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를 풀고 싶어 <저지 드레드>를 관람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제작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이 영화는 당연히 1995년에 실베스터 스탤론이 주연했던 동명작의 리메이크겠거니 했습니다. 막상 영화를 보기 시작하면서야 제 추측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건 제가 알고 있던 <저지 드레드>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더군요. 1995년에 영화화가 됐으나 실패작 수준에 머물렀던 <저지 드레드>는 원작이 따로 있었습니다. 영국의 만화에 등장했던 '저지 드레드'라는 캐릭터를 가져와서 할리우드가 영화로 만든 게 <저지 드레드>였죠. 그걸 이번에는 본토인 영국에서 재차 영화로 제작했습니다.

사실 오프닝에서 크레딧을 보면서부터 한 가지 의문을 품긴 했었습니다. 메이저 제작사가 전혀 관여하지 않아 조금은 생소한 사명만이 나열되고 있는 걸 봤거든요. 이것을 두고 의문을 품은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제가 기억하고 있는 1995년의 <저지 드레드>는 꽤 스케일이 큰 SF 액션영화였습니다. 그로부터 세월이 한참 흐른 2012년에 개봉하는 <저지 드레드>가 그걸 리메이크한다면 제작비가 치솟는 건 피할 수 없죠. 하지만 메이저 제작사가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의문을 넘어 우려를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랬던 우려를 감독인 피트 트래비스는 영리하게 잠재우고 있었습니다.

1995년과 2012년의 <저지 드레드>는 동일한 시대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간 배경은 아주 멀진 않은 미래에 폐허가 되고 온통 사막으로 둘러싸인 미국의 도시입니다 (참 희한하게도 원작의 발상지는 영국인데 배경은 예나 지금이나 미국입니다) '메가시티 원'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범죄가 활개를 치고 있는데, 반대급부로 그들을 벌하는 것이 업무인 '저지'가 있습니다. 이 저지는 현대의 경찰과는 달리 수사권과 판결권을 모두 가지고 있어 즉결처분이 가능합니다. 즉 위법행위를 한 것이 확인이 되면 그 자리에서 판결을 하고 사형까지 집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기본 설정까진 1995년작과 2012년작이 동일합니다. 달라지는 것은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중심에 놓은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입니다. 1995년의 <저지 드레드>는 주인공인 드레드에게 쌍둥이 형제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가 악랄한 범죄자로 출몰하면서 막을 올립니다. 반면에 2012년의 <저지 드레드>는 지금의 할렘에 비유할 수 있는 '피치트리스'라는 건물을 거점으로 신종마약을 파는 조직이 적입니다. 이후부터는 드레드에게 여자 파트너를 붙였다는 것만 동일할 뿐이지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뭐 1인 영웅이 기립하는 것도 같다면 같겠군요.

어쨌든 1995년의 SF 액션영화를 2012년에는 어떻게 그릴지 궁금했던 것은 이내 풀렸습니다. 연출을 맡은 피트 트래비스 이전에 각색을 한 알렉스 갈란드를 먼저 칭찬해야 할 것도 같은데, <저지 드레드>가 크게는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결국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는 건물 내부로만 국한하고 있습니다. 신참과 함께 피치트리스로 출동한 드레드는 마약 조직에 의해 밖으로 나가질 못한 채로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거든요. 물론 보스의 명을 받든 조직원들은 두 사람을 처단하기 위해 나서고, 드레드와 그의 파트너는 법을 집행함과 동시에 생존을 위한 사투를 묵묵히 벌입니다.

이건 분명 머리를 잘 쓴 거죠. <저지 드레드>는 휘황찬란한 건물이나 자동차, 각종 편의시설 그리고 아직은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첨단 무기 등이 런웨이를 걷지 않아도 얼마든지 SF 영화를 제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본격 SF 영화라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저지 드레드>처럼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한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따라서 구태여 거대규모의 제작비를 투자하지 않으니 메이저 제작사에게 손을 벌릴 필요도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발상의 전환을 가해서 재미를 본 영화로는 빈 디젤이 초창기에 주연했었던 <에일리언 2020>도 있습니다.

알렉스 갈란드의 시나리오를 손에 든 피트 트래비스는 이것을 십분 활용하면서 재미를 더했습니다. 그는 폐쇄된 공간을 무대로 삼아서 보여줄 수 있는 스릴과 액션을 창출하는 솜씨를 꽤 성공적이고 거침없이 발휘하고 있습니다. 특히 아슬아슬한 수위에 달한 폭력성을 드러내는 데 적극적이라 시각적 쾌감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전작인 <밴티지 포인트 >도 나쁘지 않았는데 이번에 <저지 드레드>를 보니 피트 트래비스의 미래를 한번 눈여겨봐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종종 과도하게 재주를 부리려고 애쓰는 장면은 불필요하게 느껴지고 거추장스러웠긴 했지만, 이건 <밴티지 포인트>에서도 엿보였던 시도라서 크게 반감을 가질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언젠가는 그만의 특색으로 자리할 수도 있겠죠.

한 가지 아쉬운 건 1995년의 <저지 드레드>에 비해 2012년의 <저지 드레드>는 본격 오락영화라는 점입니다. 일단 소재 자체에 어떤 깊이가 담겼다고 보기는 힘들어서 영화 전체의 의미도 가벼운 편입니다. 전자는 유전자를 조작한 일란성 쌍둥이를 내세우면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 등을 보여줬으나 후자는 그럴 여지가 극히 적습니다. 이것이 아쉽긴 하지만 실망할 단계는 아닙니다. 듣자하니 원작자가 이번의 <저지 드레드>를 흡족해했다고 하며, 삼부작으로 기획해서 속편이 제작될 가능성이 높으니 차차 또 다른 이야기를 보여줄 것도 같습니다. 그렇다면 <저지 드레드>는 1부의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

덧 1) 저음의 목소리에 힘을 잔뜩 준 건 동일하지만, 실베스터 스탤론과 달리 칼 어반은 단 한번도 헬맷을 벗지 않습니다.

덧 2) 드레드의 파트너로 등장시킨 앤더슨도 제 몫을 톡톡히 합니다. 이 캐릭터를 보면 역시 시나리오가 참 좋았어요.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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