 구속적, 정신적, 추상적인 연합형태와 관련된 좀 더 규제적 시간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도시적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교환관계를 맺는 개인의 자격으로 그들의 여유 즉 시간 중 상당 부분을 그 관계에 할애했다. 반면 지중해에서는 정치적-국가적 권력이 공간을 관리하고, 영토를 지배하고, 앞서 말했듯이 외부와의 관계를 통제했다. 그럼에도 도시인-시민이 자신들의 시간을 누리고, 그 결과 그 시간에 리듬을 부여하는 활동에 집중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고 보았다. 가정임을 전제한 후 북유럽 도시들의 사회적 관계는 계약적인, 즉 법적인 기초 위에, 상호적인 선의 위에 구축된다고 보았다. 지중해에서의 관계들은 암묵적이거나 명백한 형태의 동맹을 추구하는 경향 혹은 회피하는 경향 위에 구축된다는 것이다. 전자의 경향이 발전하면 파벌의 형성(후견인 주의, 마피아 등)까지 가능하고 후자의 경우는 공개적인 투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벤데타 등).

그는 특히 지중해 지역의 계단에 주목했다. 바다를 바라보는 구릉지가 많은 지형적 특성상 계단 건축은 지중해 지역의 어디를 가더라도 볼 수 있다. 근데 바로 이 계단이 공간들 사이를 연결할 뿐 아니라 시간들을 연결한다는 것이 그의 재미난 해석이다. 외부 공간에서의 계단은 대개 지형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며, 공간의 위계를 설정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공간을 잇는 연결동선으로서의 계단이 시간을 어떻게 연결한다는 것일까? 시공간의 압축과 계단의 연결고리를 한참 생각해 보게 한다.

"계단은 건축의 시간(집, 담)과 도시계획의 시간(거리, 오픈 스페이스, 광장과 기념물)을 연결한다. 계단은 집들과 특수한 건물들을 도시적 공간 속에 배치하고 연결한다. 계단이야말로 공간화된 시간의 멋진 예가 아닐까? … 이 계단들의 부정할 수 없는 기념비성(monumentalité)은 문이나 대로 이상으로 우리의 몸과 의식에 한 리듬에서 다른 리듬으로의 전환, 새롭게 발견해야 할 낯선 리듬으로의 전환을 강요한다. … 지중해 주변의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여러 언어들을 듣고 성장한 덕분에 다양한 리듬들을―즉, ‘타자의’ 리듬들의 다양성을―‘자발적으로’, ‘선천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지중해와 대서양의 비교는 이해를 한결 쉽게 해 주었다. 해양 항로의 주요 통과지점에 있는 반도국가의 지형학적 특성이 자연스럽게 문화로 양식화한 것은 환경결정론으로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리듬분석도 결국 환경(physical environment)의 틀 속에서 논의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책의 종반부에서 그는 사회적 시간에 대한 분석으로 리듬을 다시 두 가지로 구분했다. 로베르 졸랭의 용어를 빌어 이야기한, “자신의 리듬”과 “타자의 리듬”이 그것이다. 타자의 리듬은 외부, 공적인 것을 향하는 리듬이다. 반면, 자신의 리듬은 사적인 삶에 할애된 시간을 조직하는, 삶 속에 좀 더 깊이 자리 잡은 의례들에 연결된다. 그런데 이 대립하는 양극 사이에는 다양한 중간단계들과 그것들의 뒤얽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의례와 의례화는 일상적 시간에 개입하며 그것을 ‘구획 짓는다.’이런 과정은 대개 순환적인 시간, 즉 특정 시간, 날짜, 정해진 계기 속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일상성을 구획 짓는 다양한 의례가 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의례를 종교적 의례, 성스러우면서도 세속적인 더 넓은 의미의 의례, 정치적 의례로 구분했다. 종교적 의례로는 단식, 기도, 목욕재계, 삼종기도, 타종 등이 제시되었다. 성스러우면서 세속적인, 더 넓은 의미의 의례에는 축제와 카니발, 내부의 화목을 다지는 의례들, 외부와의 친교를 위한 의례들을 제시했다. 정치적 의례는 기념식, 추도식, 선거 등이었다. 요컨대, 일상의 흐름을 중단시키지 않으면서 그 속에 비일상적 리듬을 새겨 넣는 모든 것들을 의례라고 정의했다. 그의 머리에서 의례의 폭은 넓었고,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은 우리는 많은 의례 속에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이즈음에서 정치권력을 등장시켰다. 정치권력이 공간을 지배할 길을 모색한다는 경고였다. 그래서 기념물과 광장 들이 중요해지는 이유라는 것이다. 그러나 궁전과 교회가 하나의 의미, 정치적 목적들을 지닌다고 했을 때, 시민-도시인들은 그 목적들을 우회한다고 보았다. 즉 시민들은 이 공간을 비정치적으로 전유하고, 시간을 일정한 방식으로 전용함으로써 국가에 저항한다는 것. 그가 앞 저작에서 누차 강조한 ‘전유’가 다시 한번 부각되는 지점이었다. 이제 전유를 둘러싼 투쟁이 벌어진다고 그는 보았다. 그리고, 바로 그 속에서 리듬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리듬분석의 의미를 높였다.

