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뉴스1

아베신조 일본 총리가 “침략에 대한 정의는 확실하지 않다”며 과거 침략 전쟁 행위 자체를 전면 부인하고 나섬에 따라 향후 한국은 물론 동북아 전체에 파장이 예상된다. 극우적 행보를 통해 70%에 달하는 인기를 얻고 있는 아베 총리의 ‘극우 발언’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북-일, 중-일 갈등 국면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동북아 역사 전체를 부정하는 아베 총리의 발언은 향후 한중일 관계는 물론 동북아 전체에 매우 심각한 외교적 마찰 상황이 도래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침략 행위에 대한 정의는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아베 총리

아베 총리는 23일 일본 참의원 예산위원회에 출석해 “침략 행위에 대한 정의는 국가 간의 관계에서 어느 쪽이냐에 따라 보는 것이 다르다”며 침략행위에 대한 사과를 표명했던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정전협정 50주년을 맞았던 지난 95년 발표된 ‘무라야마 담화’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에 대해 아베 총리는 “정말 애매한 표현으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는 극우적 견해를 밝혔다.

아베 총리의 이런 발언은 23일 일본 여야 국회의원 168명이 야스쿠니신사를 집단 참배한 상황과 맞물려 일본 정부가 근본적인 역사 부정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다. 아베 총리 역시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을 봉납했고, 아소 부총리 등 정부 각료 3명도 함께 참배를 감행했다. 이를 두고 한국과 중국 등 이웃 피해국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마저 무시하는 “참사에 가까운 도발행위”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은 상황이다.

침략전쟁 피해 국가들의 참을 수 없는 불쾌함

23일 이후 국내 언론이 일제히 일본에 대한 성토 기사를 내놓고 있는 가운데 아베 총리의 발언까지 더해지자 그야말로 한일 관계는 급랭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24일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책임 있는 지도자라면 올바른 역사인식을 가지고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말로 아베 총리를 직접 겨냥해 비판을 가하며 “한일관계는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특수한 역사성이 있다”며 향후 한일 외교일정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물론, 아직 정부의 공식 입장은 아니지만 외교부 장관이 직접 아베 총리에 대한 불편함을 밝혔단 점에서 향후 한일 외교의 경색 국면은 불가피해졌다.

▲ 일본 정치권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집단으로 강행하면서 비난 여론이 고조되고 있는 24일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107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서 '위안부 소녀상' 뒤로 한 초등학생이 직접 쓴 손팻말을 들고 있다. ⓒ뉴스1

반일감정이 한국에 비해 훨씬 심한 중국 역시 술렁이고 있다. 중국 내 주요 사이트에서 아베 총리의 발언이 언급되는 있고, 일본과 동북아 주도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 정부 입장에선 한국 정부보다도 훨씬 센 대응을 선택할 공산이 크다. 더욱이 중국은 일본과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두고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센카쿠 분쟁 이후 중국은 정부 당국의 수수방관 속에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기도 한데 센카쿠 갈등이 한창이던 작년의 경우 도요타, 닛산, 혼다 등 일본 주요 기업의 중국 생산이 한때 절반 가까이 줄 정도로 뜨거운 반일 감정이 표출된 바 있다.

일본은 왜 극단을 향해 치닫고 있는가?

그렇다면, 아베 총리는 왜 이런 극단적인 발언까지 나아가게 된 것일까? 매우 민감한 시기마다 일본의 주요 정치인들의 도발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인데, 우리 입장에선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질 않는 역사 인식과 반역사적 발언이 되풀이 되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일본 언론 상황에 밝은 원용진 서강대 교수는 일본 사회의 분위기를 봐야한다고 지적했다.

