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일(현지시간) 성추행 의혹을 받고 있는 윤창중 청와대 대변인이 전격 경질됐다. 사진은 지난 순방중 기내에서 수행원 및 기자들과 인사하는 모습.ⓒ 연합뉴스
레임덕은 3가지 조건에서 성립합다. 첫째는 임기 말이다. 정권 재창출 여부와 상관없이 단임제 권력의 최대 적은 언제나 ‘시간’이다. 정권재창출 가능성이 낮다면 그 ‘시간’이 더 빨리 올 뿐이다. 두 번째는 선거에서의 패배다.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이 중간선거 성격의 선거에서 패할 때 권력은 가라앉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일관성의 상실이다. 주요한 약속이 뒤집히거나, 정권의 핵심을 표상하는 이슈나 정책에서 일관성을 잃을 때 권력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박근혜 정부를 두고 레임덕을 논하는 건 그래서 맞지 않을지 모른다. 이 정권은 아직 출범한지 100일도 되지 않았다. 내각 인선이 끝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서슬 퍼런 권력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인기가 예상 밖으로 빨리 떨어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4.27 재보선에서 새누리당은 낙승을 거뒀다. 안철수 후보가 당선되긴 했지만, 제1야당이 한 석도 건지지 못한 것이 더 나빴다. 일관성의 문제는 ‘경제 민주화’의 쇠퇴나 ‘복지 공약’의 후퇴로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긴 하지만 아직 레임덕을 논할 정도는 분명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임덕의 기미가 보인다. 이른 레임덕을 점치는 목소리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워낙에 엄청난 사건이 터졌기 때문일까? 아니다. 권력의 예민한 속성 때문이다. 레임덕은 보통 임기말에 찾아온다. 하지만 권력의 ‘도덕성’과 ‘내부의 단결’이 깨질 때, 권력이 유지되기란 쉽지 않다. 임기 말에 레임덕이 오는 건, 권력이 저물 때 이 속성이 대체로 해체되기 때문이다. 정권의 도덕성이 깨지고, 정권 내부의 단결이 깨지면 권력에 누수가 오고 이 누수는 결과적으로 권력을 잠식한다. 윤창중 성추행 사건은 권력의 이 예민한 속성을 완전히 헤집고 있다.

역대 정권 누구도 이러한 해체를 견딘 권력자는 아무도 없었다. 역대 모든 정권이 권력형 비리나 측근 부패로 레임덕 상황을 마주하기 시작해 이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권력 내부의 단결이 도모되지 않으며 침몰해갔다. 지금, 박근혜 정부에서 바로 이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윤창중 전 대변인이 도망치듯 미국을 떠나온 건 누구의 판단이건 간에 최악의 악수였다. 어떻게든 거기에 남았어야 상황을 수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돌아왔고, 이제와 무슨 말을 한들 이미 그 뿐만 아니라 박근혜 정부 전체가 신뢰받기 어려운 지경에 빠졌다. 여기에 돌아온 판단을 누가 했는지를 두고 ‘진실 게임’까지 하자고 나섰다. 이 ‘진실 게임’을 부정하려했던 그의 상관은 그러나 하루 만에 옷을 벗었다.

윤 전 대변인은 홍보수석이 귀국하라고 지시해 귀국했다 했고, 이남기 홍보수석은 ‘그런 일이 없다’고 맞섰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정부를 상징하던 이들이 추태의 낯 뜨거운 공방전을 벌이자 그렇지 않아도 들끓던 여론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달았다. 이 홍보수석이 “책임질 일이 있으면 책임 지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가 불과 하루 만에 사퇴할 것이라고 내다본 이는 거의 없었다.

윤 전 대변인의 기자 회견과 이 홍보수석의 사퇴는 이 정권 내부의 결속이 전혀 끈끈하지 않음을 단박에 드러냈다. 정권 입장에서 보자면 경위가 어찌되었건, 출범 100일도 안 된 상황인데 윤 전 대변인의 기자회견 내용은 조율이 됐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가 어떤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르고 사퇴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통제’조차 못 하는 것은 전혀 다른 파국을 낳는 문제이다. 하지만 윤 전 대변인은 천둥벌거숭이 마냥 자신을 변론하기 위해 권력을 벼랑 끝으로 몰았다. 그의 기자회견이 그렇다고 해서 권력의 추악한 작동을 폭로했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성추행 당사자의 전형적 변명을 통해 이 권력의 수준 낮음을 보여줬다.

