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다른 맥락으로 산개되어 있는 몇 개의 개별적 흐름들이 ‘조화’를 이뤄 공교롭게도 시대를 규정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예컨대, 2002년의 상황이 그랬다. ‘히딩크 리더십’이 한국 대표팀을 4강으로 이끌 것이라고 봤던 이는 그해 6월 전까지 지구상에 단 한명도 없었다. 막상 한국 팀이 연승을 시작했을 때도, 끝내 광장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붉은 티셔츠를 입고 쏟아져 나올 것이라 봤던 이는 드물었다. 그리고 그 흐름이 불과 몇 개월 후 노무현 대통령 시대를 열어젖혔다. 전혀 뜻밖의 ‘흐름’과 ‘사건’들이 시대정신을 바꾼 것이었다.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 박근혜 시대 역시 그런 것 같다. 전혀 다른 맥락들이 공교롭게도 ‘조화’를 이루기 시작했고, ‘시대정신’으로 규정되기 시작하는 모양새다. 노무현 시대의 흐름이 광장의 열광을 바탕으로 한 다이내믹한 ‘역동’이었다면 그러나 박근혜 시대의 흐름은 엄격한 법치를 강조하는 지극히 잔잔한 ‘정적’으로 가라앉고 있단 것이 다를 뿐이다. ‘운동성’의 방향은 정반대이지만 시대가 어찌되었건 변화하는 ‘운동’을 하고 있단 점은 또한 유사하다.

▲ 지난 해 7월, 용산경찰서는 '치안복지 토크 콘서트'를 개최한바 있다.

뜻밖에도 박근혜 시대의 문은 4대 악과의 전쟁으로 열리고 있는 것 같다. 요새 TV를 틀어보면, 온통 그와 관련된 얘기뿐이다. 아직 실체가 모호한 거대 부서의 창설과 몇몇 부처 개편을 제외하면, 박근혜 정부 개편에서 주목할 만한 일상적 변화 역시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바꾼 대목에 있었다. 조어의 선후를 바꾸는 장난을 쳤다는 조소가 있지만, 이는 그렇게만 바라볼 수는 없는 매우 중요한 그리고 상징적인 변화다. 그만큼 ‘안전’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에, 정색하고 할 만큼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박 후보가 규정한 4대 악은 ‘성폭력, 학교폭력, 가정파괴, 불량식품’이다. 후보자 시절 박 후보는 국민을 “4대악으로부터 보호”하고 사회적으로 영구히 “4대악 척결 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말하자면 이것은 박근혜는 왜 정치를 하느냐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설명과도 같은 대목이었다.

왜 정치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당선인의 생각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곧 세계관과 연결되고, 국가 운영 전반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어떤 이들은 박 당선인의 정치적 위상을 두고 ‘보수의 DJ’라는 평가를 종종하곤 했다. 그만큼 리더십이 강렬하고, 조직 내 위상이 크다는 의미에서다. 실제, 박 당선인은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DJ의 슬로건을 차용하기도 했다.

▲ 박근혜 당선인의 메인 슬로건은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었다. ⓒ뉴스1

DJ는 왜 정치를 하느냐는 질문에는 늘 “배고픈 사람 밥 주고, 등 시린 사람 따뜻하게 해주고, 서럽고 어렵고 괴로운 사람들 옆에서 눈물 닦아주는 게 정치의 본령”이라고 말하곤 했다. DJ가 고난의 세월 속에 끝내 정치를 한 이유가 그것이었다면, 박근혜의 정치적 존재이유는 근본적으로 ‘4대 악을 척결’하는, 즉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에 있는 셈이다. DJ의 정치적 동기가 ‘사람의 얼굴을 한 사회’에 있었다면, 박 당성인의 정치적 동기는 ‘사람의 얼굴을 한 사람만 있는 사회’라고 번안할 수 있다.

