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 없는 삶이란 얼마나 고통스러울 것인가. 성장기부터 성인이 되어서도 한결같은 하류인생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제자리인 삶. 희망도, 반전도 없는 삶 위로 아버지의 비루한 인생이 유전될 뿐이다. 게다가 인성조차 엉망이다. 도무지 장점이라고는 발견할 수 없는 한 남자의 인생에서 우리는 아주 잔인한 카타르시스를 얻게 된다. 드라마 스페셜 상권이는 지독히도 운도, 복도 없는 한 남자의 나흘간의 이야기다.

이 드라마는 다소 나른해 보이는 경찰서 취조실에서 시작한다. 따뜻한 설렁탕 국물에 빠진 파리를 바라보는 한 사내가 있다. 눈가는 퍼렇게 멍들어 있지만 피해자가 아니라 살인용의자 상권이다.

상권이는 한마디로 개차반 인생이다. 항상 이겨내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시고, 당연히 술로 인한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맨 정신일 때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다. 너무 쉽게 흥분하고, 그 흥분은 다짜고짜 분노로 이어진다. 그나마 건설기술이 있어서 일을 해오고 있지만 결국 술로 인해서 일자리마저 잃고 만다. 이렇게 불운한 사람에게 불행은 반드시 겹쳐서 오기 마련이다. 상권은 일자리를 잃기 전에 사실혼 관계인 인숙의 가게 인수 중도금마저도 잃은 상황이었다.

이 드라마가 따뜻한 미담을 소개하려고 했다면 이쯤에서 헌신적이고, 마음씨 착한 아내가 등장하겠지만 어디 현실이 그런가. 인숙은 사내구실조차 못하는 상권을 이미 오래 전부터 배신해오고 있었다. 인숙은 몇 달 전 집주인으로부터 월세방 보증금을 빼돌렸고, 상권이 매달 준 월세조차 떼어먹었다. 결국 상권이 잠든 새 야반도주해버렸다.

툭하면 성질을 부리고, 거칠게 분노를 표출하던 상권이지만 이 상황에서 이상하게도 화를 내지 않는다. 배신감에 분노하기보다 상권은 아내를 되찾고 싶어 한다. 인숙을 찾아 노름방을 뒤질 때에도 아주 거친 모습을 보이지만 인숙에게는 끝까지 사정조로 일관한다. 참 이상한 일이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상권의 아버지는 월남전에 파병되었다가 탈영했지만 툭하면 월남전의 영웅담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그 영웅담은 허술하기 짝이 없어서 듣는 이가 금세 오류를 발견한다. 상권아버지는 탈영이라는 불명예 때문인지 아니면 전쟁 자체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누군가 자기 이야기에 토를 달면 불같이 화를 내고, 그것은 곧바로 가정폭력으로 이어진다. 견디다 못한 상권의 엄마는 어느 날 집을 나가고 말았다.

보통은 폭력 아버지 밑에서 또 다른 가정 폭력이 나오는 법인데, 상권은 다행스럽게도 가정폭력을 배우진 않았다. 다만 가정폭력만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성실하고 믿음직한 가장이 됐어야 했지만 착한 여자라도 등을 돌릴 만큼 상권이는 엉망으로 삶을 살고 있다. 엄마를 떠나게 한 아버지를 원망하지만 결국 자신도 아버지와 똑같은 남자가 돼버린 상권이다. 안타깝다는 말은 너무도 한가로운 표현에 불과하다.

그러나 상권을 기다리고 있던 불행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전날 밤 기억이 전혀 없을 정도로 돈을 잃어버린 상권은 살인용의자로 경찰에 붙잡혀간다. 상권의 유일한 친구인 종오의 신고로 수갑을 차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범인은 신고를 한 종오였다. 얼마 되지 않은 상권의 돈을 차지하려다가 우발적인 범행을 저질렀고, 그것을 상권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다. 돈 잃고, 마누라 잃고, 친구까지 잃은 절망적인 상권이다.

다행히도 상권이 괴롭혀왔던 한 조선족 목격자의 진술로 인해 진범이 잡혀 풀려나게 되지만 상권은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않는다. 아니 그보다도 종오에 대해 전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이해한다는 말을 할 정도다. 돈 때문에 유일한 친구였던 종오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내의 배신에 대한 반응과 거의 같다. 상권의 현실부정은 상당히 깊은 상징성을 갖고 있다.

믿어왔던 친구의 배신과 증오의 대상이었던 조선족의 친절. 그 사이에서 상권은 대단히 혼란스럽다. 상권이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찾아간 곳은 어머니의 병실. 답답한 마음에 말없이 누워있는 어머니를 거칠게 흔들자 어머니는 대답 대신 상권의 손 한 번 잡아주고 세상을 떠난다. 그렇게 상권의 길고 험했던 며칠이 저문다.

드라마 스페셜 상권이는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떠오르게 한다. 첫 장면에 나왔던 설렁탕은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 대한 오마쥬이자 복선이었다. 현진건의 김첨지였더라도 잘 어울렸을 배우 이문식이 최초로 드라마 주연을 맡아 상권 역을 소화해냈다. 도로에 멍하게 주저앉은 모습은 오래 기억에 남을 장면이었다. 오랜만에 대하는 리얼리즘 드라마다. 아프고 쓰린 이야기지만 이 시대의 상권이를 찾아내는 것, 외면하지 않는 것,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그런 것들이 문학 혹은 드라마가 잊지 말아야 할 임무일 것이다. 최근 드라마 스페셜을 통해서 진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유보라 작가의 다음 이야기가 기다려진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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