원 교수는 “일본은 지금 우리로 따지면 이명박 정부 초기와 같은 상황”이라며 “경제 침체와 불황이 장기화되는 상황에서 먹고 살수만 있다면 역사문제 같은 것은 어느 정도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회적 분위기”라고 지적했다. 2007년 대선 당시 ‘닥치고 경제’ 담론이 횡행하며 이명박 후보의 도덕적 흠결과 역사 인식 부재를 관조했던 한국 사회의 심리처럼 지금 일본 사회 역시 그런 분위기라는 지적이다. 원 교수는 “극우적 성향의 아베가 70%의 지지를 획득하고 있는 상황이나 아베보다 더 극우적인 하시모토 오사카 시장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상황 역시 그렇게 이해해야 할 것”이라며 “최근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는 철학 사조가 전쟁을 일으킨 국가라는 자조에서 벗어나 자존심을 되찾자는 것이라는 점은 이런 극우적 정서가 대중적으로 확산되는 경향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김민철 연구원 역시 아베의 발언이 “극단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을 정도로 국내의 정치적 상황이 어렵다는 점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과거의 피해국이자 현재의 이웃국가들에게 ‘2차 가해’에 달하는 모욕을 주는 발언을 서슴없이 하고 있는 아베 총리의 저변에는 “그런 발언이 국내 정치에 반사이익으로 돌아온다는 확신이 있다”고 분석한 김 연구원은 “일본 국내 정치 문제가 여전히 복잡한 상황”에서 아베 총리가 역사문제와 대북문제에 있어 “강경한 우익 발언을 통해 관심을 일본 밖으로 돌리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김 연구원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비롯한 일련의 행보들이 “작심을 하고 하는 것”이라며 “내부 단속용이자 그걸로 대중 인기를 얻을 수 있단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 일본의 공영방송 NHK는 그나마 괜찮은 목소리를 전하던 언론이었지만 최근 급격하게 집권당을 따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 우경화의 토대가 무엇인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뉴스1

구조로 굳어지는 일본의 우익화 경향, 아베 개인이 아닌 아베류 정치의 문제

점점 구조로 굳어지고 있는 일본의 우익화 경향이 정치인들을 더 빨리, 그리고 더 세게 오른쪽으로 달려가게 만들고 있단 분석이다. 이는 극우적 성향으로 자민당과도 결별했던 하시모토가 오사카 시장에 오르며 극우적 성향과 독단적 추진력을 바탕으로 한 ‘포퓰리즘’ 행태로 인기를 끌며 역설적이게도 자민당은 물론 민주당까지 그와 연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일본 내 정치 상황에서도 충분히 읽을 수 있는 문제다.

▲ '하시즘'이란 신조어로 불리고 있는 하시모토 오사카 시장. ⓒ뉴스1
이에 대해 원용진 교수는 “극우라고 할 하시모토와 민주당까지 손을 잡으려고 하는 상황은 여론, 정치 등 일본 전체가 그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단 것을 보여 준다”며 “아베노믹스로 일부 경제적 지표가 좋아지고 있는 현상적 평가 속에서 이는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민철 연구원 역시 “곧 선거가 있는데, 국내표를 의식한 아베의 강경 노선은 더욱 가속화 될 것”이라며 “자민당에게 하시모토 시장은 더 세게 하면 여론이 더 좋아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말았다”고 씁쓸해했다.

일본 사회는 지금 ‘깨진 유리 어항’이라고 불린다. 경제 침체와 경기 불황이 장기 지속되며 사람들의 개인화 경향은 심해지고 침체된 사회 분위기는 올라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심각한 내부 위기 상황이 고착화되고 있는 형편인데, 이를 극복하고 돌파하기 위한 대안으로 정치 지도자들이 ‘극우’를 선택하고 있고 언론 역시 이를 어느 정도 용인해주고 있단 분석이다. 하시모토 시장의 경우 일본 사회 내에서 파시즘과 결합한 ‘하시즘’이란 신조어로 불리고 있는데 이는 일본 사회가 극단주의자 하시모토 시장의 문제점을 이미 파악하고 있지만 적절한 대응책을 내놓지 못한 채 여론이 그에게 휩쓸리고 있는 상황을 방치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한일 관계에 대한 교과서적인 대응을 넘어선 대처가 필요한 때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건가? 일본 정부의 역사 왜곡에 대한 우리의 대응을 교과서적으로 정리하며 ‘정부와 시민사회를 분리하여, 정부에 대한 항의와 시민사회와의 연대를 동시에 추구 한다’ 정도로 정리될 것이다. 하지만 일본 사회 전체가 우경화 경향을 보이며 과거에 비해 합리적이고 성숙된 시민 의식이 자리할 여지가 훨씬 협소해진 상황에서 이런 교과서적인 전략은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오랫동안 한일 문제를 연구해온 김 연구원 역시 이 부분에 대해 “제일 답답한 마음이 드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뾰족한 해결책을 말하기가 쉽지 않단 지적이다. 김 연구원은 “정부 차원에서 당연히 항의를 해야겠지만, 효과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며 “중요한 것은 일본 시민사회가 스스로 이런 문제를 돌파해가야 하는 것인데 여론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은 때인 것 같다”고 말했다. 원 교수 역시 “우리 내부의 역사 왜곡이 계속 문제가 되고 있는 때에 일본 정부를 향해 역사 왜곡을 중단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고민스러운 대목”이라고 지적했다. 우리 스스로의 역사 문제를 평가하고 정립하는 것과 ‘가해-피해’ 구도의 일본이 역사 왜곡을 자행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부 문제 역시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외부적 요구를 하는 것이 겸연쩍단 점은 해소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원 교수는 “한일 양국에 모두 보수적 성격의 정권이 들어오면서 나쁜 방향의 공명이 울려 퍼지게 된 상황”이라고 우려하며 “박근혜 정권이 힘을 얻기 위해서라도 잘못된 것은 잘못했다고 분명히 말하는 태도 위에서 60년대 미화나 이승만의 재조명과 같은 우리 안의 문제들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역사에 대한 객관성을 바탕으로 또 다른 일본 침략의 피해국가인 중국과의 연대를 통해 “침략자가 정의내릴 수 없는 역사에 대한 피해자 역사 연대를 구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지금 일본은 그리고 한국은, KBS와 NHK에 겹쳐 있는 문제들과 '나쁜 정치'

