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광은 칼럼] 영화배우 정우성이 화제다. 정우성은 흥행 가도를 달리는 영화 <서울의 봄>에 출연했다. 개봉을 맞아 홍보 차 출연한 유튜브 채널에서의 발언이 반향을 불렀다. ‘한국 영화가 어려우니 극장에 와달라는 영화인들의 당부는 염치가 없다’면서 배우들부터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현실과 대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말은 영화계에 경종을 울리는 직언처럼 여론의 호평을 샀다. 티켓은 비싸고 영화의 질은 저하되는데 관객의 책임감에 호소하는 것이 무책임하다는 공감대가 있었던 것 같다. 나아가서 사람들의 소비자 심리가 발현된 냉담함에 부합하는 말이기에 반갑게 환영을 받은 것 같다.

'성시경의 만날텐데' 유튜브 영상 갈무리
'성시경의 만날텐데' 유튜브 영상 갈무리

정우성은 한 행사에서 또 다른 발언을 했다. 그는 유엔 난민기구 친선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2018년 예멘 난민이 제주도에 들어왔을 때 난민에 연대하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가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여론의 비판에 난타당했다. 그 일을 잊지 않은 듯 ‘한국에선 난민에 부정적인 의미를 담는 것 같아 속상하다’고 말했다. ‘여러 가지 소리가 있는 것이 민주주의 국가’이며 ‘이 사회에서 이 정도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있어야 하지 않나’라고 반문했다. 이 말은 앞선 발언과 대조적인 반응을 불렀다. 사람들은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몇 년 전 정우성에게 가했던 비난을 반복했다. 정우성은 현실을 모른다, 자기는 부유하게 살면서 무책임한 말을 한다, 일개 배우가 사람들을 가르치려 한다는 질타다.

상반된 반응은 정우성이 잘 나가다 실언을 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고정관념에서 비롯한 것 같다. 전자의 발언이 사람들의 불만을 긁어주었다면, 후자의 발언은 난민 문제에 보수적인 사람들 심기를 거슬렀다. 개중에 의미심장한 댓글이 보였는데, “본업에 충실하라”는 일침이다. 유명인의 정치적 발언에 회의적이거나 선동으로 규정하는 사회적 태도가 아직도 불식되지 않은 것이겠지만, 같은 시기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 진행자의 ‘북한 주적’ 발언이 열화와 같은 환호를 얻은 것을 보면 근본적으로 ‘우리 편’의 입장에 부합하는 정치적 발언이냐 아니냐가 더 중요한 것 같다.

난민 보도, 현실 아닌 이념 프레임에 빠지다 (KBS 저널리즘토크쇼J 방송화면 갈무리)
난민 보도, 현실 아닌 이념 프레임에 빠지다 (KBS 저널리즘토크쇼J 방송화면 갈무리)

한국에서 환영받는 유명인들의 사회 참여는 기부나 봉사활동인 경우가 많다. 그런 비당파적이고 가치중립적인 행동을 해야 특정한 성향을 지닌 여론의 눈 밖에 날 위험 없이 많은 사람에게 찬사를 받는다. 나는 기부 문화를 달갑게 평가하지 않는다. 개개인이 돈을 덜어 돈을 나누는 것이 밑 빠진 가난에 물 붓기이거니와, 기부자의 평판을 세탁하고 사회 참여에 서열을 매기는 효과가 따른다. 거액의 기부를 베푸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평소 공적 가치를 일관되게 지향하는 것이 시민으로서 더 중요한 평가 요소고 공동체에 근본적 영향을 미친다. 후자가 결여됐다고 비판하면 "너는 돈 내고 남을 도운 적 있느냐" 선의의 가격을 저울질하는 반응이 돌아온다.

어떤 사회에 불행이 존재한다면 사람들에게 돈이 없어서라기보다 돈을 벌 권리가 불평등하게 분배돼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 예를 들어 어떤 재력가가 모든 사람의 불행을 청산할 천문학적 액수의 돈을 기부한다 쳐도, 그건 저마다 사회의 주인으로 자립할 권리를 갑부의 배포에 종속시키는 시혜 행위다. 타인의 권리를 뺏어가며 부를 쌓았거나 권리를 부정하던 사람이 타인에게 기부를 베푼들 고도의 기만이다. 사회적 약자를 혐오하는 발언을 뿌리던 사람이 연말에 달동네에 연탄을 배달한다고 공동체를 위한 헌신이라고 칭송해야 할까.

한국은 사회 참여의 정당성에서 '선행'이 정치를 압도하는 사회다. 선행이 도덕적 자기애의 배경화면으로서 선량하고 불우한 타인만 있는 행위라면, 정치는 권리를 주장하고 세상과 갈등하며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주체로서 타자가 출현하는 네트워크다. 선행은 불행한 이들에게 무언가를 베푼다는 미담이 왜 누군가는 불행해야 하는가란 질문을 따뜻하게 제거하지만, 정치는 불행과 행복을 가르는 권력을 향한 물음을 제기하는 데서 시작된다. 전자는 불행을 낳는 세상이 존속해야 성립하고, 후자는 그것을 바꾸기 위해 존재한다.

정우성이 만난 우크라 난민들…“지속적 관심, 전쟁 끝내는 무기” (KBS 뉴스 보도화면 갈무리)
정우성이 만난 우크라 난민들…“지속적 관심, 전쟁 끝내는 무기” (KBS 뉴스 보도화면 갈무리)

타인을 돕기 위해 내 돈을 쓰는 건 존중해야 할 결단이고 훌륭한 미담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회 참여의 왕도는 아니며 다른 참여 행위에 대해 배타적 가치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돈 많은 이들과 기업이 재산이 축나지 않을 만큼 기부를 해서 세금을 감면받고 선행을 홍보하는 건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정말로 힘든 건 내 가치관 및 이해관계와 충돌하는 주장을 보편적 가치체계에 비추어 정직하게 이해하고 연대하는 것이다. 그것이 훨씬 시급한 사회적 행위고 실존적 결단이다.

이상은 한국 유명인들의 사회 참여가 권력관계가 멸균처리된 도덕적 행위, 공중도덕 준수와 불우이웃돕기는 물론 국민 대다수가 지지하는 가치관, 민족주의와 그에 의거한 역사관을 밝히는 것으로 실천되어 온 까닭이다. 그렇게 ‘개념’ 연예인의 서훈을 얻는다. 역사의식도 좋고 순국열사도 좋다. 하지만 현존하는 차별과 폭력에 반대하는 것이 그보다 후순위의 정의일 수는 없다. 정우성의 예멘 난민 연대 활동은 내가 접한 가장 존경할 만한 유명인의 사회 참여였다. 비록, 기부를 하고 애국심을 전시한 연예인들처럼 환대받진 못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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