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목전에 두면, 모든 것이 간단명료해진다.
만약 형 정우(전노민 분)가 알 수 없는 문장으로 가득한 다이어리와 정체불명의 향을 남기고 죽지 않았다면, 아니 자신이 1년도 버티기 힘든 악성 뇌종양 4기 판정을 받지 않았더라면, 박선우(이진욱 분)는 '팩트'가 아닌 '판타지'를 결코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다르다. 박선우는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이대로 죽기엔 어머니와 지난 5년간 자신만 쫓아다닌 주민영(조윤희 분)이 눈에 아른거린다. 더 이상 망설일 일도 없다. 까짓것 그동안 한 번도 믿지 않았던 '판타지'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작년 케이블 드라마임에도 적잖은 마니아층에게 큰 사랑을 받은 tvN <인현왕후의 남자> 제작팀이 다시 의기투합하여 세상에 내놓은 tvN <나인: 아홉 번의 시간여행>(이하 <나인>)은 <인현왕후의 남자>에 이은 또 하나의 타임슬립 드라마이다. <인현왕후의 남자>와 큰 차이점이 있다면, 주인공 선우가 자신의 20년 전으로 돌아간다는 설정이다.
과연 20년 전으로 날아간 2012년 사람이 그 당시 자신을 둘러싼 운명의 시간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을까하는 물음은 차치하고, 과거로 돌아가는 시간 여행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진진하게 다가온다. 살면서 가장 후회가 남는 사건 혹은 가장 아름다웠던 추억을 되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을 보며, 과거를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은 타입슬립 드라마가 안겨주는 최고의 장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선우와 정우 형제가 그토록 돌아가고 싶어 했던 1992년은 그나마 대다수 사람들이 미래에 대해 희망을 품을 수 있었던 시기에 속한다. 군사정권에서 처음으로 민간에게 정권이 이양된 해, 수많은 가장들이 일자리를 잃었던 IMF 이전 누구든지 열심히 일하면 잘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었던 나날들. 선우와 정우는 자신들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1992년으로 돌아가고자 했고, 자신들에게 있어서 불행의 시작이었던 그 모든 것을 2012년에서 온 자신들의 손으로 막고자 한다.
IMF가 터지기 직전의 1997년 복고 열풍도 대단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1992년을 그리워하는 이들도 꽤 많을 법 하다. 20년이 지나 부잣집 아들만 가지고 다닐 수 있었던 삐삐(호출기)에서 전화는 기본이요,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을 할 수 있는 스마트폰 시대가 도래했건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과거를 그리워하고 다시 끄집어낸 그 과거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한다.
시계는 2013년을 향하고 있지만 마치 70~80년대에 돌아간 것 같은 분위기상, 자꾸만 1992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주인공들이 낯설어 보이지 않는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한 최영장군까지 건너간 타임슬립은 그 자체만으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끄는 참신한 소재도 아니다. 20년 전으로 시간여행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내세웠지만, <나인>이 케이블 드라마의 한계를 극복하고 드라마 좀 본다는 시청자들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은 비결은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 불가능한 '타임슬립' 또한 해내고 마는 선우의 의지, 그리고 불치병을 앓은 연인을 끝까지 지켜주고자 하는 민영이 보여준 아름다운 순애보 덕분이다.
그래서, 15금이라고 하기엔 다소 진한 선우와 민영 아니 이진욱과 조윤희의 침대 키스신이 야하기보다 보는 이들의 마음을 짠하게 울린다. 아니 저렇게 예쁜 커플에게 고작 3개월만 허하다니, 이런 식으로 <나인>에 제대로 낚여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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