순간, 여의도 광장과 광화문 광장, 서울광장이 떠올랐다. 여의도 광장은 이미 사라졌고, 광화문 광장은 새롭게 만들어졌으며, 서울광장은 창조되었다. 본래 모래톱이었던 여의도 광장은 70년대와 80년대에 온갖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힘의 과시이자 스펙타클의 장소였다. 그 후 90년대에 깃발과 만장을 앞세운 시민들의 저항의 공간이기도 했다. 시민들이 다른 방식으로 전유하자 광장은 곧 19세기적 풍경으로 시간을 되돌렸다. 콘크리트 구조물과 강한 대비를 이루는 자연풍경식 공원은 르페브르의 논리를 빌리면 자연을 차용한 권력의 반격이 된다.

땅속에 묻혀 있던 조선의 육의전은 광화문 광장으로 부활했다. 조선시대 권력의 권위를 상징하는 공간이 이제는 서울광장과 함께 2002년 월드컵 이후 길거리 응원문화의 장소로 거듭났다. 다중은 광장을 다양한 방식으로 전유하고자 하며, 정치권력 또한 광장의 시민을 예의 주시하며 일정한 틀 속에서 통제하려 한다. 오늘날 광장의 이용 행태는 시민권과 그 사회의 문화수준을 바로 보여주는 지표가 되었다. 광장의 역사가 긴 서구와 달리 한국에서의 광장 문화는 이제 시작되고 있다.

"사회적 시간, 즉 시민의 시간은 리듬들을 통해 국가적, 선형적, 통일리듬적(unirythmique) 시간, 측정되고/측정하는 시간에서 벗어날 방법을 탐색하고 발견한다. 이렇게, 공적인 공간, 표상의 공간은 “자발적으로” 산책, 만남, 술책, 타협, 거래와 협상의 장소가 되며, 연극화된다. 그리고 이렇게 공간을 점유한 사람들의 리듬들과 시간이 그 공간과 연결된다."

르페브르의 리듬과 시간이 공간과 연결되는 방식이다. 공간은 전유를 통해 장소가 되고 연극화되며, 그 속에서 리듬과 시간 공간의 연결성이 나타남을 강조한다. 결국 리듬은 공간에 정체성을 부여하고, 주체와 객체, 그리고 배경과 대상을 연결 짓는 고리이자 신경망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의 머리에서 뇌세포의 작용은 연결망을 통해 극대화되듯이 공간은 리듬으로써 자신을 내보이고 발화한다는 데 그 중요성이 있다. 항상 난해한 르페브르의 언어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역시 힘들다. 다만, 르페브르는 결국 리듬을 내세워 공간과 시간, 일상성, 공간의 정치학 등 일생의 의제들을 종합적으로 연결하고, 의미들의 재해석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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