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광은 칼럼] <드래곤볼>은 우리 시대의 고전이다.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하고, 세대를 아우르는 보편성을 획득했고, 문화산업과 사회상에 기념비를 세웠다. 게다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과 달리 <드래곤볼>은 이름을 아는 사람 대부분이 직접 읽어봤다. 한 통계에 따르면 지금껏 출판된 <드래곤볼> 코믹스의 판매 부수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발행된 도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 이제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인류가 들이키는 공기이자 문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화가 됐다. 소위 하위문화의 입지를 이토록 도약시킨 장본인 중 하나라는 점에서도 <드래곤볼>은 위대하다.

<드래곤볼>은 내년 2024년에 40주년을 맞는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드래곤볼이 연재됐던 일본 소년만화 잡지 ‘점프’에서 유명 작가들이 <드래곤볼> 표지를 다시 그리는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고, 내년에는 40주년 기념 시리즈 <드래곤볼 다이마>가 발표된다고 한다. 뿐만 아니다. 원작 <드래곤볼>은 1995년에 완결되었지만 공식 후속작 <드래곤볼 슈퍼>가 2015년부터 연재되고 있고 애니메이션으로도 방영됐었다. <드래곤볼>은 코믹스 첫 화가 발표된 1984년부터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다. 지금껏 새로운 시리즈가 끝없이 발표되어 온 것처럼 앞으로도 또 다른 후속작들이 만들어져 엔딩 없는 엔딩 스토리를 써갈 것이다.

〈드래곤볼〉 40주년 기념 시리즈 〈드래곤볼 다이마〉
〈드래곤볼〉 40주년 기념 시리즈 〈드래곤볼 다이마〉

배틀 장르 만화의 관습을 닦다

<드래곤볼>의 업적 중 하나는 일본 만화계를 통치하는 배틀 장르-소년 만화의 관습을 확립한 것이다. 원작 <드래곤볼>은 연재 도중 작풍이 크게 요동쳤는데, 그에 따라 이야기를 세 구간으로 나눌 수 있다. 1부는 드래곤볼을 찾는 모험과 천하제일 무도회가 이어지는 ‘피콜로 대마왕 전’까지고, 2부는 손오공의 형 라데츠가 등장하는 ‘사이어인 전’부터 ‘프리더 전’을 거친 ‘셀 전’까지다. 마지막 3부는 ‘마인부우 전’이다.

1부는 서유기적 세계관에 기반을 둔 명랑 활극의 성격이 강하고, 2부는 1부에서 제시된 설정들을 SF-아포칼립스적 세계관으로 교체하고 흡수한 배틀 장르다. 3부에선 그때껏 선보인 작풍들을 통합하며 원점으로 돌아간 인상을 준다. <드래곤볼>의 인기가 정점에 달했던 건 2부가 연재되던 시기이며, 이 작품의 정수 역시 사이어인이란 설정에 있다. 더 강한 적수가 계속해서 등장하는 에스컬레이팅 시스템, 전투의 재능을 타고난 일인자와 그를 추월하려 고뇌하는 이인자의 경쟁구도, 무력을 수치로 표현하는 전투력 시스템, 파워업을 끌어내는 변신 시스템 등 이후 등장한 소년만화에서 볼 수 있는 장치가 여기서부터 쏟아져 나왔다. 이 모든 요소를 추동하는 중심 설정이 강자와의 싸움을 갈구하는 전투민족 사이어인이다.

배틀물 만화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키워드는 ‘밸런스’다. 캐릭터들의 싸움이 만화의 콘텐츠이기 때문에 각각의 캐릭터에게 어떤 전투력을 부여하고 어떻게 전투력의 고하를 정하느냐가 연출의 생명줄이다. 얼마만큼의 힘을 가진 적을 어떤 순서로 등장시킬 것인가가 곧 만화의 줄거리가 되고, 전투력 시스템 내에서 캐릭터들에게 주어진 위치가 그들의 개성을 이루어 캐릭터 플레이의 무대가 마련된다. 파워 밸런스의 조율에 따라 서사적 몰입감이 형성되고, 그것을 운영하는 방식에 따라 서사의 완성도가 결정된다. <드래곤볼>은 서사의 짜임새가 단순한 만화이고, 이는 후반부로 갈수록 심화된다. 가령 1부에선 꼬마 손오공이 레드 리본 군을 물리치고 다니며 만나는 인물들과 거기서 발생하는 에피소드가 중요했기에 서사적 요소와 배틀 물의 요소가 구분됐었다. 2부에서는 전자가 후자에 종속되며 파워 밸런스가 서사의 짜임새를 대신한다.

