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저녁에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여학생 둘이 길에 서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낮에 카페에서 보았던 여학생들이었다. 시험 기간이었는지 카페에 앉아 역사 공부를 하고 있었다. 시험 준비를 마친 듯 여학생들은 길에 서서 역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여학생 중 A가 한창 공부한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대화의 모양새가 좀 이상했다.

여학생 B가 대화에 낄 사이 없이 일방적으로 A만 이야기하고 있었다. B는 ‘맞아, 그래’라는 말을 중간중간 추임새처럼 넣으며 말할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여러 명이 대화하는 게 아닌 단둘이 대화하는 것인데도 낄 타이밍, 말할 타이밍을 보아야 한다는 게 신기했다. A의 말이 멈추고, 드디어 B가 말할 차례였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B의 얼굴에도 이제 내 차례구나, 하는 표정이 보였다. B가 입을 떼고 말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래. 그럼 안녕. 잘 가.” A가 인사를 하더니 홱 돌아섰다. B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황당한 얼굴로 A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한 마디 뱉었다. “뭐야. 쟤.” 아마도 B는 다시는 A와 대화하지 않았을 듯싶다.

이미지 출처=Pixabay.com
이미지 출처=Pixabay.com

입이 있으면 누구나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라는 게 입이 있다고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말’은 기회가 오지 않으면 할 수 없다.

‘말’은 기본적으로 소통을 위해 필요하다. 말을 하기 위해선 최소 두 사람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아 이야기한다고 하여도 ‘말’의 균형과 무게는 다를 수 있다. 대화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말과 대화의 질은 달라진다. 일방적일 수도, 강압적일 수도, 상호적일 수도 있다. 일방적일 때만큼 재미없는 말이 없다.

한 친구가 친구 모임에 다녀와서 울분을 토하며 전화를 했던 적이 있었다. C가 4시간 동안 자기 이야기만 하다 갔다고 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이라 다른 친구 이야기도 듣고 싶었는데 혼자 이야기하고 ‘안녕. 다시 보자. 너무 좋다’라고 말하고 가버렸다고 했다. 친구는 다신 C를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강압적일 때 말은 너와 나의 위치가 다르다는 아주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신문 사건, 사고를 장식하는 갑질 논란 기사를 보면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말을 뱉는 사람들이 많다.

<낱말 공장 나라>라는 동화가 있다. ‘낱말 공장 나라’에는 거대한 낱말 공장이 있다. 사람들은 낱말 공장에서 낱말을 사고, 산 낱말을 삼켜야만 낱말을 사용할 수 있다. 낱말의 가격도 천차만별이라 가난한 사람들은 비싼 낱말을 살 수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침묵하게 된다. 사람들은 낱말을 쓰레기통에서 줍거나 바람에 날리는 낱말을 곤충망으로 잡는다. 이렇게 주운 쓸모없고, 의미 없는 낱말뿐이다. 낱말 공장에선 봄이 되면 봄맞이 세일을 하는데 세일 때 나오는 낱말은 대부분 쓸모없는 낱말이다.

이미지 출처=Pixabay.com
이미지 출처=Pixabay.com

‘낱말 공장 나라’에서 마음껏 말하고 떠들 수 있는 사람은 부자뿐이다. 흙수저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할 수 없다. 말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권리가 아니다. 여기서 말은 곧 권력이고, 돈이다. 권력도 없고, 돈도 없는 사람들은 부당한 일을 당해도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침묵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 된다.

생각해 보니 우린 쭉 ‘낱말 공장 나라’에 살았다. 우리 역사가 그렇다. 1900년대 근대로 들어서던 시기부터 이야기해 보아도 말은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일제강점기에서 광복을 거쳐 정부를 수립하고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 지금에 이르렀지만, 말에 대한 갈증은 해소되지 않고 돌덩이처럼 단단해져 가슴에 남는다. 가슴에 있는 단단해진 돌을 꺼내 손에 들게 되는 순간 우린 더 폭발적으로 말을 하게 된다.

말이 단단한 돌이 되어 가슴에 남지 않으려면 상호적 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상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귀담아듣고, 내 이야기를 줄이고, 상대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생각하고, 진심을 담아 그에 답하는 게 대화의 기본이며 정석이다. 우리 대화의 기본과 정석을 지키고 있는지 나의 대화 방식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 소리 없는 아우성-유치환의 ‘깃발’에서 인용

김은희, 소설가이며 동화작가 (12월 23일 생), 대전일보 신춘문예 소설 등단, 국제신문 신춘문예 동화 당선, 제30회 눈높이아동문학대전 아동문학 부문 대상 수상.   

  ☞ 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미디어스’를 만나보세요~ 구독하기 클릭!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