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고브릭의 실눈뜨기]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배우들에게 독특하게 대본 리딩을 시키는 걸로 유명하다. 전화번호부를 읽듯 감정을 배제한 채 몇 시간이고 건조하게 대본만 읽게 한다. 그리고 촬영 현장에서 처음 감정을 넣는데, 이때 배우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예측 불가한 움직임과 감정, 액션과 리액션을 포착한다. 자신도 우연을 포착하는 작업을 해왔다고 말한 감독이 영화 제목에 ‘우연’을 내세운 건 자신의 감독론을 펼치겠다는 포부로도 볼 수 있다.

사고(Incident)와 우연(Co-incident)의 차이

세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우연과 상상>에서 말하는 ‘우연’은 긍정적이고 영화적인 어떤 것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1부 “마법(보다 불확실한 것)”에서 메이코는 친한 친구 츠구미의 썸남이 사실 헤어진 연인인 카즈아키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2부 “문은 열어둔 채로”에서는 나오가 퇴근길 버스에서 기억하기 싫은 과거의 한 사건을 주도한 사사키를 만난다.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에게는 과거의 실패와 긴밀히 맞닿아 있는 이 만남은 현재의 평온함에 균열을 불러온다는 점에서 사고(Incident)에 가깝다.

우연 같은 사고를 수습하는 건 ‘상상’이다. 수습할 수 있는 이유는 어찌할 수 없는 우연과 달리 상상은 의지에 따라 다른 형태로 뻗어나가는 덕분이다. 1부에서 메이코는 츠구미의 이야기를 듣고 늦은 밤 카즈아키의 사무실로 찾아간다. 메이코의 바람으로 다시 사랑받지 못할 만큼 상처받았다는 그에게 메이코는 ‘돈 많은 부자와 자보고 싶었다’, ‘관계에서 성인용품보다 만족스럽지 않았다’처럼 독한 말을 쏟아낸다.

영화 〈우연과 상상〉 스틸 이미지
영화 〈우연과 상상〉 스틸 이미지

다음날 우연히 마주한 삼자대면 상황에서 메이코는 츠구미 앞에서 카즈아키와의 관계를 털어놓고 다시 시작해보자는 상상을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는다. 이 상상 속에서 카즈아키는 메이코에게 흔들리지만 츠구미를 따라 자리를 떠난다. 메이코가 전날 폭언을 쏟아내면서도 사실 카즈아키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사실과 동시에 이미 그 사랑이 다시 시작될 수 없다는 깨달음이 상상에 반영된 것이다.

반면 2부에서는 상상이 멈춰선 현실이 그려진다. 5년 전, 나오는 섹스파트너인 사사키의 부탁으로 그가 앙심을 품은 세가와 교수를 유혹하려다가 작은 실수를 하는 바람에 이혼당하고 세가와 교수도 교단을 떠난다. 그후 사사키는 출판사의 문학 담당 편집자가 되었고, 나오는 교열 일을 한다. 나오는 사사키에게 제안이며 동시에 오래 품어온 상상을 공유한다. 세가와 교수가 글을 쓰고 네가 편집을 하고 내가 교열을 봐서 책을 한 권 만들자고.

사사키의 반응은 싸늘하다. 네가 이혼한 걸 내 탓으로 하는 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거라고. 교수와 협업하는 건 꿈도 꾸지 말라고. 본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사고(Incident)를 함께 하는 상상을 통해 우연(Co-incident)으로 바꾸려던 기회마저 박탈당한 나오는 결국 또 하나의 사고를 계획한다. 버스에서 내리기 전, 나오는 결혼을 앞두고 사사키에게 키스를 하고 명함을 건넨다. 연락하라는 나오의 말에 사사키는 멍한 표정을 짓는다. 사사키는 과연 나오에에게 연락을 할까. 버스가 내리막길을 지나 어두운 터널로 들어가는 장면으로 2부가 마무리된다. 사사키의 미래도 버스의 행로와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영화 〈우연과 상상〉 스틸 이미지
영화 〈우연과 상상〉 스틸 이미지

다시 확인하는 상상의 가능성

3부 ‘다시 한번’은 주인공인 나츠코는 20년 만에 고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한다. 나츠코가 간절히 만나고 싶던 유키는 동창회에 나오지 않았다. 포기하고 도쿄로 돌아가던 길에서 나츠코는 미카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다가 서로 동창이 아니며 유키라고 착각한 사람이 일면식도 없는 아야라는 걸 알게 된다. 당황스러운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날 사건은 역할극을 해보자는 아야의 제의를 통해 놀라운 단계로 나아간다.