이런, 윤 전 대변인의 말을 신뢰하기도 어렵지만 그렇다고 이남기 홍보수석의 말 역시 마냥 신뢰하긴 어렵다. 이러저러한 정황을 감안했을 때, 윤 전 대변인의 귀국이 완전히 ‘독단적’이었다고 말하긴 이미 힘든 상황이다. 그의 귀국 여부에 누구도 개입하지 않았다는 이 홍보수석의 발언은 전적으로 이번 사건에 대통령을 끌어들이지 않기 위한 고육책처럼 보였는데, 결과적으로 의도는 관철되지 못했다. 오히려 본인이 옷을 벗으며 사건의 부감만 더 키운 꼴이 됐고, 그의 귀국에 모종의 논의가 있었단 것만 확인해주고 말았다.

▲ 윤창중 전 대변인의 '성추행 의혹'과 관련, 허태열 청와대 비서실장이 12일 기자회견을 하고 있고(왼쪽부터) 사의를 표명한 이남기 홍보수석은 지난 10일 긴급 회견을 하고 있고 의혹의 당사자인 윤 전 대변인은 지난 11일 해명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수석의 사퇴는 윤 전 대변인의 행위가 개인적 ‘사고’라 하더라도, 그러나 이 ‘사고’의 책임을 지고 누구라도 옷을 벗고 물러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려했던 것일 수도 있다. 이 홍보수석의 사퇴는 어찌되었건 무한 책임을 진다는 것을 표명하면서 위기에서 벗어나려는 전술일수도 있다. 하지만 과정이 너무 나빴고, 원하는 결과도 얻기 어려울 것으로 보이는 ‘장고 끝에 또 다른 악수’가 됐다.

내외부의 압박에 의해 수석이 됐건 비서실장이 됐건 또 다른 누군가이건 물러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물러날 때도 과정과 수순은 중요하다. 권력 내부가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며 물러나는 것은 아니 물러남만 못한 경우가 더 많다. 이번 경우처럼 권력 내부의 붕괴를 보여주며 꼴이 사나워질 경우 그건 그야 말로 레임덕으로 가는 통로가 된다.

한 번 잃어버린 도덕성을 원래의 수준으로 회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거의 모든 언론이 ‘속보’ 체계를 갖춰놓고 사건에 덤비고 있는 상황에서 이 사건은 낱낱이 파헤쳐져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회자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추가 의혹들이 겹쳐질 것이고 벌써 일부 매체는 윤 전 대변인뿐만 아니라 복수의 청와대 관계자들이 ‘진상 짓’을 했단 보도들을 내놓고 있다. 점점 더 수렁으로 빠져들 공산이 크다.

이 수렁은 권력 내부의 단결과 결속이 있을 때만 버틸 수 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이미 이 부분이 완전히 깨졌다. 보통 임기 말에는 ‘각자도생’의 욕구가 엇갈리며 단결과 결속이 깨지기 마련인데, 박근혜 정부는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오가 유지가 안 됐다. 이는 근본적으로 박근혜 리더십이 형편없단 뜻이고, 박근혜가 구성한 사람들이 무능하단 얘기밖에 안 된다.

언론인 이대근은 한국적 권력의 속성을 설명하며 “리더를 중심으로 ‘비전’과 ‘가치’를 공유하는 동질성과 ‘이권’과 ‘자리분배’를 중심으로 한 동질성”의 차이를 말했던 바 있다. 전자의 경우 “친밀도가 높아도 가치가 훼손될 때 이견이 나올 수 있는 반면, 이권과 자리 분배로 결집한 세력은 그것이 충족되는 한 침묵한다”는 것이다. 실제, 참여정부 당시에는 ‘대연정’과 ‘한미FTA’ 같은 가치형 이슈들에서는 권력 내부에 극렬한 이견이 발생했지만, 권력 말기 비리 문제가 터졌을 때는 대오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반대로 이명박 정부에서는 4대강과 같은 가치형 이슈들에서는 대오가 흐트러지지 않았지만 권력형 비리가 나오며 모두가 침몰해갔다.

윤창중 사태는 바로 이 권력의 속성, 박근혜 정부의 성격을 묻고 있다. 이권과 자리에서 배제되자 극렬히 반발한 윤 전 대변인의 사례는 박근혜 정부 권력자들의 ‘멘탈’을 보여줬다. 이남기 홍보수석이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자리를 버리는 것 외엔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없는 궁지로 몰렸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제, 박근혜 대통령의 선택만이 남았다. 권력의 누수가 명백해진 상황에서 박 대통령은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정권 100일 만에 이렇게 ‘파토’가 났다는 것은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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