<드래곤볼>은 자기 파괴의 숙명을 품고 있다. 밸런스를 잘 닦아서 마련해 놓아도 작품 특유의 에스컬레이팅 시스템이 그것을 계속 해체해 버린다. 압도적 강자에게 도전한다는 설정이 매력적인 이유는 말 그대로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뿜는 강렬함과 그 차이를 극복해 내는 카타르시스에 있다. 새로운 강자가 나타나 이전의 이야기와 비슷한 수준의 감흥을 주려면 이전의 강자보다 압도적으로 강력해야 한다. 파워 업이 반복될수록 쌓아 올린 이야기는 무게감을 잃고 현재 진행되는 이야기도 설득력을 잃는 ‘밸런스 붕괴’가 일어난다.

프리더 전은 기존의 세계관이 우주로 팽창하며 전투력 에스컬레이팅도 극대화된 챕터였다. 인조인간-셀 전에서 이야기 무대가 지구로 복귀한 건 더 이상 팽창할 수 없는 세계관에서 계속해서 서사를 진행해야 하는 딜레마에 따른 결과일 것이다. 고작해야 고철과 전류로 이뤄진 인조인간이 우주의 지배자보다 강하다는 설정은 납득이 안 가지만, 이때까지는 에스컬레이팅의 재미가 남아 있었다. 최고조에 달한 파워 밸런스를 허물어버리는 또 다른 강자가 나타났다는 센세이션이 작동할 수 있는 타이밍이었다. 이때가 <드래곤볼>이 배틀 물의 진지함을 품을 수 있는 마지막 시기였다. 잘 알려진 대로 토리야마 아키라는 셀 전을 마지막으로 연재를 종료하려 했지만 <드래곤볼>에 걸린 경제효과 때문에 정부 관료까지 찾아가 만류했다고 한다. 최종 장 마인부우 전에서 1부의 시추에이션 드라마적 성격과 코믹한 연출로 돌아가며 작풍이 이완된 건 창작 자원의 고갈로 인한 궁여지책의 이유도 있었을 것 같다.

〈드래곤볼〉 표지 이미지
〈드래곤볼〉 표지 이미지

반복되는 세계와 성장 없는 인물

<드래곤볼>에서 밸런스 붕괴가 반복된 결과는 연출 설정의 비대화다. 이야기 전개가 단순한 만화인 데다 이야기 기능을 대신하던 밸런스가 무너진 상황에서 몇 가지 중심 설정이 모든 것을 좌우하게 됐다. 늘 이인자의 통탄으로 끝나는 일인자와 이인자의 경쟁, 침략자와의 대결로 파괴된 지구를 복구하는 드래곤볼, 그리고 새로운 버전의 초사이언 출시를 통해 마무리되는 보스 캐릭터와의 결전이다(프리더 전은 초사이어인 1, 셀 전은 초사이어인 2, 마인 부우 전은 초사이어인 3). 이 설정들은 원작 전체에 걸쳐 반복을 통해 공식화됐다. 코믹스 완결 이후 제작된 번외물들 또한 원작의 설정들을 반복하고 변주하며 에피소드를 파생했다. 극장판에서는 전설의 초사이어인 브로리가 등장하고, <드래곤볼 GT>에서는 초사이어인 4가 등장하는 식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설정이 허무 개그로 전락했고(지구가 파괴되는 걸 왜 근심하겠는가? 드래곤볼로 되돌리면 그만인데), 작품을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살아남은 건 초사이어인 정도다.

공식 후속작 <드래곤볼 슈퍼>는 전투력을 넘어 원작의 설정 자체를 에스컬레이팅하며 반복했다. 계왕신을 아득히 능가하는 파괴신이 나타났고, 우주는 십수 개의 평행우주로 확장되었으며, 애니메이션이 진행되면서 파괴신 역시 평행우주와 똑같은 숫자로 늘어났고, 파괴신 마저 두려움에 떨게 하는 전왕이 등장한다. 추억의 숙적 프리더는 ‘골든 프리더’로 재출연하고, 초사이어인은 ‘초사이어인 갓’으로, 다시 ‘초사이어인 갓 초사이어인’으로 진화한다. 손오공이 프리더와 협력해 지렌을 쓰러트리는 상황은 손오공과 피콜로가 라데츠를 쓰러트리고 손오공과 베지터가 마인 부우에 맞서던 상황의 변주이며, 평행 우주 간의 대항전은 천하제일 무도회의 변주다. 새로운 인물을 투입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해도 새로운 건 없다. 그럴수록 이야기는 닳은 기시감을 일으킨다.

