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김장철이 되면 몸이 안다. 김장 준비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뼈마디가 욱신거리고 아고고고, 절로 앓는 소리가 난다. 김장 증후군이다.

매해 김장은 어머니를 주축으로 나와 언니가 보조를 맡는다. 김장은 하는 날도 일이 많지만 하기 전부터 준비해야 할 것도 많다. 시장을 다니며 김장 재료를 준비하는 일은 어머니와 나의 몫이다. 어머니가 김장에 필요한 재료 리스트를 뽑아 필요한 양을 정하면 나는 일주일 동안 시장을 같이 다닌다. 김장에 필요한 고춧가루는 이미 여름이 사서 말린 후 곱게 빻아 놓은 상태고, 새우젓은 강화도로 젓갈을 사러 가는 이모에게 당부해 받아놓은 상태였다. 쑥갓, 생강, 파, 멸치젓 등을 사기 위해 나는 어머니와 시장 투어를 한다. 좋은 재료를 선점하기 위해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인다.

배추 고르는 시민 [연합뉴스 자료사진]
배추 고르는 시민 [연합뉴스 자료사진]

시장은 장날이라 장터와 골목마다 펼쳐놓은 좌판에 정신이 없고, 여기저기서 손님을 부르고, 흥정하는 소리에 시끌벅적하다. 옛날 장터의 모습과 달리 무작정 값을 깎아 달라고 억지를 부리는 손님과 얼굴 붉히는 일은 없다. 골목에 앉은 할머니들은 밭에서 기른 채소를 펼쳐놓고 옆자리 할머니의 안부를 묻는다. 어머니를 따라 시장을 돌다 보면 장바구니에 가득 김장 재료가 담긴다. 시장에서 산 재료를 차에 가져다 놓으면 다시 장보기가 시작된다. 장보기 2차전은 마트에서 시작된다. 시장 상품보다 마트 상품이 질이 좋으면 마트에서 구매하게 된다. 또 어머니는 질과는 상관없이 시장에서 사야 하는 것과 마트에서 사야 하는 게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온다고 모든 장보기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내일 사야 하는 게 있고, 김장하기 하루 전날 살 게 또 있다. 장보기는 김장이 시작되기 하루 전까지 계속된다. 장을 보는 틈 사이사이에 김장을 위해 준비 작업을 해놓아야 한다. 마늘을 까서 갈아놓고, 깨를 빻아 놓고, 무를 자르고, 파를 다듬어 잘라 놓아야 한다. 양념에 들어가는 생태와 배가 생략되었지만 일의 절차가 생략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몇 해 전부터 절임 배추를 사기 시작해 배추 절이는 일이 생략되어 한결 살 것 같았다. 배추를 절이는 일이 김장의 반을 차지하는 가장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흙이 묻은 배추를 씻고 반으로 잘라 다시 씻고, 치맛단을 뒤집듯 일일이 배춧잎을 들어 소금을 뿌려주고, 몇 시간 엎드려 닦은 욕조에 담아 물을 맞추고 소금을 뿌린다. 물론 욕실은 하루 전에 물건을 모두 빼고, 소독하고, 닦아 놓고 사용까지 금지했기 때문에 내 방보다 깨끗했다. 욕조는 처음부터 배추만을 담는 용도로 사용되도록 만들어진 커다란 볼의 운명을 타고난 것처럼 담대해 보였다. 배추를 절이는 과정은 말할 수 없이 고되다. 두 시간마다 뒤집고, 위 아래 배추 위치를 바꾸는 일은 가족에 대한 애정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김장 재료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제공=연합뉴스]
김장 재료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제공=연합뉴스]

연례행사처럼 치러지던 김장을 쉴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어머니가 허리 수술을 해야 했다. 오래전에 다쳤던 허리를 사는 게 바빠 제대로 치료받지 않고 놔두었던 것이 병을 만들었다. 의사 선생님도 무리하지 말라고 했으므로 당연히 김장은 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어머니는 당연하다는 듯 김장 계획에 대해 말했다. 허리 수술을 해야 해서 김장 날짜를 당겨야겠다는 말에 화가 났다. 김장 한 해 안 한다고 무슨 큰일이 나냐고 말했지만 도통 들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럼 혼자라도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듣지 않았다. 기어코 김장을 하고 수술 받으러 갔다.

얼마 전 친구들을 만났다. 몇 해 만나지 못해 할 이야기가 많았다.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 중에 김장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누구는 오고 누구는 오지 않고, 누구는 와도 일을 하지 않고, 누구는 김장이 끝나면 나타나 삶은 고기에 겉절이만 맛있게 먹고 가고, 줄인다고 줄였는데 여전히 몇십 포기를 해야 하고, 허리가 끊어질 것 같고, 팔 아픈 건 말할 필요도 없고, 끝나고 집에 오면 죽을 것 같고, 며칠씩 앓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쏟아졌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어머니는 김장을 위해 일 년을 공들인다. 봄에 마늘을 사서 말리고, 여름에 고추를 사서 말리고, 말린 고추를 방앗간 앞에서 몇 시간 줄을 서 기다린 끝에 빻아서 가져오고, 가을이 되면 싱싱한 새우로 만든 젓갈을 사러 간다. 그러니까 어머니에게 김장은 한 해의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마침표와 같다.

 

대장정 끝에 먹는 삶은 돼지 목살과 굴이 잔뜩 든 겉절이는 그야말로 꿀맛이다. 고단함이 입에서 녹는다. 이게 함정이다. 굴을 찾아 겉절이에 얹어주던 어머니가 중대 발표를 했다. 김장은 올해가 마지막이라고. 올해 배추가 유달리 달다.

김은희, 소설가이며 동화작가 (12월 23일 생), 대전일보 신춘문예 소설 등단, 국제신문 신춘문예 동화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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