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림에 울고 있는 조카를 위해 빵 한 조각 훔치다가 19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후, 신의 구원을 받아 성자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읽어봤음직한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장발장)>이 뮤지컬 영화로 화려하게 재탄생하였다.

뮤지컬 자체가 일반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오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영화와 달리 뮤지컬은 서민에게 부담이 되는 고가의 티켓 값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격 뮤지컬 영화를 표방한 <레미제라블>을 통해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휴 잭맨, 앤 해서웨이, 러셀 크로우, 아만다 사이프리드 등 초호화 배우들이 총출동하는 고품격 뮤지컬을 스크린에서 즐길 수 있게 됐다.

영화 <레미제라블>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익숙한 스토리의 향연이다. 다만, 장발장이 빵을 훔치다가 체포되는 과정은 생략됐다. 대신 형식적 법치주의 숭배자 자베르(러셀 크로우 분) 경감의 살벌한 감시 아래 죄수들과 함께 고된 노역에 시달리는 장발장(휴 잭맨 분)의 비극을 스펙터클하게 보여준다.

잘 알려진 대로 초반 휴잭맨과 러셀 크로우가 노랫말로 주고받는 대사는, 평생을 쫒기고 쫓아다니는 숙적 관계의 팽배한 긴장감보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헛웃음이 나오게 할 정도다. 왜 로튼토마토가 ‘휴 잭맨의 좋은 연기는 우리가 참혹한 뮤지컬넘버들을 견뎌야 할 이유’라는 평을 남기고, 차라리 휴 잭맨과 러셀 크로우에게 노래를 시키지 않았으면 더 좋은 영화가 될 수 있었을 거라는 평이 자자한지를 여실히 일깨워준 대목이기도 하다.

다행히도 휴 잭맨과 러셀 크로우는 시간이 지날수록 안정되고 매력적인 아리아로 말 그대로 초반 참담한 만담을 보는 것 같은 악몽을 잊게 한다. 한편 <레미제라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아리아를 선사한 배우는 따로 있었다.

<레미제라블>에서 앤 해서웨이는 여타 주연들에 비해 비교적 적은 비중을 차지한다. 극에 있어서 장발장을 궁지로 몰아가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앤 해서웨이가 맡은 판틴의 ‘I dreamed a dream’이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노래 중에 가장 큰 사랑받는 곡이긴 하지만, 앤 해서웨이가 2013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이 아닌 여우조연상 후보로 등극한 것도 이 때문이다.

<레미제라블>의 판틴은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지만, 자신과 딸을 버리고 도망간 남편과 그녀의 아름다움을 시기하는 여자들의 질투로 한순간에 나락에 빠진 여자다. 탐욕스러운 테나르디에 부부에게 맡긴 딸 코제트를 위해 풍성한 머리도 자르고 몸까지 팔게 된 비참한 신세를 한탄하는 판틴의 아리아는 관객의 눈시울을 뜨겁게 적시는 명장면이다. 그리고 앤 해서웨이는 브로드웨이 출신 배우답게 아름다운 노래솜씨와 빼어난 감정 연기로 절망에 빠진 판틴 그 자체를 리얼하게 소화해낸다. 우리나라 관객에게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깜찍한 인형 외모로만 인식되었던 앤 해서웨이의 뛰어난 연기력을 입증하는 순간이다.

반면 판틴의 딸이자 훗날 장발장의 양딸이 되는 코제트(아만다 사이프리드 분)는 청아한 목소리 외에는 이렇다 할 존재감을 보여주지 않는다. <레미제라블>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코제트와 마리우스(에디 레드메인 분) 그리고 에포닌(사만다 바크스 분)으로 이뤄지는 삼각관계는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사랑보다, 마리우스를 짝사랑하는 에포닌의 감정에 더 몰입될 정도다. 귀족 집안 출신임에도 혁명 의지가 강렬한 마리우스가 사랑하는 운명은 코제트이지만, 참으로 슬프게도 마리우스를 대신해 기어이 총탄을 맞아줄 수 있는 에포닌의 헌신이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에포닌 뿐만 아니라 <레미제라블>의 주인공들은 자베르와 코제트를 제외하고,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총을 맞아줄 수 있는 박애주의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딸 코제트를 위해 사지에 뛰어들 수 있는 판틴의 모성애와 어린 나이에도 민중 운동에 누구보다 앞장 서는 소년, 그리고 ‘법질서’를 앞세우며 자신을 평생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자베르를 용서할 수 있는 장발장까지. 애초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의 굴레 속에서 태어난 그들은 그럼에도 자신의 비극적인 신세만을 탓하고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몸을 내던지고, 자신을 위기에 몰아넣은 이들조차 용서하고 감싸주며 그토록 이루고자하는 꿈을 위해 돌진한다.

힘없는 약자를 착취하는 부모의 죄를 모두가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운동으로 대신 갚고자 하였던 마리우스와 에포닌 그리고 동료들의 투쟁은 정작 다수 민중들의 외면 속에 미완으로 그치고 만다.

그러나 자기에게 닥친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자신의 적까지 포용할 줄 아는 장발장의 신화가 이어지는 한, 어두운 밤에도 ‘그래도 내일이 올 것’이라는 희망의 불씨는 꺼지지 않을 것이다. 아카데미 4관왕에 빛나는 <킹스 스피치> 톰 후퍼 감독 작품답게 골든 글로브보다 아카데미가 더 좋아할 것 같은 감동적인 대서사시다.

한 줄 평: 절망 속에서도 이어지는 희망의 노 젓기. 우리 시대 필요한 아카데미 스타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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