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광은 칼럼] 8월 14일 경북의 목장에서 탈출한 암사자가 사살당한 소식은 이미 널리 알려졌고, 안타까워하는 목소리에 실린 비판들이 제기되었다. 철제 우리의 자물쇠가 풀어진 사이 사자는 밖으로 나왔고 불과 10여 미터 떨어진 수풀에서 불볕을 피해 엎드려 있었다고 한다. 포획이 아닌 사살을 택할 만큼 긴박한 상황이었는지 논란이 일어났다.

나는 사자의 죽음에 앞서 사자가 살아내야만 했던 생애의 기구한 곡절에 통탄스러웠다. 지구 반대쪽 어딘지도 모를 곳에 끌려와 비좁은 철창에서 이십 년이나 갇혀 지내다 고작 몇 발짝만큼 자유를 누린 대가로 죽어야 했던 비극적인 축생의 한평생을 상상하니 그 죽음에 더욱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동물 단체에서 지적하는 근원적 문제들, 제대로 된 규제 없이 사육에 적합하지 않은 동물을 사설 목장에서 키울 수 있는 구멍 난 제도를 포함한 현실이 우선시 되어야 할 쟁점이라고 동의한다.

14일 오전 경북 고령군 덕곡면 한 목장에서 탈출한 암사자가 산으로 도주해 있다. [경북소방본부 제공=연합뉴스]
14일 오전 경북 고령군 덕곡면 한 목장에서 탈출한 암사자가 산으로 도주해 있다. [경북소방본부 제공=연합뉴스]

현장에 투입된 당국 인력들은 사살 결정의 취지를 설명했다. 마취 총을 쏜다고 해도 포획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인명 피해를 예방했다고 한다. 정론일 것이다. 단순 명쾌한 설명이지만 그래서 흔쾌히 수긍하고 넘어가고 싶지는 않다. 어떤 생명을 처분하는 결정이 명쾌할 수 있다는 건 그 생명의 무게를 재는 저울이 부서져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사자의 사육을 방치한 제도와 사살을 결정한 선택은 동떨어져 있지 않다. 그건 인간의 존재를 절대적 중심에 놓는 것이고 그 결과로서 동물의 존재가 경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일과 비슷한 소식은 반복해서 들려왔었다. 몇 년 전엔 대전 동물원에서 풀려난 퓨마가 사살당한 적이 있고 그 몇 년 전엔 공항 측 실수로 케이지에서 풀려 난 강아지가 활주로에서 엽총에 맞아 죽었다. 그때마다 논란과 찬반 여론이 일어났다. 뿐만 아니라 이 사회엔 길고양이와 유기견과 반려견, 방사된 반달곰처럼 인간의 삶과 동물의 존재가 부딪히는 더 많은 쟁점이 상존한다. 저 무 자른 듯 단순 명쾌한 사고의 칼질에 제동을 거는 논리는 앞으로 생길 또 다른 사건들을 예비하는 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사람의 목숨은 동물의 목숨보다 무겁다. 나는 그것을 부정하는 입장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람과 동물은 평등하지 않으니 동물의 목숨은 인간의 필요와 신속하게 교환하면 그만인 것일까? 내 윤리적 직관으론 그렇지 않다. 동물과 사람이 평등하지 않다는 건 동물은 이유가 있으면 죽일 수 있지만 사람은 이유 불문하고 죽여선 안 된다는 정도의 차이일 텐데, 충분한 이유 없이 동물을 죽여도 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사람만큼은 아닐지라도 생명엔 무게가 있다. 인간은 다른 모든 생물보다 인지 능력이 우수한 종족이다. 이 사실을 인간이 지구의 주인이라는 식의 우열관계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지구를 운영하는 입지에 있는 인간이 자기 보전 능력이 떨어지는 다른 생물들에 일정 부분 책임을 가진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20일 대전오월드 입구에 퓨마 '뽀롱이'를 추모하는 조화와 사진, 메모지가 놓여있다. 2018.9.20. (대전=연합뉴스)
20일 대전오월드 입구에 퓨마 '뽀롱이'를 추모하는 조화와 사진, 메모지가 놓여있다. 2018.9.20. (대전=연합뉴스)

인간은 동물의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먹으며 살아간다. 다른 종족을 향한 이타심은 선택적으로 발휘되기 마련이다. 누군가 "사자 한 마리 죽이는 건 불쌍하고, 네가 주말마다 먹는 치킨을 위해 닭들이 떼죽음 당하는 건 괜찮으냐?" 되묻는다면 확실히 반론할 논리가 떠오르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사람이 아닌 것의 생명을 고민하자면서 사람과 닮았고 사람과 가까운 것의 목숨에 우선순위를 매기는 건지도 모른다. 이건 사람과 동물의 불평등한 지위 바깥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그 불평등에 관심을 가지면서 생길 수밖에 없는 모순이다. 동물권 문제는 그래서 복잡하다. 타인이 나와 같은 문제의식을 갖추지 않았다고 해서 도덕적 우월감을 과시해선 안 될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반대로 저 모순을 위선으로 몰고 가며 문제의식을 짓뭉개는 태도도 타당하지 않다. 그건 현실적으로 더 해롭다. 설령 모든 생물을 향해 이타심을 발휘하지 못하더라도 어떤 생물에게도 이타심을 발휘하지 않는 것보다는 이롭다. 그리고 이 선택적 의지를 포기하지 않고 현실을 돌아보는 태도에, 내 곁의 생명을 함부로 때리지 않고 더 많은 종족을 향한 이타심을 계발하고 생태계를 보전하는 시발점이 걸려 있다고 말하고 싶다. 유기견을 가정에 맞아들인 사람들이 더 많은 종의 동물이 당하는 불행에 관심을 갖고, 가장 낮은 수준의 채식주의를 시작한 사람들이 더 높은 수준의 채식주의로 나아가는 일은 드물지 않다. 그것은 말 못 하는 짐승이라는 '약자'를 대하는 한 인간의 의식세계를 알려주는 잣대이기도 하다.

14일 오전 경북 고령군 한 목장에서 암사자가 탈출했다가 사살됐다. 사진은 해당 사자를 키우던 우리. (고령=연합뉴스)
14일 오전 경북 고령군 한 목장에서 암사자가 탈출했다가 사살됐다. 사진은 해당 사자를 키우던 우리. (고령=연합뉴스)

이 글은 당국의 사살 결정의 타당성을 논하려 쓴 글이 아니다. 말했듯이 사살이냐 아니냐에 앞서 더 본질적인 현실이 있고, 사자는 맹수이기 때문에 인명 피해의 가능성을 우선시해야 하는 것도 맞다. 하지만 종국에는 그런 결정에 도달하더라도, 가능하다면 인간의 안전과 동물의 처지를 함께 고려해 보자는 선택지를 챙기고 갈 수는 있다. 이 인간의 세상에서 동물의 존엄을 생각하는 모순을 용납하는 사회적 합의가 유사한 상황이 재발하는 걸 막도록 제도를 고치는 데도 인식적 지지대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동물을 고민 없이 다뤄도 된다고 믿는 사회의 밑바닥엔 동물을 넘어 생명에 대한 경시가 고여 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인간의 잣대를 벗어나 살아가기 힘들다. 그것이 그 잣대 안에서의 고민을 비웃거나 포기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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