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임금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방미 중 제너럴모터스(GM) 다니엘 애커슨 회장에게 “통상임금 문제의 해법을 찾겠다”고 밝히며 ‘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규정한 대법원 판례가 무력화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노동계가 ‘통상임금’ 문제에 대한 전면적 대응을 선언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방미 중이던 지난 8일 제너럴모터스(GM) 다니엘 애커슨 회장과 만난 자리에서 80억 달러 투자의 전제 조건으로 통상임금 해결을 요구한 애커슨 회장에게 “해법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청와대는 GM의 투자 검토 등을 주요한 방미 성과로 설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통상임금은 노동계의 숙원이자 ‘뜨거운 감자’인 문제로 해외 기업 투자의 전제 조건이 될 수 없다는 지적이 있다. 한국GM만 하더라도 2002년 연봉제 도입 이후 통상임금을 둘러싼 소송이 진행 중이며 현재 1, 2심에서 사측이 패소하고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다.

판결이 확정될 경우 한국GM은 8140억 원에 달하는 금액을 노동자들에게 지급해야 하는데, 대법원이 얼마 전 ‘상여금도 통상임금에 포함된다’는 판결을 내리면서 사측의 최종 패소가 유력하다.

통상 임금이란 정기적이고 일률적으로 지급하는 임금을 말하는데, 그 범위를 어디까지로 볼 것이냐를 둘러싸고 오랜 논쟁이 있어 왔다. 통상임금 산정 기준에 따라 수당과 퇴직금 등 기본적인 인건비가 규정되는 상황에서 기업들은 최대한 통상임금을 보수적으로 해석하려 하고, 노동자들은 수당과 상여금을 포함한 모든 금액이 통상임금이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삼화고속을 비롯한 많은 사업장이 통상임금을 둘러싼 분쟁을 겪고 있다.

이는 지난해 3월 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용노동부가 상여금과 보너스를 통상임금에서 제외하도록 하는 지침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법원 판결 이후 여러 사업장에서는 관련 소송이 제기되어 진행 중에 있다.

이처럼 인화성이 큰 문제를 대통령이 각별한 판단과 조심성 없이 덜컥 ‘해법을 찾아 보겠다’고 말하며 논란을 자초한 것은 행정부가 사법부의 권위를 초라하게 만드는 월권행위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서 방미 기간 박근혜 대통령의 '통상임금' 관련 발언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민주노총은 박 대통령이 방미 기간 중 "통상임금 소송문제는 한국경제 전체의 문제"라고 발언 한 것에 대해 미국 자본의 이익을 위해 우리 노동자의 권리를 무시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뉴스1

이에 민주노총은 14일 오후 서울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법원의 확고한 판결이 있는 사안에 대해 행정부 수반이 이렇게 대답하는 것은 삼권분립조차 무시하겠다는 독재적 발상”이라고 규탄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홍지욱 금속노조 부위원장은 “GM은 통상임금 문제와 상관없이 그 이전에도 한국GM에 적극적으로 투자하지 않았다”며 “애커슨 회장이 한국GM 투자 조건으로 통상임금 해결을 요구하는 것은 그간 자신들이 가져간 막대한 이익을 지키기 위해 떼어먹은 임금을 탕감해달라는 교묘한 협박”이라고 비판했다.

금속노조 법률원 송영섭 변호사는 “96년 대법원 판결 이후 20년 가까이 법원 판례를 통해 통상임금 관련 법리가 형성됐다”며 “이제 와서 ‘통상임금에 관한 대법원 법리에 의외성이 있다’며 ‘임금 폭탄을 받게 됐다’는 회사의 주장은 사법부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노동부를 향해 “15년 가까이 확인한 법원 입장의 방향으로 노동 현장이 바뀌어야 한다고 지도 감독을 해야 한다”며 “그러나 아직까지 80년대에 만든 통상임금 관련 지침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향후 민주노총은 통상임금 소송을 적극 지원해나가겠다는 입장이다. 양성윤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은 “박근혜 대통령은 일개 미국기업인 GM회장의 요구를 자국의 노동자들에게는 묻지도 않고 덥석 물어온 천박한 대통령”이라고 규정하며 “민주노총은 이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며 노조를 만들 수조차 없는 90%의 어려운 노동자들의 통상임금 소송을 적극 지원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통상임금에 대한 해석과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을 두고 노사정의 입장이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는 가운데 여전히 재계는 “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대법원의 입장은 최근 들어 갑작스럽게 바뀐 것”이라며 받아들일 수 없단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한국경영자총연합회 이형준 노동정책본부장은 지난 13일 CBS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 출연해 “정기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해 왔던 부분을 (법원이) 갑자기 변경하면서 노사관계 현장에 상당한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며 “법원 쪽에서 판례에 대한 부분을 빨리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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