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19일) 기자회견을 통해 이명박 대통령은 성난 민심의 실체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있다는 인상을 국민들에게 심어주는 데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6월 10일, 광화문 일대가 촛불로 밝혀졌던 그 밤에, 저는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 끝없이 이어진 촛불을 바라보았습니다. 시위대의 함성과 함께, 제가 오래 전부터 즐겨 부르던 '아침이슬' 노래 소리도 들었습니다. 캄캄한 산중턱에 홀로 앉아 시가지를 가득 메운 촛불의 행렬을 보면서, 국민들을 편안하게 모시지 못한 제 자신을 자책했습니다. 늦은 밤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수 없이 제 자신을 돌이켜보았습니다."

그러나 각론으로 들어가 보면, 국민들이 "이제 다시 믿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도록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뼈저린 반성'에 걸맞은 구체적이고 신뢰할만한 대책은 전혀 제시하지 못했다.

'뼈저린 반성'에 걸맞은 '구체적이고 신뢰할만한 대책' 제시 못해

▲ 방송통신위원회 최시중 위원장. ⓒ미디어스
회견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짚어본다.

첫째, 국민들의 요구와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입맛대로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 촛불을 든 국민들이 요구하는 것은 30개월령 미만의 쇠고기도 특정위험물질(SRM)을 제외한 살코기만 수입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 대통령은 30개월령 미만 소의 모든 부위의 수입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둘째, 검역주권 행사에 대한 정부의 확고한 의지는 찾아보기 어렵고, 미국 정부의 '선처'에 의존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미국도 동맹국인 한국민의 뜻을 존중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셋째, 이 대통령은 “정부는 이번 일을 계기로 모든 식품의 안전성을 담보하기 위해 철저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미국산 쇠고기의 국산 둔갑 문제라든지, 30개월령 이하 쇠고기 판정을 위한 전수검사 등은 언급하지 않았다.

넷째, 국민들의 뜻이 어디 있는지 명백한 사안에 대해서도 자꾸 조건을 달고 있다는 점이다.

"'국민들이 원하지 않는 한' 30개월령 이상의 미국산 쇠고기가 우리 식탁에 오르는 일이 결코 없도록 할 것"이라거나, "대선 공약이었던 대운하 사업도 '국민이 반대한다면' 추진하지 않겠다"고 하는 등이 그런 경우다. 30개월령 이상 미국 쇠고기를 원하는 국민이 얼마나 되겠는가? 국민의 과반수가 대운하 건설 계획을 반대하고 있는 것을 아직도 모른다는 얘기인지?

최시중 방통위원장, 이명박 대통령의 '독배'

다섯째, 첨예한 논란이 되고 있는 여권의 공영방송 장악과 파괴 기도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어떤 정책도 민심과 함께 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절실히 느꼈다. 두려운 마음으로 겸손하게 다시 국민 여러분께 다가가겠다. 국민과 소통하면서, 국민과 함께 가겠다. 국민의 뜻을 받들겠다. 반대 의견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이 대통령의 발언이 진정성을 인정받으려면 방송법과 방송통신위원회 설치에 관한 법률 등을 명백히 위반하며 방송장악에 혈안에 돼 있는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부터 교체해야 한다.

그리고 "정부는 어떤 경우에도 방송과 언론을 장악할 수도 없고 장악하지도 않는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천명하기 바란다. 동시에 임기가 보장된 KBS 사장을 내쫓기 위해 국세청과 검찰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기도를 즉각 중단해야 한다.

한마디로 최시중 방통위원장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독배'나 다름없다.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의 거취는 이 대통령의 태도를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다.

촛불시위를 통해 드러났듯이 국민들은 KBS와 MBC 등 공영방송을 과거 군사독재 정권이 했던 것처럼 정부가 장악하거나 독립성을 해치는 일체의 기도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6월 10일 청와대 뒷산에서 촛불행렬을 내려다 보았듯이, 매일 밤 KBS와 MBC 본사 앞에서 벌어지는 촛불집회 현장을 확인해 보기 바란다.

▲ 20일 서울 광화문 방송통신위원회앞에서 열린 언론노조의 '최시중 방통위원장 퇴진 농성돌입' 기자회견. 최상재 전국언론노조 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 정영은
이 대통령의 말 바꾸기에 대한 자성 없어

여섯째, 이 대통령은 그동안 자신이 그 때 그 때 상황에 따라 다른 얘기나 모순된 행동을 보인 것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고 넘어갔다는 점이다.

가령, 어제 회견에서 드러난 이 대통령의 심경이나 태도는 지난 6월 3일 청와대에서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과 1시간 동안 가진 단독회견에서 밝힌 내용과 크게 어긋나지 않아 보인다. (2008년 6월 16일자 Time 참조)

타임과의 회견에서 이 대통령은 자신의 리더십을 변화된 정치환경에 맞추기 위해 노력해 오고 있으며, "(기업의) CEO는 소비자들과 그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자신도 당연히 (국민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

또 대규모 촛불시위가 (미국산) 쇠고기 문제 이상의 문제 때문이라는 사실을 자신이 인식하고 있다며, "한국은 국민들의 시위가 진정으로 의미있는 변화를 끌어내는 단초가 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심지어 이 대통령은 이런 얘기도 했다. "한국과 한국인들을 다른 나라와 구별케 하는 국민성과 역동성을 성장의 엔진으로 바꿀 수 있다."

주간지 타임(Time) 보도를 다시 우리말로 옮긴 위 내용이 이명박 대통령이 통역을 통해 우리말로 이야기한 것과 다소 차이가 날 수는 있겠으나,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의 취임 100일과 최근 촛불시위 정국과 관련, 타임지가 보도한 이명박 대통령의 언급은 그 자체로서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오히려 현 시국상황을 정확하게 내다보고 있고 자신의 대처방법까지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타임과 인터뷰를 가진 3일 후인 6일 이 대통령은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 진각종 통리원장 회정 정사, 태고종 총무원장 운산 스님, 관음종 총무원장 홍파 스님, 조계종 중앙종회 의장 자승 스님 등 한국불교종단협의회 회장단 5명과 오찬 회동을 가졌다.

오미이뉴스 보도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촛불시위의 ‘배후세력’으로 주사파와 한총련을 지목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고 한다.

"주사파와 북쪽에 연계된 학생들이 노무현 대통령 당시에는 활동을 안 하다가 내가 집권하니까 이 사람들이 다시 활동을 하는 것 같다. 이 사람들이 뒤에서 촛불시위를 주도하는 것 같다. 한총련도 노무현 정부 때는 활동하지 않았는데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고 이 대통령이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앞서 이 대통령은 "촛불은 누구 돈으로 샀고, 누가 주도했는지 보고하라"고 해 촛불시위 참가자들과 국민들의 실소를 자아낸 바 있다.

그리고 불교계 지도자들과 오찬 회동 다음 날인 7일 이 대통령은 기독교계 지도자들과도 청와대에서 오찬 회동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쇠고기 파문'과 관련해 "그 때(노무현 정부 당시) 처리했으면 이런 말썽이 안 났지!"라며 '노무현 정부의 탓'으로 돌렸다고 한다. 이날 조용기 목사가 "일은 그 때 다 벌여 놓은 것"이라고 말하자 아쉬움을 표명하면서 이 같이 밝혔다고 오마이뉴스는 보도한 바 있다..

한마디로, 이명박 대통령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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