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가 필사 일을 거절하고 먹는 것도 거절한 채 죽음을 향할 때, 그 주검 앞에서 먹먹함은 결국 그에게서 나를 봐야 하는 현기증일 것이다. 바틀비의 수동적인 행위, 단순한 거절도 아니고 자신을 소멸로까지 밀고 나가는 이 행위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이건 단순한 저항과도 다를 것 같다. 내가 아버지에게 저항할 때, 나를 소멸시키기 위함은 아니다. 내가 부르주아에게 저항 할 때... 페미니스트가 남성적 질서에 저항할 때...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바틀비적 행위, 자기 소멸(굉장히 급진적이라고 생각됨)로까지 밀어붙이는 것이다.

내가 소멸하면 뭐, 아무 소용없을 테니까...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건 아닐까. 나, 내 것, 나의 동지, 친구. 라고 하면서 내가 잃어버리는 것은 공통적인 구역이 아닐까. 나의 적과 함께 걸을 수 있는 거리, 길에 대한 감각.

공동의 구역, 길 위에서 나는 철저하게 수동적이다. 나는 길을 장악할 수도 없다. 그저 타자와 함께 걸을 수밖에 없다. 이들 타자는 단순히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내 한가운데 들어서 있다. 내가 말을 배우면서 잃어버린 나의 유아(infans)는 내 안에 말 못하는 타자로 남아 있다. 우리 안의 구멍, 익명의, 비인칭(으로서 나는 비존재이다!)의 어린아이라는 공동경비구역은 이중적이다. 우리는 늘 그 구멍 때문에 허전하기도 하지만 바로 이 빈 구멍(틈) 때문에 타자와 무한히 마주할 수도 있다. 그것은 구멍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고 우리가 없앨 수도 없다. 그곳에 마주하여 우리는 수동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능동적으로 타자와 함께 살아갈 수 있게 한다.

이 어린아이가 나와 타인 사이에 공동의 구멍이라면 우리는 이 공동의 메워지지 않는 구멍을 통해 스스로 타자화되면서 타자에게 열릴 수 있다. 이렇게 나는 이미 빗금쳐진 존재이며 타자이다. 비인칭적이고 중성적이며 말 못하는 아이처럼 수동적인 행위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타자를 향해, 아니 그보다 타자와 함께 공동의 언어, 침묵의 언어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라는 이름으로, 본질이라는 이름으로, 이념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침묵의 언어를 망각해 왔다(블랑쇼 선집 8, 『카오스의 글쓰기』, 2012).

이와사부로 코소는 현재 뉴욕의 그 거품 같은 번영이 어떻게 세계 각지의 눈물과 연결되어 있는지 봐야 한다고 말한다(144쪽). 뉴욕이 어떻게 자신의 타자로 구성되어 있는지. 그 자신 안의 타자를 보지 못하는 뉴욕에게 닥칠 것은 자신의 죽음밖에 없다. 그래서 뉴욕은 자신을 비존재로 비인칭(내부의 타자에 대한 감각)으로 감각하고 사유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여전히 세계의 중심으로 착각하는 한 그들에게 공동의 안전지대는 없다.

내가 비인칭적이 되지 않으면 나는 계속해서 젠더 간에, 계급 간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유재산과 그 바깥에, 안과 밖에 벽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국가는 벽을 세우길 좋아한다(177쪽). 우리의 상징체계는 차이 체계이기 때문이다. 여자/남자, 위/아래, 낮/밤의 세계에서 중성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성적 소수자를 박해하며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문턱, 경계를 두려워하고 지우려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수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문턱인지 모른다. 문턱에 앉아서 상징 질서(자본주의적)와 단절하기.

괜히 공부를 한다고 취직도 안 하고 이러고 산 지 족히 십년은 된 것 같다. 나를 비정규직이라고 이름 붙이지 말라. 나를 그렇게 호명하면서 나에 대해 평가하고 재단해서 나의 위험성을 삭제하지 말라. 난 이름 붙여지지 않은 채 차라리 유령(비존재로서)처럼 살겠다. 그래서 어디에나 아무 때나 출몰하겠다. 수동적으로 조금씩 자본주의에 참여하지 않겠다. 나는 미용실에 가지 않으며 백화점에 가지 않는다. 이렇게 조금씩 자본주의를 침몰시키겠다. 음핫!!! 위안은 안 되는군.

아무튼 나는 자본주의에 대립하고 투쟁하는 게 아니다. 코소가 말하는 것처럼 대립, 투쟁과 그것의 통합, 해결이라는 사고방식은 비현실적이다(219쪽). 대립 투쟁은 영속하지 않고 통합되지도 않는다(푸코가 어디선가 귀띔해 주었듯). 대립 투쟁 모델은 ‘타자 배척’에 매어 있을 수밖에 없다. 여성운동이 외로운 건 남성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가야할 길은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그 둘을 아우르는 ‘공통적인 것’(기관 없는 신체인 지구처럼 - 이진경 해제에서)을 토대로 하는 사고이다.

이러한 사유방식에는 젠더 정체성도 자기 존재도 소멸시키며 그래서 휴머니즘도 없다. 들뢰즈는 자신의 소논문(「내재성」, 1995)에서 비인격적 유아의 삶을 예찬했다(270쪽). 이와사부로 코소는 ‘비인격적 개체화’ 그 ‘덧없음’ 자체를 힘으로 삼는 삶, ‘자기만의 삶’을 넘어서는 삶이 우리가 재구축해야 할 삶이라고 말한다.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난 ‘보통의 삶’으로서 말이다.

우리는 국가 중심주의에서도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이 땅은 너의 땅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다(285쪽).

공통적인 것을 위한 감각에는 이런 익명의 혹은 액체의 무엇이 필요할 것 같다. 민중을 넘어선 세계 민중으로, 주체를 넘어선 비인칭 주체?로, 국가를 넘어, 젠더를 넘어... 넘을 게 많다. 나는 코소의 이 책을 바틀비의 ‘수동성’ 즉 자기소멸적 태도에 빗대 읽어 보았다. 오독도 독서이므로, 죽음의 도시에서 독서하기(자기만의 삶을 넘어설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일 것도 같다) 또한 하나의 수동성으로서 생명의 거리를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봄볕에 취해 책장을 넘기며 생각해 본다. 뫼르소의 태양이 부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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