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집 들어가기, 거짓 신고, 호객행위, 마시는 물 사용 방해, 쓰레기 투기, 침 뱉기, 구걸 행위, 근거 없는 치료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홀리는 행위, 새치기, 과다 노출, 장난전화, 못된 장난, 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곳에 물건을 던지는 행위, 악기 등으로 지나치게 시끄럽게 한 행위, 노상방뇨, 문신 등을 드러내 불안감을 조성하는 행위, 무단으로 등불을 끄는 행위, 광고물 무단 부착 및 배포……’

지난 11일 첫 정부 국무회의에서 심의·의결된 경범죄처벌법 시행령 개정안이 규정하는 범칙행위의 내용이다. 시민사회단체들은 “(경범죄처벌법 시행령 개정안은) 박근혜 정부에서 정치가 사라지고 ‘법과 질서’를 내세운 국가권력의 물리력이 전면에 나서게 되는 흐름의 첫 시작”이라며 경범죄처벌법 폐지를 요구하고 나섰다.

“경범죄처벌법, 사회적 약자·사회비판세력 겨눈다”

▲ 시민사회단체들은 14일 오전 서울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경범죄처벌법 시행령 개정안은) 박근혜 정부에서 정치가 사라지고 ‘법과 질서’를 내세운 국가권력의 물리력이 전면에 나서게 되는 흐름의 첫 시작”이라며 경범죄처벌법의 폐지를 요구했다.ⓒ미디어스

인권단체연석회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참여연대, 한국진보연대, 홈리스행동 등 시민사회단체들은 14일 오전 서울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기자회견문을 통해 “경범죄 처벌법에서 나열하는 금지행위들은 사실상 어느 특정 행위 하나하나를 규제하기보다 공공영역에 일어나는 모든 행위를 규율·관리하겠다는 것”이라며 “2만여 명의 경찰을 증원할 계획인 정부는 더욱 강화된 경찰력으로 더욱 촘촘하게 시민들을 감시하고 오로지 자신들만의 자의적인 기준에 따라 시민들을 처벌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들은 또한 “경범죄 처벌법이 사회적 약자, 사회비판세력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며 “더욱 많은 이들을 만나기 위해 거리로 나온 노동자들의 농성 천막, 사회단체들의 캠페인, 집회 시위와 같이 공공장소에 벌어지는 사회운동들이 모두 경찰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경범죄 처벌 대상이 된다”고 비판했다.

“국가 통치가 일상적 삶에 개입한다는 문제의식 필요하다”

▲ 14일 오전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한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는 “경범죄처벌법의 궁극적인 문제는 국가가 가부장적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을 돌보듯 국민의 일상적 삶의 영역에 간섭하려 한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미디어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는 “경범죄처벌법의 궁극적인 문제는 국가가 가부장적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을 돌보듯 국민의 일상적 삶의 영역에 간섭하려 한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홍성수 교수는 “(경범죄처벌법이) 지나치게 많은 범위를 법으로 규제하려 한다”며 “‘재주 등을 부리고, 소나 말을 놀라게 하여, 사람의 마음을 홀리게, 못된 장난’ 등 법조문에 어울리지 않고 상식적으로 형사 구성요건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인 표현으로 국민의 삶을 규제하려는 것 자체가 일차적 문제”라고 비판했다.

또한 홍 교수는 “가장 강력한 국가의 제재 수단이라 할 수 있는 형사제재를 가장 강력한 공권력을 가지고 있는 경찰에 의해 집행된다는 것이 두 번째 문제”라며 “범칙금 자체는 형사처벌이라고 볼 수 없으나 범칙금 통보를 거부할 경우 즉심으로 넘어가고 형사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된다”고 지적했다.

홍 교수는 이어 “형사제재, 특히 경찰력의 행사는 가장 엄정한 방식으로 꼭 필요한 영역에 최후의 수단으로 활용될 때 그 권위와 정당성이 유지될 수 있다”며 “국가의 통치가 과도하게 시민의 삶의 영역에 개입한다는 문제의식 없이 몇 개 조항을 고치고 다듬는다고 해서 경범죄처벌법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개정 경범죄처벌법과 그 시행령에 대한 대안으로 홍 교수는 “사실상 폐지 수준에 가까운 전면적 재구성이 필요하다”며 “법률 자체를 없애고 필요한 것들은 다른 법률에 나눠서 규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홍 교수는 “스토킹 행위 등은 오히려 형사 입법화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경범죄처벌법으로 돌려막기해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전했다.

▲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박주민 변호사가 14일 오전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 경범죄처벌법 시행령 개정안이 규정하는 범칙행위의 내용을 비판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박주민 변호사 페이스북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박주민 변호사 또한 “이번 개정 시행령은 스토킹 등 지속적 괴롭힘을 범칙금 8만원에 처하게 했다”며 “스토킹이란 굉장히 위험할 수 있는 행위로 미국이나 일본은 징역형이 가능한 법을 제정해 시행했고 우리나라에도 형사처벌한 전례가 있는데, 이것을 범칙금 8만원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은 범죄의 중대성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박주민 변호사는 “새 범칙 행위로 포함되는 것 중에는 과다노출, 지문 날인 거부 등 종래부터 인권침해 가능성이 크다고 문제가 제기된 조항이 대거 포함되었다”며 “범칙 행위의 확대가 추상성, 그로 인한 경찰의 자의적 법 집행 가능성과 결합하면 국민의 기본권 침해가 보다 쉽게 이루어진다”고 우려했다.

이어 박 변호사는 “범칙 행위가 확대되면서 경찰이 의도적으로, 혹은 실수로 형사처벌을 할 행위를 범칙행위로 처리해 면죄부를 줄 가능성이 커졌다”며 “범칙금을 한 번 내면 동일 행위로 다시 처벌받지 않는데, 경찰이 의도적으로 특정인에게 면죄부를 주고 싶다면 어떤 행위를 범칙금 부과 대상 행위로 판단해 범칙금을 납부하게 하면 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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