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어떻게 하면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있나요, 라는 당황스러운 질문을 한 여자가 있었다. 그때 나는 무슨 대답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가당찮은 대답을 성의껏 했을 것이다. 대답은 기억나지 않지만 되물었던 질문은 기억한다. 그런데 그걸 왜 저한테 묻나요? 제가 다정해 보이나요? 여자가 고개를 끄떡이더니 대답했다. 나도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여자가 생각하기에 나는 다정한 사람처럼 보였던 모양이었다.

여자와의 첫 만남을 기억한다. 소설창작 수업에서였다. 긴장한 듯 입술을 살짝 말아 물고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웃으며 인사를 먼저 한 것도 나였고, 질문을 먼저 한 것도 나였다. 소설을 쓰고 싶은 이유에 관해 물었을 때 사랑 고백을 하듯 말했다. 소설이 좋아요. 항상 조용히 앉아 있다가도 소설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잔뜩 날 선 말투로 격앙된 어조로 작품 속 인물에 관한, 상황에 관한 문제점을 말했다.

이미지 출처=게티이미지뱅크​
이미지 출처=게티이미지뱅크​

내 눈에는 정말 열렬하게 소설을 사랑하는 여자의 모습처럼 보였는데 수업을 같이 듣는 사람들에겐 쓸데없이 까탈스러운 사람처럼 보였던지 수업은 같이 듣지만 가까워지려고는 하지 않았다. 여자는 혼자였고, 쓸쓸해 보였다. 마지막 수업이 있던 날 여자가 내게 다가왔다. 물어볼 게 있어요? 나는 당연히 소설에 관한 질문일 줄 알았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있나요?

여자와 헤어지고 나는 그대로 자리에 앉아 여자가 앉아 있던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다정한 사람. 입 안에서 ‘다정’이란 단어를 사탕처럼 굴려보았더니 정말 따뜻한 온기가 온몸으로 퍼지며 다정해지는 것 같았다. 훗, 하고 웃음이 났다.

나는 항상 예민하고 곤란한 아이였다. 분명 따뜻한 단어를 가슴에 품고 있었지만 쉽게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아이들과 친해지는 법도 잘 몰랐고, 관계를 유지하는 법도 몰랐다. 말을 하려고 하면 혀뿌리가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항상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표정은 얼음장처럼 차가워 보였고, 말투도 모난 사람처럼 뾰족했다. 물론 친한 사람들에겐 달랐다. 사랑스러운 사람이었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나의 매력은 친해져야만 알 수 있었으므로 아이들이 대부분 입을 다물고 표정 없이 앉아 있는 내가 매력적인 사람이란 것을 알기는 쉽지 않았다.

친구도 노력해야 생기고, 관계도 노력해야 만들고 유지될 수 있는 것이라는 걸 십 대가 되어서야 깨달았다. 쓸쓸하네, 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였다. 알게 되어도 실행하기까지는 쉽지 않았다. 나는 별다른 변화 없이 십 대가 되었고 혹독한 사춘기를 지났다. 십 대 후반, 이십 대에는 염세적인 성격까지 더해져 아주 곤란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비판적이다 못해 삐딱하게 세상을 바라보며 무슨 말만 하면 신경을 곤두세워 되받아쳤다. 다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이미지 출처=게티이미지뱅크​
이미지 출처=게티이미지뱅크​

내 안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따뜻한 말을 꺼내 나의 언어로 사용하고 말하기 시작한 것은 이십 대가 되어서였다. 함께 십 대를 보내고 이십 대를 건너는 친구들이 내 옆에서 나의 곤란한 성격을 받아주었다.

말없이 앉아 있어도 은희니까,

골똘히 다른 생각에 빠져 있어도 은희니까,

문학소녀처럼 염세적인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어도 은희니까,

기껏 입을 떼어 한 말이 어쭙잖은 철학자 흉내내도 은희니까,

어제는 좋았는데 오늘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앉아 있어도 은희니까,

라고 말하고 이해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행동이 밥맛없는 짓인데 그때는 몰랐다. 바늘 끝같이 예민한 나를 감싸주고 이해해준 친구들이 내 곁에 있었던 것은 행운이고 하늘에 감사할 일이다. 그들은 여전히 나의 지지자로 옆에 있다. 내 일을 자신들의 일처럼 기뻐하고 슬퍼해 주고 분노해주는 친구들이다. 내 안에 숨겨져 있는 다정함을 발견하고 끌어내 준 친구들이다. 그래서 나는 예민하지만 다정한 사람이 되었다. 요즘 애들의 표현대로 ‘츤데레’, 라고 말을 듣는 사람이 되었다.

물론 ‘저 못된 입’이라고 말하며 웃는 사람도 있지만 그들의 활짝 웃는 얼굴을 보면 나의 다정함을 알고 있는 표정이다. 지금은 나의 친구들이 힘들 때 찾아올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기 위해 다정한 나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찾아와 숨을 돌리고 간다. 나는 그들에게 다정하게 말한다.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나는 항상 네 편이라고.

나의 친구들이 그랬듯이 나는 당신이 다정한 사람임을 알고 있다. 당신 안에 다정한 단어가 세포보다 많이 있으며 다정한 단어는 따뜻한 온기를 지닌 언어가 되어 당신의 입을 통해 발화될 것을 알고 있다.

당신은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있어요, 라고 나는 여자에게 말해주었다.

김은희, 소설가이며 동화작가 (12월 23일 생), 대전일보 신춘문예 소설 등단, 국제신문 신춘문예 동화 당선.    

 ☞ 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미디어스’를 만나보세요~ 구독하기 클릭!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