원 교수의 이러한 견해는 일본과 한국의 매체 지형도와 함께 생각해보면 더욱 의미 있는 지적이다. 일본의 매체 지형도는 공영방송인 NHK가 절대 우위를 지니고 있는 가운데 우로는 요미우리, 좌로는 마이니치와 아사히 그리고 극우로는 산케이가 자리 잡고 있는 형국이다. 한국 역시 KBS의 의제 장악력이 매우 높은 상황에서 좌우로 주요 신문들이 자리 잡고 있다. 다만 일본은 한국에 비해 훨씬 더 공영방송 NHK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사회다. 하지만 최근 들어 NHK의 보수화가 두드러지고 있는 형국이다. 원 교수는 “그나마 괜찮은 목소리를 널리 전파하던 NHK가 정치 경제적 상황의 침체와 아베의 인기가 겹쳐지며 급격히 집권당을 따라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의 이런 언론 환경 변화는 “아베와 같은 정치인이 높은 인기를 유지하고, 극우적 발언을 계속 하는 토대가 되어주고 있다”는 것이 원 교수의 분석이다. 아베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 사회의 매체 지형 자체가 아베와 같은 정치인의 기승을 뒷받침하고 있단 지적이다.

한국의 상황과 완벽할 정도로 기시감이 드는 대목이다. KBS 역시 잇따른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이고 집권당에 불리한 문제는 뒤로 감추는 보도 속에서 민족주의적 자극이나 대중 추수적인 기획을 통한 연성화 전략을 앞세우고 있다. 또 다른 공영방송인 MBC 역시 마찬가지다. 이 다음 단계는 한국 역시 아베와 같은 극우적 성향의 정치인이 대중적 신드롬을 일으키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게 됐을 때 극우와 극우가 마주할 한일관계의 양상은 또 어떻게 치닫게 될까? 한일 양국에 모두 보수화, 우경화에 토양을 넓어지고 있는 매체 상황의 전개 속에서 한일 양국은 좋은 이웃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 일본 만엔 지폐의 모델인 후쿠자와 유기치.

일본이 존경하는 사상가로 만엔짜리 지폐의 표지인물이기도 한 후쿠자와 유기치는 갑신정변에 실패한 조선을 향해 “나쁜 친구와는 더 이상 사귀지 않겠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리고 이후 일본은 군국주의 진격과 침략 전쟁으로 내달렸다. 후쿠자와 유기치로부터 100년, 한일관계는 또 다시 위기에 처해있다. 유기치의 인식과는 달리 그 때나 지금이나 한일 모두에 나쁜 친구들은 있었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지금은 그때와 달리 나쁜 친구들을 더 나쁘게 만드는 언론이 있다는 점이다. 나쁜 아베를 넘어서 나쁜 정치의 고착을 타파하는 노력이 한일관계의 재정립에 중요해 보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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