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광은 칼럼] 지난 2일, 한국일보에서 ‘[HI★초점] 장원영 향한 악플, 악습의 되풀이’란 기사가 나왔다. 제목대로 특정 아이돌을 향한 악플이 심각하다고 호소하는 내용이다. 기사에선 악플 내용이 소개되며 참담하다는 부연이 나오고, 포털 사이트 연예 기사 댓글창 폐쇄와 함께 유튜브 채널 등에서 악플이 들끓는다는 시의적 지적도 있다. 누구나 동감할 기사다. 악플이 나쁘단 걸 부정할 사람은 없고, 해당 아이돌은 선정적 비난 여론에 오르내리는 경우가 많은 걸로 보인다. 곱씹어 보고 싶은 건 저 표제가 암시하는 바다. 악습의 되풀이. 무엇이 되풀이되고 있단 말일까.

기사는 고 설리와 고 구하라 씨를 거명한다. 두 사람을 비보로 몰고 간 악플이 해당 아이돌에 대해 반복되고 있다는 말이다. 기사는 이런 문장으로 끝난다. “악습을 또 다시 방치하기엔 우린 이미 너무 뼈아픈 과거를 겪었다.” 이 기사뿐만이 아니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해당 아이돌을 설리, 구하라에 빗대며 악플러들을 지탄하는 글은 이미 여기저기 올라와 있다. 한편, 얼마 전엔 모 평론가가 다른 아이돌의 MV에 관한 논란에 설리를 거명하며 변호하는 의견을 펼치기도 했다. 바로 이런 지점들, 한국일보 기사를 떠나서, 고인들의 이름이 세상에 불려 오는 맥락과 공론을 쓰고 소비하는 사람들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생각해 보려 한다.

고인이 된 가수 설리(왼쪽)와  구하라[연합뉴스 자료사진]
고인이 된 가수 설리(왼쪽)와 구하라[연합뉴스 자료사진]

두 사람의 부고는 사람들에게 충격과 슬픔을 줬다. 생전에 많은 악플을 받아 냈던 이들이고, 구하라 씨의 경우 악플을 겪는 고통을 호소한 적도 있다. 사람들이 그들을 통해 쉽게 뱉는 말의 폭력성을 떠올리거나 경계하는 건 이해할만하다. 하지만 고인들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 그들의 삶과 죽음을 어떻게 존중할 것인지는 별개의 사유가 필요한 대목이다.

두 사람이 인터넷 게시판과 언론에 불려 오는 행간은 어떤 양상으로 정해진 경우가 많다. 앞서 말한 기사처럼 악플의 희생자로 호명하는 양상이 압도적인데, 그렇기에 “누가” 그들을 비보로 몰아갔는지 따지거나 비난하는 말이 뒤따르곤 한다. 그 범인 찾기는 저마다의 입장과 소속 집단에 의거한 결론으로 흐르거나 자신이 주장하는 바의 정서적 논거로 사용되곤 한다. 어떤 이들은 여자를 질투하는 여자들이 범인이라고 말하고, 다른 이들은 여자를 혐오하는 남자들이 범인이라고 말한다. 혹은 두 사람을 불러오며 당신들은 이 사람도 그들처럼 만들 셈이냐고 규탄하며 누군가를 방어하는 사람도 있다.

고인들이 세상을 떠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유서가 공개되지 않았고, 구하라 씨는 신변에 관해 또 다른 사건이 있었다. 설리 씨의 경우 많은 악플과 논란을 겪었지만, 정말로 그것이 이유인지, 그것만이 이유인지 알 수 없는 상태다. 게다가, 그들에게 비난을 던진 이들은 누구라고 편 가르기로 나누기도 힘들다. 이건 고인의 생전 인스타그램 포스트나 사진 화보 등이 각 커뮤니티로 퍼져 파생 게시물이 나왔던 기록을 확인해 보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고인들의 부고를 악플과 곧장 연관 짓거나 그 맥락으로만 규정하고 심지어 비극의 아이콘으로 만들며 소환한다.

[연합뉴스TV 제공]
[연합뉴스TV 제공]

한 인간을 존중하는 태도는 무엇일까. 요절은 안타까운 사건임에 틀림없지만, 죽음은 삶이 우선하기에 뒤따르고, 고인들은 자신들의 삶을 통해 나름의 족적과 많은 이들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남겼다. 현재 공론장엔 편향이 있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고 거기엔 어떤 의의가 있었는지는 말해지지 않는다. 고인의 삶을 성찰하는 대신 비극으로만 고인을 말한다. 타인을 향한 비난의 위험성을 말하면서, 진영논리에 따라 상대 집단을 비난하기 위해 고인의 이름을 빌리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강조되는 추모의 어조와는 달리, 하나의 삶을 온전히 기억하는 방식도 아니고, 죽음을 다른 무엇으로 맥락화, 수단화하지 않은 채 그 자체로 존중하는 길도 아니다.

언론의 윤리는 무엇을 말하는지 그 내용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말하는지 태도에 달려 있다.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가려내는 정직함과 신중함이 그 윤리의 일부를 이룬다. 특정한 유명인에 대한 악플은 그 자체로 비판하고 조명할 수 있다. 어떤 전례로서 과거 다른 연예인들이 겪었던 사례를 인용하는 것과 고인을 산 사람과 겹쳐 놓고 동일시하는 어조를 취하는 건 다르다. 비록 그런 방식으로 말했을 때 훨씬 큰 정서적 호소력을 줄 수 있을지라도, 그것이 과연 정당하고 신중한 논조인지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악습의 되풀이를 끊는 것도 중요하지만, 고인의 이름을 소비하는 인습이 자각되지 않은 채 되풀이된다면 그것을 돌아보는 것도 언론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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