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더슨'이라는 이름을 가진 감독은 아무래도 뭔가 비범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 들어 예전만큼 맘에 들진 않지만 <이벤트 호라이즌, 레지던트 이블, 에이리언 대 프레데터> 등으로 재미있는 오락영화를 선사했던 폴 W.S. 앤더슨, <부기 나이트>부터 <더 마스터>까지 작품을 내놓는 족족 평론가들을 사로잡는 폴 토마스 앤더슨, 그리고 이 영화 <문라이즈 킹덤>을 연출한 웨스 앤더슨도 참으로 부러운 자기만의 세계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세 명의 '앤더슨' 중에서 누구의 재능이 가장 탐이 나는지 묻는다면 전 아마 웨스 앤더슨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다른 두 앤더슨의 작품은 어떤 특출한 감독이 흉내를 낼 수도 있을 것 같은 데 반해, 웨스 앤더슨의 영화는 그가 아니면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를 보면 제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영화와 마찬가지로 <문라이즈 킹덤>도 '능력'만으로는 절대 따라잡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뼛속까지 스며든 다른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문라이즈 킹덤>의 이야기는 아주 간단합니다. 소년 샘은 <노아의 방주>를 연극으로 선보이던 교회에서 소녀 수지를 만나 첫눈에 반합니다. 이후로 자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감정을 키워갔습니다. 그로부터 1년이 흐른 지금, 사고로 부모를 잃은 샘과 변호사인 부모 밑에서 갑갑하게 살고 있는 수지는 사랑의 도피를 감행하기로 결심합니다. 한편 샘이 캠핑 도중에 사라진 것을 알게 된 보이스카웃 대장은 다른 대원들과 함께 그를 찾아 나섭니다. 설상가상 딸이 사라진 것을 뒤늦게 알게 된 수지의 부모와 경찰인 샤프까지 두 사람의 행방을 쫓기 시작합니다. 만약 두 사람이 이들에게 잡히게 된다면, 양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샘은 사회복지사에 의해 고아원으로 보내질 운명에 처합니다.

이상의 줄거리를 가진 <문라이즈 킹덤>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동화를 구현하고 있습니다. 이건 이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역할을 하고 있는 초반 5~10분만 봐도 명명백백합니다. 희한하게도 <문라이즈 킹덤>은 수지가 사는 집을 보여주는 도입부에서부터 집요할 만큼 트래킹과 패닝으로 촬영을 일관하고 있습니다. 핸드헬드는 물론이고 스테디캠조차 쓰지 않고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트래킹과 패닝으로 인물을 담습니다. 컷을 나누는 것까지 치밀하게 계산된 카메라의 움직임과 소위 말하는 미장센, 공간 배경까지 더해진 화면은 예쁘게 다듬은 동화의 삽화에 다름 아닙니다. 주요 인물과 배경에 입힌 색감은 또 어떻고요. 참 독특한 효과를 더한 화면이라고 생각했더니 아예 16mm(!)로 촬영을 했다고 하네요.

도입부의 영상에 얹은 음악인 벤자민 브리튼의 '청소년을 위한 관현악 입문'도 <문라이즈 킹덤>의 동화화를 부추기고 있습니다. 이 곡은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완성하고 있는 것은 결국 소규모의 각 섹션이라는 것을 해설과 함께 들려주고 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이 부분은 영화를 통해 꼭 한번 직접 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특히 곡의 극적인 부분을 영상과 일치시키는 웨스 앤더슨의 센스야말로 백미입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문라이즈 킹덤>은 영화의 모든 파트를 통해 동화적이고도 고풍적인 세계를 그리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배우의 이미지도 예외는 아닙니다. 놀랍게도 수지를 연기한 카라 헤이워드의 경우에는 1970~1980년대 여배우의 그것을 갖고 있더군요.

동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 외에도 <문라이즈 킹덤>의 도입부는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트래킹 및 패닝을 고집하는 촬영의 경우에는 앞서 말했다시피 빈틈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만큼 철저하게 계산하고 촬영에 임했다는 것을 의미하죠. 이어서 등장하는 캠핑장의 보이스카웃을 보여주는 장면도 동일한 방식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후자는 거의 초지일관 트래킹만으로 이동하는 인물을 따라가며 이탈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수지의 집이나 샘이 있던 보이스카웃의 캠핑장은 곧 각 인물을 배경이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그것을 견디지 못하거나 방황하면서 탈출을 감행하죠. '청소년을 위한 관현악 입문'도 비슷한 의미(다양성 불허)에서 쓰인 것입니다.

가만 보면 <문라이즈 킹덤>은 마치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동화적으로 그린 것만 같습니다. 이 영화에서 어른 흉내를 내고 있는 아이들은 아이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른들의 추격을 받으면서 사랑을 이루려고 합니다. 대번에 <로미오와 줄리엣>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알고 보면 <문라이즈 킹덤>은 꽤 잔인하고 살벌한 이야기입니다. 어른들은 이혼을 앞두거나 죽었고, 불륜을 저지르는가 하면 아이를 짐짝처럼 내팽개치고 맙니다. 그러고도 소년과 소녀의 관계를 부정하고 갈라놓으려고만 합니다. 이런 세계 속에서 사는 아이들은 쉽지 않은 홀로서기를 감행합니다. 자발적으로 사랑의 도피를 선택한 것 같지만 실상은 그들로 하여금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끔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마음만 먹었다면 <문라이즈 킹덤>을 작년에 아주 인상적이었던 영화인 <케빈에 대하여>와 같은 스타일로 만들 수도 있었을 겁니다. 어쩌면 그 편이 경각심을 일깨우는 데 더 유용하게 작용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웨스 앤더슨은 이 이야기로 순수한 동화를 그리기로 결심한 모양입니다. 다행히 결과는 훌륭합니다. 저는 이런 센스가 부럽습니다. 정형화되고 갖추어진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심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추측 때문입니다. 몇몇 장면의 경우에는 저런 아이디어가 어디에서 나왔을지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연출 감각에 있어서의 웨스 앤더슨은 일반적이지 않은 의미에서 천재인 것 같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저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이렇게 연출할 생각조차 못할 겁니다. 아~ 모처럼 한 감독의 전작을 모조리 다 재관람하고 싶다는 욕구가 피어났습니다.

★★★★☆

덧 1) 웨스 앤더슨에 못지않게 영화와 절묘한 조화를 이룬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음악도 상당한 빛을 발합니다.

덧 2) 빌 머레이, 프랜시스 맥도먼드, 에드워드 노튼, 브루스 윌리스, 틸다 스윈튼이 적은 비중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출연한 이유가 충분한 영화입니다. 역시 이들은 넘지 말아야 선이 어디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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