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영화 언터처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이 영화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이 하나 있다. 돌봐주는 사람이 없으면 24시간을 혼자 지내야 하는 전신 불구의 상위 1% 백만장자 필립. 까다로운 조건 탓에 모든 간병인이 손을 들고 떠나가는 그에게 나타난 하위 1%의 무일푼 백수건달 드리스에게 흥미를 느끼게 된다. 전신 불구라 손을 쓸 수 없는 자신에게 아무렇지 않게 핸드폰을 건네고 장애에 대한 농담을 하는 드리스의 모습이 그에게 있어서는 신선한 자극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전혀 다른 신분의 두 사람이 어떻게 어울릴 수 있었는가에 대해 필립은 말한다. "드리스는 날 보통 사람처럼 대해."

드라마 ‘그 겨울’에서 만난 작가와 배우의 조합 또한 마치 언터처블의 1퍼센트의 교감과도 같다. 누가 뭐래도 상위 1%의 명불허전 톱스타인 조인성과 송혜교. 남들은 들여다보지 않는 소외 계층의 결핍된 사랑을 휴머니즘으로 풀어내어 시청률 복은 없지만 탄탄한 마니아층을 갖고 있는 마이너 지향의 작가 노희경. 이들이 일본 원작 드라마로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부터가 어쩌면 언터쳐블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일본 원작을 기초로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사실과 다르게 이 작품의 첫 페이지에서 일본 원작의 여주인공 아코역을 맡은 송혜교의 행동은 몹시 의외인 것이었다. 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을 바라보며 한 손으로는 턱을 짚고 또 한 손으로는 립스틱을 공들여 바르는 모습이 매우 섬세하고 집중적으로 그려진다. 이렇게 꼼꼼한 화장을 거치고 나온 송혜교의 입술은 이후에도 어떤 장면이든 아름답게 부각되었는데 방송이 끝나기도 전에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한 단어를 보고 나는 폭소하고야 말았다. "송혜교 립스틱" 세상에, 얼마나 예뻐 보였으면.

하지만 단순히 예쁘다-라고 생각했던 나의 첫인상과 달리 이 장면을 노희경 작가의 프로의식을 의심하게 하는 옥에 티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있었던 듯하다. 많은 사람들은 노희경 작가에게 도대체 왜 시각장애인이 화장을 하느냐, 시각장애인이 저렇게 두드러진 립스틱을 바를 필요가 있는가에서부터 송혜교의 패션 센스마저 지적당했다. 맹인이 어떻게 이토록 아찔한 킬힐의 하이힐을 신을 수 있으며 심지어 러닝머신을 뛰고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는 모습이 도무지 와 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부분은 노희경 작가의 필력은 물론 배우 송혜교의 프로의식마저 의심하게 하는 의문이었다. 얼핏 이들의 질문을 합해 보면 배우 송혜교는 아름다움을 위해 역할에 어울리지도 않는 치장을 고수하는 이기적인 배우로 느껴지게 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불만이 생성된 원인은 일본 원작 <사랑 따윈 필요 없어, 여름>에 나오는 배우 히로스에 료코의 화장기 없는 얼굴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 드라마 <사랑 따윈 필요 없어, 여름>에서 히로스에 료코는 맹인의 아코역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 꽤 실사에 가까운 노력을 기울였다 토로하기도 했는데, 대부분의 시각장애인이 운동량이 극히 미미한 것을 고려하여 6kg의 살을 찌우고 아무런 치장이 없는 평이한 단발머리에 거의 꾸밈없이 초라한 의상과 무엇보다 화장기가 전혀 없는 얼굴로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아코의 이미지를 극대화시켰다. 여배우가 자신의 미모를 포기하고 역할에 맞추기 위해 아름다움을 버린다는 것은 극히 대단한 희생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런 히로스의 료코와 비교했을 때 화장기 만연한 송혜교의 아름다운 얼굴은 자칫 프로의식 포기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되묻고 싶다. 시각장애인은 왜 화장을 하면 안 되는가. 시각장애인은 왜 아름다워서는 안 되는가.

여성에게 화장이란 지극히 사회적 교류의 일환이다. 타인에게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욕망이 수많은 메이크업 도구들과 공들인 화장법을 개발해냈다. 타인에게 아름다워 보이고 싶은 욕망을 왜 시각장애인은 감추고 살아야만 하는가. 실제로 필자가 봤던 대부분의 시각장애인은 오히려 장애가 없는 이들보다 더 공들인 화장과 단정한 헤어스타일 그리고 멋 부린 의상을 입고 거리를 활보했다. 어느 다큐에서 여성 시각 장애인은 정말 수시로 머리를 빗으며 헤어스타일을 점검하곤 했는데 장애가 있는 사람이건 없는 사람이건 타인에게 아름다워 보이고 싶은 욕망이란 동일하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장면이었다.

드라마 속에서 송혜교가 러닝머신을 하고 수영을 하는 장면을 아주 꼼꼼하게 비추어주었던 것 또한 옥에 티는커녕 오히려 대단히 섬세한 고증으로 만들어진 장면이다. 몸이 불편하기에 행동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고 아무래도 일반인들보다는 운동할 여건이 마땅치 않은 시각장애인들은 대체로 운동량이 극히 적은 편이라고 하는데, 그에 비해 상당히 마른 몸매를 가진 오영의 몸매를 설득시키기 위해 작가는 초반 일반인들과 똑같이 체중을 조절하는 여주인공의 모습을 공들여 내보냈다. 더욱이 라디오도 아닌 러닝머신에 부착된 티비로 자신의 소식을 듣는 러닝머신 위 송혜교의 모습은 대단히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였다.

시청자의 불만이 커지자 노희경 작가는 이와 같은 변을 했다. "시각장애인도 사람이다. 그들도 예쁘단 소리를 듣고 싶어 한다. 실제로 시각장애인 교본에 화장하는 법과 킬힐 신는 법 등이 나와 있다. 시각장애인을 다루면서 그들에게 폐가 되거나 상처를 주면 안 될 것이라 생각한다" 3회에 걸쳐 방영된 송혜교의 마치 의식적인 립스틱 치장은 그녀가 직접 복지관을 찾아 시각장애인들에게 배운 그들의 화장법이다. 옥에 티라고, 배우로서의 프로의식이 떨어진다고 손가락질을 받았던 장면이 실은 배우가 직접 발로 뛰어 익힌 기술이라는 사실은 슬프기까지 하다.

아직 일본 문화가 국내에 익숙하지 않았던 무렵 조금씩 들어왔던 몇 개의 일본 드라마 중 '하늘에서 떨어지는 일억 개의 별'과 더불어 마치 전설의 작품처럼 기억되고 있었던 '사랑 따윈 필요 없어, 여름' 이 작품을 자신만의 확고한 작가주의를 갖고 있었던 노희경 작가가 리메이크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실망스럽고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원작에서조차 편견으로 바라봤을지도 모를, 그저 장애 없는 사람의 시선으로만 바라봤던 시각장애인에 대한 선입견을 노희경 작가는 그녀 특유의 휴머니즘으로 보다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만들어냈다. 시각장애인을 모른다며 그들을 편견으로 바라보지 말라고 지적했던 송혜교의 아름다움이 실은 우리 자신이 먼저 그들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해서도 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며 구분 짓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마치 의식을 치르듯 공들여 화장을 하는 화장대 앞의 송헤교를 두고 순간 거울의 존재를 의심했던 나의 선입견이 부끄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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