이 차이는 매우 강력한 것이다. DJ의 인식 속에서 ‘정치’란 사람의 얼굴을 한 사회를 위한 제 세력 간의 ‘사회적 연대와 타협’이었다. DJ의 정치는 따라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확장 과정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DJ가 노사정 위원회를 꾸리고, 사회적 대타협을 어떤 수준에서건 주요한 통치 기반으로 활용하려 했던 건 이런 세계관의 반영이었다. 반면, 박 당선인의 인식 속에서 ‘정치’란 기능이 불안전한 것들을 배제하고 실재하지 않는다고 상정해버리는 축소 과정으로서의 정치가 될 수밖에 없다. 모두가 사람의 얼굴을 할 순 없으니, 사람의 얼굴을 한 사람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모두 가혹하게 내치는 방식이다. 박 당선인이 인수위원장에 논란을 무릅쓰고 대법원장을 기용하고, 행정보다 안전을 앞세우며 필요 이상으로 ‘법치’와 ‘보완’을 강조하는 맥락은 이런 세계관의 반영이라고 할 것이다.

행정과 안전의 순서를 바꾼 이유에 대해 인수위는 ‘당선인의 의지’라고 강조했다. 박 당선인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4대악 척결’을 말하기 시작했을 때, 공교롭게도 경찰은 더 공세적으로 잔인한 성폭력 사건과 강력한 학교폭력 사건들을 아낌없이 브리핑했다. 박근혜 당선의 한 기반이 되었던 종편 채널은 재방, 삼방을 통해 ‘불량식품’을 재판했다. 가정을 파괴하는 구조적 모순과 경제적 곤궁은 그대로 둔 채 방송 카메라는 가당찮은 ‘솔루션’을 무기로 가정 폭력의 현장을 드라마틱하게 재연하는 프로그램들을 앞 다퉈 방송했다. 지상파 방송 아침 교양프로그램을 보고 있노라면 도무지 이 사회에서 살아갈 ‘용기’가 나지 않을 정도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시간대라는 관념 속에 방치된 그 시간은 가장 선정적인 저널리즘의 장이 되었고, 여기에 무방비로 노출된 이들은 박근혜 몰표로 응답했다.

▲ 2010년 충북지방경찰청장 시절부터 치안복지 담론을 주도하고 있는 김용판 서울경찰청장. 박근혜 시대 그의 행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뉴스1

전혀 별개의 맥락처럼 보이는 이 행위들은 공교롭게도 박근혜 시대를 맞아 하나의 흐름으로 모여들고 있는 양상이다. 그 전위에는 ‘심야 시간의 국정원 직원 선거 개입 중간 수사 발표’로 박근혜 시대를 여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경찰이 섰다. 작년 한 해 동안 ‘주폭’과 싸워왔던 경찰은 이를 비약적으로 확장하고 몰라볼 정도로 세련되게 다듬어 ‘치안복지’라는 새로운 조어를 전면화하고 있다. ‘치안이 곧 복지’라는 경찰의 선전은 언뜻 기만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박근혜 시대를 전망하는 놀라운 혜안이다. 이에 대해 한 인권활동가는 “시대를 읽을 수 있는 획기적인 말”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박근혜 시대의 당위는 ‘안전’으로의 대동단결이다. 이 대동단결을 영어로 번역하면 ‘파시즘’이 된다. 경제적 관점에서 파시즘은 위기에 따른 대중의 행동 결과이지만, 심리학적에서 보면 대중 선동이 성립할 수 있는 심리적 조건에서 달성되는 정치 형태다. 단순히 경제적 불황만이 아니라 대중의 욕망이 무의식적으로 대동단결을 원할 때, 파시즘이 성립된단 얘기다.

장악된 언론이 권력에 민감한 주제들을 피해 만만한 강력사건들만 솎아내 뒤진 지 오래다. 이 흐름은 경찰 조서를 해부하는 교양 프로그램의 양산으로 이어졌고, 안전한 식품을 찾는 하이에나적 행위가 탐사 저널리즘으로 포장됐다. 피해자의 참혹함을 강조하는 스펙터클이 팩트를 대신하게 된 언론의 강력사건 문법 속에서 대중의 욕망은 안전제일의 사고방식을 지향하고, 가해자에 대한 서슴없는 배제를 무감하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치안복지’는 정말 무서운 말이다. 연성화 된 파시즘을 이보다 더 세련되게 설명할 수 있는 표현은 또 없으리란 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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