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현실은 우리가 상상하는 세계보다 상냥하고 유쾌하다. 세상 곳곳에 히어로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평상시에 이들은 평범한 우리와 같다. 출근하기 위해 맞춰 놓은 알람이 울리면 5분만 더, 하고 베개에 얼굴을 묻고 버티고,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씻고 먹고 출근 준비를 하여 버스 정류장으로 지하철역으로 뛰어간다. 거의 정시에 출근하여 의자에 앉자마자 모니터를 켜고 일하기 시작한다.

12시까지 정신없이 일하고 나면 기다리던 점심시간. 점심 메뉴를 정하고 동료와 함께 맛점을 하러 간다. 아이들 이야기, 아내와 남편, 아이들 이야기, 음식 이야기, 여행 이야기를 하다 보면 점심시간이 지나간다.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나면 다시 업무가 시작된다. 저녁 6시까지 그보다 더 많은 시간 업무에 힘을 쏟고 나면 기다리고 기다리던 퇴근 시간이다. 만원 버스에, 만원 전철에 시달려 집에 돌아오면 혼자 시원한 맥주를 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생긴다. 히어로의 일상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히어로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산다.

이미지 출처=게티이미지뱅크​
이미지 출처=게티이미지뱅크​

한때 세계 곳곳에 숟가락을 구부리는 초능력자들이 살았다. 엄지와 검지로만 숟가락을 슬슬 만져도 구부러지는 놀라운 능력을 보며 더 놀라운 능력을 가진 초능력자들이 세계에 살고 있다고 믿었다. 투시 능력이 있다는 사람이 나타나고, 손가락 하나로 강철을 뚫을 수 있다는 사람이 나타나고, 멈춘 시계를 움직일 수 있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우리는 그들에게 열광했다. 그들의 초능력이 속임수이며, 그들은 사기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전까지, 우린 그들이 손가락 움직임에 집중하며 놀라워했다. 과학으로 그들이 사기꾼임을 증명하겠다는 사람들이 나와 숟가락을 구부리는 일은 초능력자가 아니라고 하여도 가능하단 사실을 보여주었다. 숟가락을 구부리는 초능력자들은 한순간에 비웃음거리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들은 초능력을 숨긴 채 우리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틀 동안 115년 만의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다. 서울과 경기 북부는 순식간에 물바다로 변했다. 무릎까지 차오른 물은 3분도 걸리지 않아 가슴까지 차올랐다. 차를 버리고 빠져나가야 했고, 미처 차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은 차 위에 앉아 구조를 기다리거나 물살에 휩쓸렸다. 마치 재난 영화를 보는 듯했다. 정말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나는 일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뉴스나이트] 침수에 나타난 영웅들... 우리 동네 슈퍼맨을 소개합니다. (YTN 보도화면 갈무리)
[뉴스나이트] 침수에 나타난 영웅들... 우리 동네 슈퍼맨을 소개합니다. (YTN 보도화면 갈무리)

빗물이 차오르다 못해 강을 이루는 가운데 강남역에 히어로가 나타났다.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고 있는데 물살에 떠내려온 쓰레기로 뒤덮인 배수관 덮개를 열어 배수구를 막고 있는 쓰레기를 치웠다. 물이 배수구로 빠르게 빠져나가는 것을 보며 우리의 히어로는 홀연히 사라졌다. 의정부에서 같은 능력을 가진 히어로가 나타나 막힌 배수구를 뚫고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사람들의 SNS를 통해 전해졌다.

서초구의 히어로는 목까지 차오른 물속에서 ‘살려주세요’라는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망설임도 없이 뛰어들었다. 물살이 거셌다. 서초동 히어로는 여자에게 튜브 대용으로 플라스틱 주차금지 표시판을 안겨주고 목 밑까지 차오른 뿌연 흙탕물을 뚫고 헤엄쳐 여자를 구했다. 여자를 무사히 가족에게 인도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의왕시의 아파트 히어로들은 경비원의 도와달라는 한 마디에 새벽 1시에 산책로로 모였다. 아파트 인근 산책로에 물이 차오르고 있다는 말에 물길을 뚫고 산책로로 모인 히어로만 30명이 넘었다. 돌과 흙을 치우고 물길을 뚫었다. 용인의 히어로는 불어난 물살에 자동차 안에 갇힌 사람을 구조했다.

우리의 히어로들은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길이었고, 생각만 해도 피곤한 출근을 위해 잠자리에 들었었고, 집 앞에 잠시 나왔을 뿐이었다. 우리와 다르지 않은 일상이었다. 우리는 몰랐지만 히어로는 우리의 주변에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있었다. 우리가 위험에 처했을 때 이들의 능력이 빛을 발한다.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하는 말 한마디에 초능력을 발휘한다.

바가지·양동이 들고 침수 막은 아파트 주민들 (청주=연합뉴스)
바가지·양동이 들고 침수 막은 아파트 주민들 (청주=연합뉴스)

우린 과학으로 모든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숟가락을 구부리는 일은 초능력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증명할 수 있는 시대에 여전히 초능력을 가진 히어로가 지구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고 홀연히 사라졌다는 목격담은 그 옛날 전설처럼 SNS를 통해 전해져 확인할 수 있다. 과학으로 증명하지 못하는 것이 없는 시대에도 과학으로도 증명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사랑, 이타심, 희생이다. 우리 히어로의 초능력은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이타심-사랑에서 비롯된 희생이다.

우리의 평범한 히어로는 여전히 활동 중이다. 위험에 처해 있다면 외치면 된다. 도와주세요, 라고. 근처에 우리의 평범한 이웃, 히어로가 항상 대기 중이다. 우리, 생각보다 상냥하고 유쾌한 세상에 살고 있다.

김은희, 소설가이며 동화작가 (12월 23일 생), 대전일보 신춘문예 소설 등단, 국제신문 신춘문예 동화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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