이 사태가 분만한 증상은 ‘성장 없는 인물’이다. 원작 코믹스에서 손오공은 발전하는 인물이었다. 싸움밖에 모르는 천진한 성격이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차분함과 노련함, 현상을 파악하는 직관을 갖추어 위기를 타개해 갔다. 베지터와 피콜로 역시 냉혈한 악당에서 ‘가장’과 ‘현자’로 거듭났다. <드래곤볼 슈퍼>에서 손오공은 마치 원점으로 리셋된 것 같다. 현실 감각과 타인에 대한 책임감이 결여된 채 온통 사고만 치고 다니는 민폐꾼이다. 나이를 먹고 손자까지 얻은 할아버지가 되었음에도, 사회적 인격은 성장 억제제를 맞은 것처럼 보인다. <드래곤볼 슈퍼> 방영 이후 인터넷에서는 “손가놈(손오공)”이란 말이 나돌고는 하는데 바로 캐릭터의 퇴행을 꼬집는 농담이다. 이건 독자들에게 가장 익숙한 캐릭터의 단면을 잘라내서 그것으로 캐릭터가 박제된 사태다. <드래곤볼 슈퍼>의 또 다른 주인공 베지터 역시 ‘이인자 츤데레’라는 가장 유명한 속성으로 냉동돼 있다. 그 외 대부분의 조역은 원작의 전사가 무시된 채 별다른 비중도 없다.

원작에선 인물의 성장과 함께 캐릭터의 역할이 전승됐었다. 2부가 종결되며 손오공이 죽고 손오반이 뒤를 이었지만, 3부에선 손오공이 되살아나 마인 부우를 물리치는 주인공으로 복귀했었다. 그를 만회하려는 듯, 짤막하게 붙여진 에필로그에서 우부라는 새로운 인물이 진정한 후계자로 역사를 계승하는 것처럼 암시되었지만, <드래곤볼 슈퍼>를 비롯한 후속작들에서 손오공은 은퇴 없이 주인공으로 살고 있다.

〈드래곤볼 슈퍼: 슈퍼 히어로〉 [소니 픽쳐스 제공]
〈드래곤볼 슈퍼: 슈퍼 히어로〉 [소니 픽쳐스 제공]

프랜차이즈 시리즈물의 일상성

이상은 새로운 시리즈물을 원작의 셀링 포인트에 기대서 제작하는 안이한 연출이다. 실제로 <드래곤볼 슈퍼>는 이런 점들을 이유로 팬들에게 혹평받았다. 다만, 이런 반복과 고착은 심지어 지루함이라 표현할만한 고도의 동어반복을 일으키는데, 이것이야말로 드래곤볼 세계를 관통하는 코드라고 할 수 있다. 끊임없이 사건이 일어나지만, 서사는 나아가지 않으며 어제와 동일한 전개가 펼쳐지는 세계. 물리적 시간만 존재할 뿐 역사적 시간은 존재하지 않고, 축적과 전환이 일어나지 않는 장소. 이것은 매일 똑같은 삶이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우리가 일상이라 부르는 것의 개념과 같다.

시작과 끝이 있는 선형적 이야기는 서사의 종결과 함께 더는 그 세계와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공허와 우울감을 떠넘긴다. 한편 육체를 가진 실존 인물과 물리적 소멸 시효를 지닌 사물의 경우, 시간이 지나 돌아올 수 없는 추억이 되었을 때 상실감과 노스탤지어를 일으킨다. <드래곤볼>의 세계는 흘러가지 않고 반복된다. 그래서 감정의 낙차와 깊이를 빚어내지 않는다. 그저 이 세계 한 편에서 어떤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는 익숙한 느낌, 내 경험세계의 당연한 일부분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것은 매 시즌 새로운 작품을 파생하며 돌아오는, 오늘날 매체를 막론하고 대세가 된 프랜차이즈 서사물이 제공하는 특유의 일상성이다.

그러나 할리우드 히어로 시리즈는 배우의 육체성으로 재현되기에 그들의 노화와 함께 시간의 선형성에 떠밀려서 주기적으로 리부트되며 데이터베이스로 구축된 세계관으로 존재한다. <나루토> 같은 만화는 원작 종결 이후 <보루토>로 재개되어 세대교체의 역사적 시간을 따라 흘러가지만, <드래곤볼>은 작품의 동의어가 된 손오공을 반경으로 자기 완결성을 이룬 채 공전한다. 이런 연속성은 어린 시절부터 손오공을 보며 성장한 이들의 사회적 자아의 연속성마저 구성해 준다. 이것은 영구한 동질성을 품은 이미지를 재현하는 그래픽 매체이기에 일으킬 수 있는 현상이다.

<드래곤볼>은 현실을 구성하는 동시에 현실과 평행한 상태로 존재하는 독립된 세계가 되었고, 손오공은 실존성을 지닌 고유명사가 되었다. 내가 익히 아는 세계가 거기 있고, 거기에서 내가 익히 아는 하루하루가 펼쳐지며, 익히 아는 인물이 나와 같은 시간을 맴돌며 살아간다. 하나의 서사물이 일상성을 이루는 걸 넘어 그 자체로 하나의 일상이 된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종류의 문화 작품이 이런 일을 해냈었는지 알 수 없다. 이것을 21세기 문화산업이 빚어낸 이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때로는 훌륭하지 않은 연출이 범상하지 않은 작품의 자질을 통해 다시없을 무언가를 탄생시킬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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