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수목 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이하 <그 겨울>)의 등장인물은 하나같이 역설적이다. 19살 때 사랑하던 희주가 자기 때문에 죽은 이후 사랑 따윈 믿지 않았던 오수(조인성 분)은 그 안에 숨겨온 사랑에 대한 열망이 누구보다 컸었고, 매일 ‘죽음’만을 생각했던 오영(송혜교 분)은 ‘살고 싶다’는 잠재 욕망을 감추고자 한다.

오수와 오영 주위를 맴돌며 그들과 갈등을 벌이는 왕비서(배종옥 분)와 진소라(서효림 분)는 불행히도 각각 오영과 오수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궁지에 내몰리게 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그들의 극단적인 애정은 되레 상대의 목을 조이는 숨 막히는 '집착'으로 다가온다.

13일에 방영한 10회에 들어 오수는 처음으로 간접적이나마, 오영에게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밝힌다. 알다시피, 실제로 오수와 오영은 친남매가 아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오영과 그녀의 주위를 에워싸는 모든 이들에게 오수는 오영이 그토록 찾던 친오빠다. 때문에 오영을 친동생 이상으로 사랑하는(?) 오수는 자칫 사회적, 도덕적으로 엄격히 금지하고 있는 아슬아슬한 '근친상간'을 이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애초 오수가 오영에게 접근한 건 '돈' 때문이다. 자신은 아등바등 살 이유가 없으면서도 그럼에도 살아가고픈 '의지'가 강한 오수는 조무철(김태우 분)의 칼에 맞지 않기 위해 가짜 오빠로 위장하여, 의도적으로 오영에게 접근한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오영이 오빠를 좋아하는 것보다 오수가 가짜 여동생을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커 보인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오영이 죽어주는 것이 더 유리함에도, 오수는 오영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자신이 가진 것을 내놓게 된다. 오직 자신의 생존밖에 몰랐던 오수가 드디어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을 감수하려 하는 것이다.

<그 겨울>이 근래 방영한 그 어떤 드라마보다 아련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보기만 해도 시청자를 설레게 하는 조인성과 송혜교의 비주얼과 물오른 연기력이 한 몫 하지만, 누군가 한 명은 죽어야 비로소 끝날 로맨스의 슬픈 결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원작 <사랑 따위 필요 없어, 여름>에서 남자 주인공의 죽음으로 끝냈다는 사전 정보가 아니라도, <그 겨울>이 흘러가는 정황상 '비극'은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다.

어떻게든 살고 싶어 하는 남자와, 어떻게든 죽고 싶었던 여자의 만남은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 조금씩 터득하게 한다. 혼자 이 세상을 처절히 살아가는 것 같았던 오수는 오영을 품은 순간 그제야 자신이 떠나면 슬퍼할 남은 자들의 아픔을 알게 되었고, 자신을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만 둘러싸이다 보니 세상을 믿지 못하고 간신히 생명줄을 유지해왔던 오영은 오수를 통해 '믿음'과 '선의' 그리고 아무리 힘들어도 굳건히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위로'를 얻는다.

78억 원과 뇌종양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남자와 여자의 만남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때문에 더욱 특별하고 소중한 시간으로 작용한다. 그간 한국 드라마의 고질병으로 지적받는 오영과 조무철의 '불치병'도 <그 겨울> 안에서는 사랑과 삶의 소중함을 절실히 일깨워주는 장치로 승화한다.

10회에 들어 육체적 결합보다 더 숭고한 사랑과 헌신의 소중함이 전면으로 부각된 <그 겨울, 바람이 분다>는 흡사 20세기 말 최고의 영화로 평가받는 <아메리칸 뷰티>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언제나 무기력하게 죽음만을 생각하다가, 살아있다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순간 죽음으로 최후를 맞는 <아메리칸 뷰티>의 케빈 스페이스와, 죽을 날을 받고 서로의 만남을 통해 어떻게든 살고 싶은 강한 '의지'를 품게 된 오수와 오영은 그들보다 훨씬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으면서도 그걸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건강히 잘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함을 인지시킨다.

소박하게 잘 살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만드는 <그 겨울, 바람이 분다>. '그들이 살아가는 이유'를 통해 이 세상을 어떻게든 악착같이 버텨야 하는 사람들에게 다시금 살아갈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노희경의 바람은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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