1, 2부의 주요한 우연적 키워드를 반복한다. 나츠코가 품고 있는 지난 사랑에 대한 후회는 1부의 메이코가 느낀 감정이고, 남편에게 잘못 발송된 메시지를 받은 아야가 회복이 어려운 상처로 고통받는 건 2부에서 나오가 겪는 상황과 비슷하다. 3부는 이렇게 인생의 중요한 타이밍을 놓쳐 후회하거나, 상대가 원하는 대상이 되지 못했다는 슬픔을 간직한 두 인물을 통해 상상의 치유 가능성을 재확인한다.

이들이 택한 치유의 방법에서 서로에게 주어진 단서는 과거의 인물에 대한 간단한 묘사뿐이다. 이는 어찌 보면 영화의 제작과정과도 다르지 않다. 나츠코와 아야의 역할극은 대본을 통해 만들어진 가짜를 카메라에 담는 과정의 축소판이다. 그리고 카메라에 담긴 모습이 진짜가 아니라도 어떤 순간, 관객들은 깊은 영화적 감동을 느낀다. 3부의 엔딩에서 아야가 드디어 친구의 이름을 떠올리고 계단을 뛰어 올라가 나츠코를 껴안을 때처럼 말이다.

영화 〈우연과 상상〉 스틸 이미지
영화 〈우연과 상상〉 스틸 이미지

우연(Co-incident)이 행운(Fortune)으로 나아갈 때

하마구치 류스케의 또 다른 이력은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특히 <파도의 소리> 시리즈는 동일본대지진을 다룬 대표작이다. 하마구치 감독은 생존자들을 인터뷰하며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지진과 쓰나미 이후 나는 꿈을 꾼 거 같아요. 정말로 내가 그런 일을 겪었나 싶어요.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었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라고 말했다. 이 또한 ‘물리법칙을 어기지는 않지만, 현실이라고 믿기 힘든 사건’인 우연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을까.

<우연과 상상> 3부에서 나츠코와 아야가 재회하는 공간은 동일본대지진의 피해가 심각했던 센다이시의 센다이 역이다. 파도가 센다이를 휩쓸었던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영화상에서 두 사람에게 물리적 피해는 없었더라도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은 메시지와 제자리에서 벗어난 메시지라는 어긋난 삶의 한 시점은 두 사람에게 동일본을 휩쓴 쓰나미만큼, 어쩌면 더 압도적인 흔적을 남겼겠다고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우연이 사람을 괴롭게 만드는 건 모든 인과관계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모든 일을 우연이라고 믿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완전하지 않은 단서와 상상을 통해 어떻게든 사실에 접근하려고 노력하는 게 인간이다. 그래서 2부에서 나오가 5년 동안 받은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공유한 상상을 무참히 차단한 사사키는 어두운 터널로 향하게 된다. 지난 10월 29일 발생한 이태원 참사를 두고 사람이 모이면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말하는 건 모든 상상을 차단하고 인과관계를 부정해 우연을 사고로 머물게 만드는 비인간적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3부의 엔딩에서 번갈아 가며 역할극을 끝낸 나츠코와 아야는 처음 만났던 센다이 역 육교 위에서 헤어진다. 그렇게 집으로 향하던 아야는 뭔가 생각난 듯 계단을 숨 가쁘게 뛰어올라 나츠코를 붙잡고 20년 동안 잊고 있던 친구이름을 말해준다. 아야가 떠올린 친구의 이름은 ‘희망(望の)’이라는 의미의 노조미(のぞみ). 희망(노조미)을 함께 외치며 껴안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화면이 정지되고 영화의 크레딧이 오른다.

<우연과 상상>의 영어 제목은 ‘Wheel of Fortune and Fantasy’이다. 우연과 상상이 반복 반복되는 영화의 구조를 설명하고, 우연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 담긴 제목이다. 캐릭터(=상대방)에 감정을 이입하는 역지사지의 마음, 하마구치 감독의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성실한 관찰을 통해 사실이 아니라도 그에 근접하려는 노력이 있을 때 사고(Incident)가 우연(Co-incident)을 뛰어넘어 비로소 행운(Fortune)으로 나아간다. 그렇다면 우리 <우연과 상상>을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상상을 통해 우연에서 희망을 찾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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